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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Beyond evangelical beliefs 3
복음주의 신앙을 넘어서(하)
[읽는설교] 이사야서 53:2~6


(서울=코리아위클리) 길희성 형제(한국 새길교회 신학위원)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의식, 사회참여, 사회정의를 외치면 다 출세욕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비난받거나, 툭하면 ‘좌빨’로 몰린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을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괴물로 여긴다. 종교를 정치화한다고 비난하고 종교와 정치는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더 탐하며 쉽게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아부하는 사람들이 복음주의를 내세우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다.

무슨 조찬기도회 같은 모임은 열심히 쫓아다니고, 어떤 모임이든 나서서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무슨 그리스도교 실업인 모임, 그리스도교 동문회 같은 데 부지런히 앞장서서 얼굴을 내민다.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고 갑질을 일삼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자를 자처하는 고용주들이 우리나라 그리스도교계에는 차고 넘친다. 스스로 예수 잘 믿는다고 목에 힘주고 사는 목사나 장로님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제일 ‘무섭고’ 만나는 것조차 껴려진다. 그런가 하면 요즘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현 교황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압박하는 세력도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국 복음주의가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이 없다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정말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게 더 문제다. 얼마 전까지 기승을 부리던 태극기 집회를 보라. 참가자들이 사회의식, 정치의식, 역사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모두가 미국식 사회의식, 좀 더 정확히 말해 미국의 ‘그리스도교 우파’들이 보는 대로 사회를 보고 세상을 보고 정치를 보면서, 그것이 그리스도교적이고 신앙적이라고 여긴다. 미국을 맹종하는 미국숭배이다. 태극기를 흔드는 행위는 그런대로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라 치더라도, 왜 미국 성조기를 흔드는지, 게다가 왜 이스라엘 국기까지 등장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또 거대한 나무 십자가는 왜 앞장세우고 행진하는지, 그런 장면을 보면서 도무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창피하고 자괴감이 들어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다. 어쩌다가 한국 그리스도교가 저렇게까지 망가졌나? 그동안 신학교 교수들을 무엇하고 있었나?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는 미국에서는 전혀 알아주지도 않는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교인들 앞에서 자랑하며 무슨 벼슬이라도 한 듯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복음주의 목사들이 굳이 학위라는 것이 필요할까 싶은데도, 학위를 탐내, 쉽게 취득할 수 있는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행세하는 목사님도 많다. 그래도 이건 좀 나은 편이고, 개중에는 미국에 아예 가 본 적도 없이, 아니면 여름에 한두 달 정도 다녀와서 학위를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더 심한 경우는 아예 가짜 학위를 위조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유명한 강남의 모 교회 담임목사가, 학위 문제, 논문 표절 문제로 교회가 두 동강이 났는데도, 아직도 버젓이 교회에서 설교하며 목회하고 있다. 교회에서 축출되기는커녕, 오히려 참다못해 뛰쳐나간 교인들이 모인 교회보다 훨씬 더 많은 신도들이 모인다고 하니,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 회의 참석차 일본을 다녀오면서, 공항에서 시간이 남아 서점에 들렀다가, 두 주 지난 〈뉴스위크(Newsweek)〉가 딱 한권 판매대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특집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즉시 사서 읽었다. 제목이 기가 막힌다. “Does God believe in Trump?” 하나님도 트럼프의 말을 믿을까? 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 밑에는 바티칸 시스티나 채플 천정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천지창조〉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그림이 있다. 아담 대신 트럼프가 손을 뻗쳐 하나님의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장면인데, 트럼프가 툭하면 하는 말, “당신, 당장 해고야!”가 쓰여 있다. 잡지 기사는 가짜 복음주의자 트럼프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글이며, 그와 미국 복음주의 진영의 유착관계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내용이다. 미국이나 한국 복음주의자들이 필히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복음주의를 자랑할지 무척 궁금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한국 복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십자가 신학>이 없는, 아니 십자가 신학을 전혀 모르는 승리주의 신앙이다. 죄의식이 정말로 중요하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찬양하면 될 터인데, 복음주의자들이 보이는 행태는 그렇지가 않다. 신도수를 자랑하는 한국의 주류 종교가 되고 권력집단이 된 힘을 믿고 승리주의 신앙에 도취되어 있다. 불의한 세상에서 고난을 받다 죽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본받는 대신 하늘에서 영광을 누리는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바쁘다. 예수의 자기 비움과 희생은 온 데 간 데 없고, 하나님의 약함이야말로 참 강함이고 죽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사즉생의 십자가 신학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영광의 주님만 찬양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은 철저히 무시되고, 하늘 높이서 세상을 굽어보면서 통치하는 모습의 그리스도, 힘과 권력의 통치자 그리스도만을 찬양하고 섬긴다. 교회만 다니면, 그것도 자기 교회를 다니면, 은혜가 충만하고 구하는 모든 일이 다 자기 뜻대로 잘 되고 순탄하다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 싸구려 은총을 남발한다.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가 남발했던 면죄부(더 정확히 말해서 ‘면벌부’)와 무엇이 다를까?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은 오늘의 한국교회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면벌부를 팔아 모은 돈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성 베드로 성당을 지은 것을 예수가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각종 명목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헌금을 갈취하는 오늘의 한국교회, 자격도 없는 목사들을 양산하면서 몇몇 목사들에게는 억대의 연봉과 엄청난 퇴직금을 안겨주는 한국 대형교회의 모습을 예수가 본다면, 과연 어떻게 하실까 상상을 해 본다.

