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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Neoliberalism and God's kingdom 102319
신자유주의 체제와 하나님 나라
[호산나 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얼마전 서울대생 74%가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에 반대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기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똘똘한 학생들이 반대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조국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 역시 정말로 조국이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쪽으로 무의식의 추가 기운다. 여전히 망설이긴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놓고 조국을 지지하지 않게 된다. 내 추측이다. 그러나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서울대생의 반대를 전혀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다. 서울대생의 84%가 십 분위로 나눈 사회계층 가운데 첫 번째 1,2분위에 속한다는 내용을 보았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서울대생들이 부잣집 자녀들이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강남 우파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해체하려는 강남 좌파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없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특히 강남 우파의 자녀들은 부모세대보다 훨씬 더 자신들의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계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계급이 다르면 절대로 만나지도 교제하지도 않는다. 물론 섹스 파트너로서는 계급을 간과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은 가당치도 않다. 동성 간의 친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시적으로 어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올드 프렌가 될 수는 없다.

내 생각이 너무 '좌빨'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나는 좌빨이 아니다. 나는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예수의 제자이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가장 현저한 정의는 평등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가장 현저한 행동이 계급의 타파이다. 그분은 모든 사회적 장벽을 허무셨다. 유대인에게 이방인은 상종할 수 없는 지옥의 불쏘시개로 만들어진 개들이었다. 그 장벽을 허무셨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녀 차별은 결코 허물거나 무시될 수 없는 순리였다. 이 장벽 역시 허무셨다. 당시 노예들은 말할 수 있는 짐승이었다. 죽여도 되고 유린해도 되는 노리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장벽 역시 허무셨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말하지 말라. 틀린 말이 아니지만 자유란 의미가 들어가면 자칫 그대로 두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평등은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하나님의 정의이다.

내가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추구하고자 기존의 교회의 예배를 멈춘 것도, 교인이 한 사람도 없는 목사로 새로운 시드멤버를 기다리며 수년을 기다리는 것도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교회의 틀에는 결코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담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하고자 과거를 청산한 것이다.

평등이 가장 우선하는 하나님의 정의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 간의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빈부의 격차가 있을 수 있는가. 소외가 있을 수 있는가. 혐오와 배제가 있을 수 있는가. 헌금유용이 가당한가. 세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가.

특히 성범죄와 관련해서 나는 성서가 언급하고 있는 '거룩한 입맞춤'을 강조하고 싶다.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진정한 형제애를 오늘날 사람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남녀 간에 입맞춤을 하여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의 형제애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그들에겐 오히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형제애가 평등의 근간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대부분 인식하지 못한다. 비극의 주인공이 된 김용균씨의 죽음은 단순히 '위험의 외주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비정규직을 당연시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된 신자유주의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IMF 위기 때이다.(1997)

공기업 민영화, 거시 경제 안정을 위한 재정의 건전성 중시, 기업의 구조조정(개혁) 등의 다양한 정책 조합은 신자유주의의 구체적인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 핵심은 하청노동자의 양산이다.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아직까지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 담론의 외투를 입고 우리에게 왔기에 그 심각성을 알지 못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사회적 약자(여성, 정신장애인, 비정규 하청 노동자들, 가난한 무주택자, 동성애자, 이주자 난민....)에게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온다. 신자유주의가 통제받지 않는 경우, 시장이 즉, 사회 자체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마치 소모품처럼 '갈아 넣는' 파시즘적 상황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소비주의와 불안을 모태로 끊임없는 무한 경쟁 속에서 약자들을 서서히 눈에 안 보이게 '배제'하고 있다. 즉, 과거에는 국가가 폭력을 사용하여 사회를 통제하였다면 이제는 사회 자체가 폭력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태극기부대에 넘치는 폭력의 광기는 바로 이러한 사회 체제의 일면이다.

기독교 안에 있는 폭력적 혐오 역시 이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적 연대 대신에 '사회적 파편화'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각자도생하면서 자신보다 약자를 위계 서열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당연하게(합리적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체제는 특히 위계 서열적 차별이 극심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부잣집 자녀들인 서울대생들이 토지공개념과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조국을 반대하는 것은 위계 서열적 차별을 내면화한 이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안사회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폭력과 문제성을 환하게 드러내는 빛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을 위해 선택된 이 시대의 의인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부자가 되려는 신자유주의 체제 신봉자들이 되어 대형교회를 이루고 오히려 자신들이 보호하고 섬겨야 할 성서가 말하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인 사회적 약자들을 짓밟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랑하는, 단순히 무식한 자들이 아니라 불법을 행하는 악인들이 된 것이다. 아무리 제자훈련을 해보라. 아니 이미 드러나고 밝혀지지 않았는가.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들이 되었다!!

그들을 개혁할 방법이 있는가. 없다. 아무리 그들을 개혁해보라. 그들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신봉하는 사단의 회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평등이다. 모든 사회적 장벽들이 철폐된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새로이 설립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제대로 인식한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며 방향이다.
 
 

올려짐: 2019년 10월 26일, 토 9:4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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