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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Theology of weakness and the kingdom of God 092519
약함의 신학과 하나님 나라
[호산나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바울은 직가(지명이름)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하고 대략 13년이 지난 후 바나바에 의해 안디옥교회에 오게 된다. 바울의 선교여행은 여기서 시작된다.

바울은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증인의 역할을 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 잡을 권리를 부여받을 정도로 유대교 안에서 이미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을 정도로 이미 유대 사회에서는 오늘날의 박사에 해당하는 스펙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다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일하게 되기까지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야 했다.

그가 이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시간이 그냥 지나가는 시간은 아니었다. 나중의 그의 말을 분석해보면 그는 이 시간 동안 주님의 말씀을 내면화하고 심화하는 기회를 가졌다. 주님의 특별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시간은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긴 기다림의 시간은 거의 필수적이라 할 만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간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처럼 어지러운 것도 이 시간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 그가 누구든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 즉 소유, 재능, 학벌, 앎, 그밖에 자랑할 수 있는 모든 스펙이 nothing이 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 자체가 nothing이 되어야 한다.

바울의 13년은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그 긴 기다림의 시간 이후 그는 이전에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그가 자랑하던 것들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유대교의 엘리트였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금수저’요 부자였다.

그러나 그의 자랑이었던 이 모든 것들이 오물이 되었고, 단순히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는 사실을 그는 강조한다.(빌3:7)

이것은 그 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그에게 일어난 변화이다. 그러나 기다림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서 그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회개하고 돌아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은 성찰과 깊은 깨달음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 시간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시간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카리스마와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력해진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함을 통해 흐르고 발현되기 때문이다.

성서가 인간을 향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약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약함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게 해드려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서는 일관되게 이 ‘약함의 신학’을 강조한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신학적으로 잘 정리해준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허투루 듣지 말고 그가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라. 병약함, 모욕, 궁핍, 박해와 곤란을 그는 열거하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당치 않은 것들이다. 그것은 복음을 모르는 이들이 당하는 인생의 비참함이다. 과연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일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 수 있는 약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마도 그러지 못하실 것이다. 번영의 복음을 거부하면서도 막상 진짜 복음을 받아들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한 번 생각을 해보자. 만일 바울이 13년간의 기다림의 시간이 없이 곧바로 하나님의 일에 투입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자신의 일을 잘 해냈을까, 잘 못했을까? 자신의 스펙을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하면 유익하지 않았을까.

그는 잘 했을 것이다.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바울의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인간의 일이 되어버린 기독교의 현실과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간의 일이 되고, 인간의 일이라서 그런 부패와 타락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발현한다. 인간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반응하신다. 인간은 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바로 이 약함의 신학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교회나 명성교회와 같은 인간의 일을 하는 교회들에게 아무런 기대를 안 하는 것이다. 전병욱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곧바로 홍대새교회를 개척한 것도 그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잘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교회가 세상의 하부구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 약함인가. 아니다. 바울이 배설물로 여기는 바로 그것들이다. 그래서 인간의 일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부패와 타락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양희송 같은 개혁 운동가도 조용기나 오정현이나 김삼환과 마찬가지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일을 할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nothing이 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다. 이들도 nothing이 될 수 있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은 전병욱과 같이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기가 어렵다. 돈과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something으로 생각하는 양희송이 nothing이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학교를 언급했었던 것이다.

누구나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력함을 배우고 하나님의 학교를 졸업하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직 떨어져 죽으려는 사람들만이 그 기다림의 시간에 약함의 신학을 배운 후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된다.
 
 

올려짐: 2019년 9월 26일, 목 11:3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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