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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Beyond evangelical beliefs 091819
“복음주의 신앙을 넘어”(상)
[읽는설교] 이사야서 53:2~6


(서울=코리아위클리) 길희성 형제(심도학사 원장, 새길교회 신학위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 이사야서 53:2-6 -


죄와 은총: 복음주의의 깊이

복음주의 신앙의 대전제는 인간의 죄는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죄를 극복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더 죄에 말려들어가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방직공장 이야기인데, 직원 하나가 실이 엉키자 스스로 풀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점점 더 얽히게 돼서 결국 포기하고 현장감독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실 그 공장 벽에는 곳곳에 “현장감독(foreman)을 불러라!”는 말이 쓰여 있더라는 거다. 이것을 모르고 스스로 엉킨 실타래를 풀려다가 문제를 더 악화시켜 급기야는 포기하고 현장감독을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가 무엇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복음주의 신앙은 자신의 도덕적, 영적 노력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따라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공로주의’를 깨끗이 포기하고, 그야말로 두 손 들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바로 자기와 같이 도저히 구원 받을 길 없는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선물이고 은총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다는 믿음이다. 복음주의는 그래서 ‘죄로 죽고 은총에 기뻐하는 신앙’이며, 이러한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라는 것이다. 오페라 〈토스카〉에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라는 아름다운 아리아가 있는데, 복음주의는 ‘죄에 죽고 은총에 사는’ 삶을 노래한다.

이런 복음주의 신앙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신앙이며 마르틴 루터 자신의 정신이다. 루터 자신도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였지만, 아무리 수행해도 죄의식만 더해 갈 뿐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음을 깨닫고, 오히려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이지만 참다운 구원의 길임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의 구호 아래 중세 영성을 지배하던 공로주의 신앙, 즉 밤샘기도, 금식, 고행, 순례 등 각고의 수행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신앙에 사로잡혀 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깨끗이 청산하는 종교개혁의 물꼬를 튼 것이다. 복음주의는 이런 철저한 죄의식 없이는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며, 은총의 사상이나 교리도 죄의식 없이는 그 깊이와 진정성을 이해할 수 없다.

종교는 도덕이 아니다. 신앙은 흔히 오해하듯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도덕주의’(moralism)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선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란 상식적, 사회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 또 남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까 신경 쓰는 정도로는 진정으로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죄란 사회적 평판의 문제가 아니다. 남의 눈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은 속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눈과 자기 양심의 고발은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명령 앞에서 큰소리 칠 만큼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자랑할 만한 의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으며, 또 진정으로 뉘우치고 통회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인도 없다고 믿는 신앙이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같이 죄인이며 의인이다.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용서를 말하면, 도대체 자기가 무슨 죄를 그리 크게 지었다고 말끝마다 ‘죄’를 들먹이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한다. 교회란 유난히 죄인들만 모인 곳인가, 유난히 악한 사람들만 모인 곳인가? 아니면 쓸데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자학적인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죄란 결코 ‘사회적 통념’이나 상식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통념으로 보면, 대다수 사람들은 비교적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무슨 감옥에 갈만한 몹쓸 짓을 한 적도 없고 ‘유리지갑’이라 세금 내라는 대로 다 냈고, 그런대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는데, 자기가 무슨 죄인이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죄인을 윽박지르고 고문해, 결국 심한 고문에 못 이겨 억지로 자기 죄를 토설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조선 시대의 ‘죄’는 주로 국법, 그 가운데서도 역모죄가 가장 무거운 죄였다. 임금의 명을 거역했다는 등 사회적, 법적, 도덕적 죄 개념이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죄는 그 이상이다.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문제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가 아니라 간음한 여인을 앞에 두고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데,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는 먼저 돌을 들어 이 여인에게 던져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의 세계다. 죄는 나의 외적 행위가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라고 말할 정도이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당시 율법을 다 잘 지켰다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 이야기가 있다(누가 18: 9~14).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는 남과 다르게 살았다, 이런저런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았다면서 자신의 의로운 삶과 행위를 늘어놓지만,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조차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한다. 이 두 사람 가운데 후자야말로 하나님께 옳다함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예수의 말씀이다. 사회적 상식을 넘어서는 말씀이다.

