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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Who is the lost? 110619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읽는설교] 본문: 눅 19:1-10, 창조절 열째 주일


(서울=코리아위클리) 정용섭 목사(샘터교회) =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벌어진 일화가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9:1-10절에 나옵니다. 그 풍경은 아주 특이합니다. 한편으로는 만화처럼 재미있는 삽화처럼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연극의 한 무대처럼 보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영혼이 가을 하늘처럼 투명해지는 느낌이 들 겁니다.

삭개오

처음 장면에 삭개오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여리고 지역의 세무관리를 책임진 사람이면서 부자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동북 방향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여리고는 당시 저 멀리 베뢰아 지역에서 유다 지역으로 상품을 운반하는 무역상들이 거쳐야 할 요충지였습니다. 국제 무역이라서 당연히 세금을 징수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부자였다는 말은 별로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로마 정부가 할당해준 세금 액수보다 더 많은 통관세를 거둬서 나머지를 착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흔히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민족 반역자로 간주했습니다. 세리장인 삭개오는 돈은 많은데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불균형으로 그의 영혼이 아주 불안했겠지요. 돈만 많으면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상관없이 뻔뻔하게 사는 사람도 있으나 삭개오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가 사는 여리고에 들린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유랑 랍비로 활동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만나지 못한다면 옆에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이미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는 그랬습니다. 그런 태도는 경건한 유대인 지도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비난하면서 “저 친구는 세리와 죄인과 친구처럼 어울려서 지내면서 먹고 마신다.”라는 말을 퍼뜨렸습니다.

예수가 지나는 길목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 틈에 끼어 있던 삭개오는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개 마음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삭개오는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예수가 지나갈 길목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정말 뜻밖의 행동입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일은 대개 아이들이 합니다. 그 나무에 몇 명의 아이들도 매달려 있었을 겁니다. 그 장면이 머리에 그려집니다. 다행히 삭개오는 아이들처럼 키가 작아서 주변 사람들이 금방 알아보지 못했겠지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에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하룻밤 묵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예정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든 걸 보셨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나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분위기가 싸늘한 마을도 있고, 이렇게 따뜻한 마을도 있습니다. 당연히 기분은 좋으셨겠지요. 아이들은 예수님 바로 뒤를 따랐습니다. 동네 강아지들도 나왔겠지요. 축제 분위기입니다. 저만치 돌무화과나무가 보입니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기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키는 작아 보이지만 아이는 아닌 게 분명합니다.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습니다. 나무 바로 아래까지 왔습니다. 나무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떤 남자가 나무 위에 매달려서 예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5절 말씀이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

예수님은 다짜고짜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가 누군지 알고 있었나 봅니다. 삭개오가 그 인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실 때 한번 만나 뵙고 싶다는 말을 삭개오가 지인을 통해서 미리 예수님에게 알렸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삭개오’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여보세요. 나무에서 내려오십시오. 오늘 제가 당신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누가복음 기자가 독자들을 위해서 친절하게 삭개오라는 이름을 붙였을지 모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이 이야기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일행은 부자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씻고 먹고 대화를 나누면서 여독을 풀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떠나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삭개오의 집까지 따라와서 “예수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라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리는 당시에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인도에 아직도 남아있는 불가촉천민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아도 당시 유대교 고위층에게서 일종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는데, 이번 일로 입장이 더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군중들이 그렇게 비판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겠지만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삭개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는지 삭개오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으며, 다른 하나는 남에게 불법적으로 손해를 끼쳤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당시에 회개에 합당한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에게 베푼 호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매우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남에게서 갈취한 것에 대해서 통상의 경우보다 훨씬 엄격하게 지급하겠다고 삭개오는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요즘 부동산 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재산의 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선언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재산의 반인지, 20%인지 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가 그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재물을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두 가지 사실을 재판장이 선고를 내리듯이 말씀하셨습니다.

