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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Hermeneutics and preaching 112719
해석학과 설교
[신학단상]


(서울=코리아위클리) 정용섭 목사(샘터교회) = 필자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설교자에게 해석학 공부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외쳤다. 이에 대한 반론이 가능할 것 같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롭게 전하기만 하면 충분하지 해석학은 필요 없다. 둘째, 모든 설교행위는 이미 해석을 전제하기 때문에 굳이 해석학이라는 전문적인 용어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이런 반론들은 성서해석학이 무엇인지, 또한 설교행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혼란이다. 성서텍스트를 그저 구색 맞추기 정도로 다루고 실제로는 자신의 신앙경험으로 설교를 도배하는 설교자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나름으로 성서 말씀에 집중한다는 소위 강해설교자들도 역시 언어를 통한 진리(알레테이아)의 탈(脫)은폐적 속성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반론에 대해서 필자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대신 해석학이 무엇인가에 관한 간단한 개념정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대답하겠다.

해석학(Hermeneutik)이라는 단어는 헬라 신화의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는데,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 일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 경우에 사람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마당에 전혀 다른 지평에 존재하는 신의 언어를 인간이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번역, 통역, 해석이 필요하다. 설교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귀에 전달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헤르메스의 역할과 똑같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언어도 알아야 하고, 인간의 언어도 알아야 하며, 언어 존재론적 힘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조금 거칠게 말하는 걸 용서하시라. 한국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언어도 잘 모르고, 사람의 언어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은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채 단지 성서의 정보에만 치우쳐 있을 뿐이며, 또한 청중들의 종교적 요청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성서 언어의 존재론적 힘이 아니라 정보만 알고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필자가 경험한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관심조차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방식, 하나님의 계시행위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설교에는 해석학적 관점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설교가 해석학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또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모세도 하나님의 등만 보았다. 시공간의 한계 안에 던져진 인간은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모른다는 말은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는 뜻인데, 이는 곧 성서텍스트의 은폐성을 의미한다.

성서는 하나님을 확연하게 드러낸다기보다는 오히려 은폐시키는 문서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인데, 무슨 은폐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계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bstoffenbarung)이다. 지금 하나님은 아직 ‘자기’를 온전하게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는 여전히 숨어 있는 분이다. 성서는 하나님을 노출시키면서 동시에 은폐시킨다. 하나님은 변증법적 차원에서 은폐의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며 동시에 계시의 하나님(Deus revelatus)이라는 바르트의 주장이 바로 이것은 말한다.

은폐가 완전히 사라지고 계시가 완성되는 때를 가리켜 우리는 종말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는 그 종말이 오기 전의 은폐의 시간을 살고 있는데, 바울은 지금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실체를 확연하게 아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C.S. 루이스도 < Till We have faces >라는 책에서 먼 훗날이 되어야 우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은폐성이라는 말을 설교 주제와 연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보라. 그것이 인간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은 아직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십자가는 분명히 하나님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사건이며, 예수의 운명이 실패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구원의 길로 믿는다. 왜 그런가? 여기에 실증이 있는가?

십자가 사건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으며, 따라서 여전히 해석되어야만 한다. 부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 부활을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믿으며, 특히 예수의 부활을 그 궁극적 생명의 선취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부활의 실체는 여전히 숨겨 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가?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가 없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기독교의 도그마가 불확실하다거나 진리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통치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 자체이다. 다만 오늘 우리는 그것의 실체를 온전히 인식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말에 가서야 그 모든 비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지금 설교자는 종말에 드러나게 될 그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시공간적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청중들에게 해명하는 사람이다. 도대체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 결정론적으로 모든 진리를 소유하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 설교자들도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설교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설교자들에게 ‘소극적인 설교’를 하라고 권면한다. 설교자의 역할은 가능한대로 줄이고 진리의 영인 성령의 역할이 지배하는 설교를 지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설교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설교는 가능하며, 설교자는 필요하다. 이를 위한 준비는 철저해야 한다. 영어 통역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영어와 주변학문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야 하듯이 설교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쪽으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해석의 전문가가 아니라 단지 설교 기술자만 요구한다. 교회 강단에 성서 해석은 없고 단지 포장 기술만 차고 넘친다. 성서의 영적 깊이로 천착해 들어가는 설교자는 설 자리가 없고, 청중들의 감수성과 종교적 욕망을 놀라운 입담으로 자극하고 선동하는 설교자가 모든 자리를 독차지하는 실정이다.

이 결과는 어떻게 될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하다. 이로 인해서 스타 목사들을 향한 신자들의 쏠림현상은 나타나겠지만 한국교회 전체는 타이타닉 호처럼 어느 물밑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려짐: 2019년 11월 29일, 금 11:2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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