내가 사는 강화에만도 높이 세워진 예수상, 산이나 동산 위에 두 팔 활짝 펴고 우뚝 서 있는 예수상이 여러 군데 있다. 멀리서도 잘 보인다. 마치 세상만사를 관장하고 주관하는 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듯, 승리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수상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내가 보기에도 민망하고 거부감이 드는데, 신자 아닌 사람들이 보면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비칠까 염려 된다. 세상의 고난을 온 몸으로 안고 살다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예수의 고난, 그리고 그러한 고난을 초래한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에 용감하게 맞서면서 지금도 예수의 고난을 몸으로 살고 있는 세계의 무수한 ‘작은 예수’들은 안중에 없고, 마치 세상의 온갖 축복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듯이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승리의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한국 복음주의 신앙을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단언하건데,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었다는 십자가의 신학, 바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강하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지혜롭다’는 바울 사도의 십자가의 신학, 기복신앙을 뒤엎고 기존의 하나님 인식을 확 뒤엎어버리는 십자가의 신학을 모르고,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잘못된 복음주의 신앙이 깔려 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우리나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유난히 탐욕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무지와 위선 때문이다. 이제 세계 그리스도교계와 한국 개신교는 새로운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반갑지 않고 달갑지 않고 무거운 마음이 앞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축하하고 축제를 벌이기보다는 왜곡된 복음주의 신앙을 과감하게 청산해야 할 과제가, 그리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높고 크기 때문이다.

순수한 복음의 회복

나는 한국 복음주의가 앓고 있는 복음주의 신앙의 중병을 고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근본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을 되찾으려면, 이제 세계 그리스도교와 한국교회는 위에 열거한 오해와 오용의 가능성을 다분히 안고 있는 전통적인 복음 이해 자체를 확 바꾸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나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 대속의 복음으로 선포하는 신앙 대신에, 예수 자신이 전파하고 다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가 그토록 선명하게 보여준 은총의 아빠 하나님의 복음과 신앙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복음주의 신앙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믿는다.

이 사랑과 은총의 아빠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감 없이 극명하게 가르쳐주시고 몸으로 보여주신 예수 자신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 자신이 지녔던 아빠 하나님 신앙을 되찾아야 한다. 교회가 전해온 예수에 <대한> 복음, 예수에 <대한> 신앙 대신,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 자신이 전한 복음, 예수 자신이 지녔던 신앙으로 과감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요구하는 새로운 종교개혁의 기초이며 근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복음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이며,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생명의 끈이다.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은 이런 점에서 영원한 진리이며 그리스도교의 생명이다. 문제는 불순물로 잔뜩 오염된 잘못된 복음주의이고, 그렇게 될 소지를 안고 있고 게다가 설득력이 없는 전통적인 교회의 복음주의에 있다. 루터가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이라면, 이제 우리는 현대의 성서학과 신학을 통해 루터보다도 더 순수하고 단순한, 아니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보다도 더 순수하고 직접적인 예수 자신의 복음과 신앙을 알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이제 새로운 종교개혁을 할 때가 되었다. 현대 그리스도교는 사즉생의 각오로 일대 변혁, 전환을 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정말 다 죽는다. 부자가 망하면 몇 대 간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그리스도교도 당분간 어영부영 지속되겠지만,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이미 생명력을 상실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더 설득력 있는 새로운 복음 이해, 새로운 신앙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 몇 가지 점으로 이런 주장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예수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이분법적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둘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나 복음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예수 자신과 바울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놀라운 말이며 놀라운 주장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바울과 교회가 전하는, 예수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선포하는 복음 사이에, 예수의 하늘 아버지 신앙과 바울이 전한 대속 신앙 사이의 차이, 예수 자신이 증언하고 몸으로 보여주신 복음서에 기록된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총의 아빠 하나님 신앙과 자기 아들의 죽음을 대가 혹은 조건으로 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 신앙 사이에 차이가 크다는 말이다.