1) ‘오늘’의 구원

9절 말씀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런 말씀을 들은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삭개오가 아무리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해도 그가 저지른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가 재산을 환원한다고만 했지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의 제자로 살겠다는 결단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구원이 임했다는 말인가, 더구나 세리는 매국노와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상식적이지도 않고 신앙적이지도 않은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오늘 구원을 선포했고, 삭개오를 유대 사람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오늘’이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구원은 늘 ‘오늘’ 일어납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보다는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삭개오는 오늘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발견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결단했습니다. 소유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었으며, 잘못한 것의 네 배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물질로부터의 자유, 체면과 명예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그 자유와 해방이 구원입니다. 지난날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오늘 그는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의 신비를 놓치고 삽니다. 지난 일을 후회하거나 그리워하다가 인생을 보냅니다. 왕년에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에 매달려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허망한 미래를 몽상적으로 좇다가 오늘의 삶을 다 소진합니다. 과거와 미래가 아무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와 미래는 오늘로 모입니다. 하이덱거는 이를 ‘순간’(Augenblick)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보세요.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무언가를 봅니다. 그리고 예배당이라는 공간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더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요? 많은 재산과 명예는 이 순간에 필요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생명의 깊이를 느끼고 살아내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오늘 전혀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걸 아는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죄인 삭개오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생명의 환희와 신비를 느껴야 합니다. 사랑과 희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걱정거리도 많고 숙제도 많고, 나라도 걱정해야 하고, 교회도 걱정해야 하고, 싫은 사람 생각이 자꾸 떠오르고, 분한 생각도 들고, 자식 걱정도 떠나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을 경험할 수 있냐고요? 예, 우리가 공중에 둥둥 떠서 사는 사람이 아니기에 온갖 염려와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긴 합니다. 인간이기에 부닥치는 일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까지는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일을 후회하는 데에 머물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거리는 없습니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그렇습니다. 삭개오에게 일어난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붙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 잃어버린 자

예수님은 10절에서 핵심 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런 주제는 눅 15장에 비유 형식으로 반복해서 나옵니다. 백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심정,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한 개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한 여자의 기쁨, 집을 나갔다가 쫄딱 망해 돌아온 둘째 아들을 뜨겁게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긍휼함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예수님은 거기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세 비유 모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다고 말을 하고 나름 감동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런 잃어버린 사람의 처지에 떨어지는 걸 크게 두려워합니다. 잃어버린 이는 소수자이고 외톨이입니다.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대개의 사람은 가능하면 소위 강남의 1%에 속하는 인생을 원합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는 잃어버린 소수자를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는 그런 잃어버린 자가, 즉 세상의 마이너리티가 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정신적으로 이중적입니다. 머리로는 자기의 정체성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라고 여기지만 몸으로는 늘 주류에 포함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강력한 도전이자 걸림돌입니다.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과 같습니다. 속이 더부룩합니다.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잃어버린 자’의 실존에서만 하나님 경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아서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고 생활도 넉넉해지면서 즐거운 인생이 펼쳐진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이 모두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제가 멈칫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좋은 사람끼리 어울려서 즐겁게 살다 보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딜레마입니다. 인간적인 행복이 우리 삶의 목적인데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사람만이 만날 수 있습니다. 시나 음악 경험과 비슷합니다. 시인들은 언어를 갈급하게 찾습니다. 작곡가는 소리를 갈급하게 찾습니다. 시인이 인간적인 수다에 떨어지면 시를 쓰지 못합니다. 작곡가가 대도시 소음에 파묻혀 지내는 걸 즐거워하면 창조적인 곡을 쓰지 못합니다. 친구가 많고 인생이 즐거우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찾는 듯이 흉내만 낼 뿐입니다. 그가 영혼의 깊이에서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재난을 당했다고 합시다. 가난해졌고, 건강도 잃었고, 지인들도 떠났습니다. 노숙자 같은 신세를 벗어날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대개는 절망하고 인생을 포기합니다. 그런 순간에도 영혼의 눈이 밝은 사람은 어떤 생명의 힘이 자기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지난날에는 보이지 않던 게 그제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천사를 경험합니다. 이런 늦가을 햇살에 눈이 부십니다. 단풍이 눈물 나도록 사랑스럽습니다. 잎 떨어진 나무에 달린 몇 깨 까치밥 감도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천사의 합창으로 들립니다. 이전에도 이런 경험이 가끔 있었지만, 친구를 만나야 하고, 투자한 주식 경기도 챙겨야 하는 등, 바쁘게 지내서 잠시 스칠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오직 그것만이 자신에게 삶의 근본으로 다가왔습니다. 생명의 영인 성령이 자기를 감싸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예수를 실제로 더 가까이 느꼈겠지요. 잃어버린 자에게만 가능한 하나님 경험입니다.

많은 사람과 일과 돈과 인간관계에 파묻혀 사는 세상살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잃어버린 자의 영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각자에게 딱 들어맞는 정답을 저는 모릅니다. 삶의 태도에 대해서만 두 가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잃어버린 자의 운명에 떨어지는 걸 미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순간이 오히려 우리가 구원받는 결정적인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일지 모릅니다. 둘째,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언젠가는 잃어버린 자의 운명에 떨어집니다. 곧 들이닥칠 그 운명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압니다. 다만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본문인 삭개오 이야기에 여러 사람이 나옵니다. 대개는 예수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듣고 배운 기준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는 데에 시간을 다 보냅니다. 이들과 달리 ‘잃어버린 자’였던 삭개오가 나옵니다. 그는 세상의 판단 기준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빛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경험입니다. 저는 삭개오가 되고 싶습니다.
 
 

올려짐: 2019년 11월 11일, 월 2:1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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