여기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말은 루터 이래 개신교 신앙의 핵심인 ‘의화’(justificartion)와 같은 뜻이며, 이것은 결국 루터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과 교리가 바로 예수 자신의 가르침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루터 이후, 아니 루터 훨씬 이전부터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예수 자신의 은총의 사상과 신앙을 저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총의 하나님에 대한 예수 자신의 가르침이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에 굳이 루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예수야 말로 진정한 복음주의자였다!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도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그가 예수에게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먼저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반문하고, 청년은 율법에 있는 대로 이런 저런 계명들을 충실히 다 지켰다고 답한다. 그러자 예수는 “그러면 가서 너의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는 가혹한 말을 한다. 이에 부자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다. 부자 청년은 도덕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예수가 보기엔 그의 삶의 근본 방향, 근본적 삶의 태도가 문제였다. 예수는 이 점을 간파했다.

그 청년은 율법적, 도덕적으로는 별 문제없이 살았지만, 자기중심적 삶의 태도, 즉 자신을 위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에, 예수는 그런 근원적 결단을 촉구한 것이다. 예수의 이 명령 앞에서 부자 청년의 도덕적 자부심과 자만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가 예수의 말씀에 따라 실천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죄라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는 깨달았을지 모른다. 그는 그때까지 자기 삶에 근본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를 몰랐기에 예수를 찾아왔던 것이 아닐까? 영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그는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근심하며’ 돌아갔다고는 하나 말이다.

이것은 단지 부자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을 담고 있는 산상수훈을 보자. 그 앞에서 무슨 핑계,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평생 예수를 믿었다 해도 이렇게 예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의 태도가 무너질 정도로 도전을 받아보지 못한 삶, 그래서 과감한 결단을 내려 본 적 없이 어영부영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해 온 사람은 결코 진정으로 예수를 만났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는 결코 도덕주의자가 아니다. 엄격한 도덕교사가 아니다. 그가 보여준 ‘아버지’(아빠, abba) 하나님은 모범생만 좋아하고 사랑하는 우리네 부모와는 다르다. 예수가 가르친 진리는 바리사이파 같은 ‘의인’이 죄인이 되고,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이 의인이 되는 놀라운 역설의 세계, 은총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이런 것이 바로 복음주의 신앙이다. 누가 이런 복음주의 신앙을 비판하겠는가?

볼프람 에버하르트(Wolfram Eberhard)라는, 중국역사를 연구하는 독일인 학자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는 수치(shame)만 알고 죄(guilt)는 모르는 문화라고 했다. 수치란 체면을 중시하고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지만, 죄란 하나님 앞에 홀로 단독자로 서 본 자만이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죽음이자 은총이다. 우리사회가 수치심이 지배하는 문화라는 사실은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는 장면, 곧 죄를 짓고 경찰서에 끌려 들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잠바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만 가리고 남의 시선만 피하고 보자는 태도이다. 마치 쥐구멍이라도 들어갈 듯 하는 것이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범법자들의 일반적 모습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범법자들이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고도 수치는커녕 당당한 자세를 보인다. 적어도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기 전에는 그렇다. 하지만 미국인의 경우 무슨 잘못을 한 다음 “I am sorry.”라고 말하면 대체로 정말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진정성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툭하면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을 연발하면서 연신 몸을 굽실거리는 일본인들과 너무 대조적이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는 행위를 싫어하는 예의바른 사람들이지만, 일본 정치인들이 진정 죄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 보고 하는 말이, 너희 한국 사람들은 이미 사과를 했는데도 왜 자꾸 사과하라고 요구하는가,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들이 아무리 사과를 해도 직성이 풀리지 않으니, 한 번도 우리를 감동시킬 만큼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과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자꾸 사과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흔히 지적하지만, 같은 2차 대전의 전범국이지만 일본과 독일의 태도가 그렇게 다른 것은 왜 그럴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보기에는 일본인들이 식민통치에 대해 진정으로 잘못 했다는 죄의식이 없고, 따라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죄를 진 사람의 사과란 피해자가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할 때까지 몇 번이라도 해야만 한다. 이미 사과했는데 왜 자꾸만 사과하라고 하느냐는 것을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전쟁할 수 있는 ‘정상국가’가 되겠다고 공언하면서 평화헌법을 개정하려고 노리고 있는 아베 정권이 며칠 전 중의원 선거에서 3분의 2 개헌선을 너끈히 돌파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일본 매스컴은 8.15가 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를 조명하면서 일본이 ‘가해자’라는 사실은 별로 거론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피해자’라는 것만 부각시킨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는 것을 지지할 수 있겠는가?