하나는 예수가 친히 전한 <아빠 하나님 중심>의 복음과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셨다는 바울과 교회가 전한 <예수 중심>의 신앙이다. 둘의 차이는 극명하다. 바울의 예수에 <대한> 신앙은 예수 자신<의> 하나님 중심적 신앙을 공연히 복잡하게 만들어서 오히려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신앙을 공허하기 짝이 없고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둘째, 새로운 복음 이해는 예수가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는지는 안중에 없고 무조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라고 떠드는 맹목적 예수숭배에서 벗어나게 한다. 예수는 이 세상에 죽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펴시며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실천하신 그의 가르침과 행위의 비극적 결과이지 목적 자체는 아니었다. 예수의 죽음은 아빠 하나님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극명하게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삶을 산 결과였지, 죽음 그 자체가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토록 고민하며 괴로워하신 예수의 모습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신 것이 인간 예수의 진정한 모습이다. 예수는 인간이 진정으로 살 길을 복음으로 전했지 자신의 죽음을 복음으로 선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참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분이지, 그의 죽음 자체가 온 인류를 구원하는 무슨 엄청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을 예수의 삶 전체로 이해해야만 한다. 단지 그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는 추상적인 복음 이해는 잘못 된 것이다. 예수의 삶과 메시지 전체가 복음, 즉 ‘Good News’이지 유독 그의 죽음만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셋째, 우리는 그래서 예수 죽음의 의미를 대속의 죽음보다는 바로 우리 같이 의롭지 못하게 사는 사람들, 적당히 타협하고 어영부영 사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받는 대고(代苦)로 이해해야만 한다. 즉 우리 대신 받는 고난이자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속이든 대고든 둘 다 예수의 무고하고 억울한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이고 해석이지만, 대속보다는 대고가 훨씬 더 우리 마음에 와 닿고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은 먼 옛날 우리와는 아무 인연도 없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지구 한 구석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여기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예수의 정신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살면서 고난을 받고 있는 수많은 의로운 자들의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죽음이고 재현되고 있는 죽음이다.

예수의 죽음은 분명히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과거의 유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반복되고 있는 죽음으로서 ‘영원한 사건’이다. 세상의 모든 무고하고 억울한 죽음, 의로운 죽음의 신화적 원형(mythical archetype), 따라서 영원히 반복되고 재현되는 죽음이라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 어디선가, 그리고 지구 어디에선가 의로운 자들이 작은 예수(little Jesus)로서 우리 같이 의롭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을 위해 대신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의롭게 사는 자들, 오늘의 ‘작은 예수들’에게 빚을 진 사람이라는 부채의식, 죄의식, 최소한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복음주의자들처럼 말끝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셨다고 떠들어대면서 지금 우리 시대에 있는 작은 예수들이 받는 고난을 외면하는 뻔뻔한 복음주의자들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함석헌은 이런 복음주의자들을 두고, 남을 위해 피 한 방울 흘려 본 적 없는 자들이 예수의 피, 예수 보혈을 떠든다고 꼬집었다. 예수의 죽음을 지금 나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죽음, 그야말로 2000년 전에 나도 모르게 일어난, 다시 말해 하나님과 당신의 아들 사이에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그야말론 ‘자동적’으로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는 공허한 복음으로 만들지 않는다.

믿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믿는 신앙이 되지 않는다. 값싼 복음의 은총을 남발하는 신앙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의로운 싸움을 싸우며 핍박받고 고난당하는 자들에게서 십자가의 예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책임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된다. 뻔뻔한 ‘공짜’ 좋아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적어도 부채의식만이라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울 사도가 말하는 ‘복음에 빚을 진 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지금 여기서 나의 진리, 내가 살아내야만 하는 진정한 복음의 의미다.

다섯째, 복음을 이렇게 대고로 이해하는 신학의 성서적 근거로는 특히 구약성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약성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심판에 대한 예수의 비유의 말씀이 중요하다. (이러한 복음 이해에 대한 더 상세한 논의로, 나의 글 “두 가지 복음,”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대한기독교서회)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10월 01일, 화 8:4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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