죄란 단순히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체면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가 무너질 정도로, 자기 삶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질 정도로 내면의 죄를 깊이 느껴보지 못한 자는 진정으로 죄를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죄란 외적, 형식적, 도덕적, 법적, 사회적 통념이나 상식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평판 정도의 죄의식에 따라 도덕적 자만심을 가지고 사람은 자기만 못한 사람을 보면 마구 비난과 욕을 쏟아낸다. “죽일 놈”, “한심한 놈” 하면서 말이다. 이런 사람은 바울 사도처럼 자기가 “죄인의 괴수”라고 하는 고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지나친 자책처럼 들리고 자학증이라는 생각마저 들 것이다. 아니, 바울 같은 사람이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떡하란 말인가라는 푸념도 절로 나온다. 그러나 바로 죄에 둔감한 사람들을 두고 예수는 “세리와 창녀들이 바리사이 사람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총도 모른다. 죄가 얼마나 깊고 무서운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신앙의 세계, 은총의 세계를 알기 어렵다. 종교나 신앙의 세계는 단지 도덕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뭐 좀 안다는 사람들은 가끔 말하기를,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창시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바울이 만들었다면서 바울과 예수를 엄격히 차별화한다. 이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날카로운 죄의 인식에 근거해서 도덕적 자만과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바리사이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적 메시지에는 이미 바울의 죄와 은총의 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바울은 오히려 예수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죄의 깊이를 아는 자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해질 수밖에 없다. 죄를 가벼이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죄 없다.”고 큰 소리 치지 못한다. “나는 떳떳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남의 죄에 대해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감추어야 할 자기 죄가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려야 할 자기 약점이 많을수록, 남의 약점이나 죄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고 사정없이 욕을 한다.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말이다.

진정으로 죄를 아는 사람은 방심하지 않고 끊임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성찰한다. 자만하지 않고 매일매일 자성하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뉘우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영적, 도덕적으로 교만하지 않고 늘 겸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양종교들, 특히 인도종교들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깨달았다고 큰 소리 치는 자, 도사나 구루 같이 행세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도종교들은 구루 숭배, 종교 지도자나 교주 숭배에 빠지기 쉽다. 마치 자기가 신이 된 것처럼 신도에게 군림하는 오만한 지도자가 너무 많다. 히말라야 어디선가 오래 수행했다고, 어느 토굴에서 두문불출하고 다년간 수행했다고 자랑하면서, 마치 무슨 계급장이라도 붙인 듯 목에 힘주고 행동한다. 하기야 복음주의 신앙을 표방하는 목사님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인도종교만 탓할 노릇도 아니다. 여하튼 죄란 것이 무엇이며, 죄의식이 무엇인지를 깊이 아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교만해질 수 없다.

복음주의 신앙에서는 모든 인간이 별 수 없이 죄인이기에 다 거기서 거기라고 본다. 성인이나 죄인이나,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두 사람이고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오십보백보’로 본다. 요즘 유행하는 ‘남불나로’라는 말이 있다. 또 “남이 땅을 사면 투기이고 자기가 사면 투자라고 한다”는 말도 유행한 적이 있다. 진정으로 죄를 아는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고 엄격한 반면, 남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하나님의 절대 명령, 양심의 명령 앞에서 큰소리 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처럼 완벽하라.”는 예수의 말 앞에서 큰소리 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적어도 그 앞에서는 도덕적, 영적 교만은 설 자리가 없다! 모두가 거기서 거기, 오십보백보라고 생각하면 남에게 관대해질 수밖에 없다. 나도 저 사람의 처지였다면 똑같은 짓을 했을 터인데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아서 끔찍한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처지에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죄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든다. 때로는 너그럽게 용서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상식적 도덕이나 법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은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이라고? 그렇다. 사회의 법도 아니고 종교의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예수님의 경우, 원죄 개념 같은 것은 없었지만, 인간의 죄악성에 대해 깊은 의식을 가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가차없이 나무랐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에 대해서도 엄히 꾸짖었다.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한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다.”고 대담하게 선언했다. (다음호에 계속)
 
 

올려짐: 2019년 9월 21일, 토 6:5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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