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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Jang llsoon critical biography 091119
원주를 반유신 저항운동의 전진기지로 만든 두 사람
[무위당 장일순평전 28회] 1980년대 '민주화의 성지'가 광주였다면 1970년대 '민중의 성지'는 원주였다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1970년대 원주는 천주교 원주교구와 장일순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단체가 연합 또는 연대하면서 민주화의 열기가 넘쳐흘렀다.

정부는 지학순 주교를 풀어주면서도 '불온단체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가톨릭신자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주교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박정희 정권을 용납할 수 없었다.


▲ 1975년 2월 18일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 마중나온 인파와 기쁨을 함께나눴다. 지 주교 뒤에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보인다.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지학순 주교는 1974년 7월 23일 중앙정보부로부터 소환장을 받고 서울 명동가톨릭회관에서 김수환 추기경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심선언'을 발표하였다.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하지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 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면서 5개 항목으로 유신체제와 비상군법회의의 불법과 부당성, 무효를 주장하였다.

살얼음판과 같은 '긴조시대'에 중정의 출두를 거부하면서 유신체제를 원천적으로 비판한 것은 지 주교가 처음이었다. 더욱이 그가 행한 '양심선언'은 이후 권력과 압제에 맞서는 시민들의 저항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많은 민주인사들이 '양심선언'을 하면서 독재와 싸웠다. 1980년대 '민주화의 성지'가 광주였다면 1970년대 '민중의 성지'는 원주였다. 원주는 압제로부터 '해방구'가 되었다.

1974년 9월 24일 원주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발족되었다.
유신체제를 가장 강력히 비판하고 저항했던 정의구현사제단에는 당시 전국 800여 명이던 신부 중 500여 명이 참여할만큼 가톨릭의 지지를 받았다. 종교계에서 '정의(正義)'를 기치로 내건 것도 초유의 일이었다.

정의구현사재단의 결성을 주도하고 대변인을 맡아 유신정권에 치명타를 날렸던 함세웅 신부가 명칭에 굳이 '정의'를 넣게 된 배경 설명이다.

정의라고 꼭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저는 신학적으로 크게 공감했어요. 왜냐하면 정의가 하느님의 대표적 속성이거든요. 사랑의 하느님도 정의의 하느님에 내포된 것이에요. 정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선과 악을 판단하시고, 구원을 주시고, 그에 따라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정의구현'을 선택했습니다. 저녁에 지학순 주교님의 성당에서 기도하고 서약서 놀려놓고 진지하게 의식을 치렀어요.

저녁미사를 원주의 원동성당에서 봉헌하고 있는데 원동성당 교우들이 꼭 데모를 해야 한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9월 26일에 서울에서 선언하기로 했거든요. 사제단 결성을 정식 선언하기 전에 원주에서 전 단계로 데모하고 가야 한다는 거지요. 원주에서 경찰을 밀어내고 우리가 세상으로 처음 나가봤어요. (주석 1)

지극히 보수적이었던 원주가 반유신 저항운동의 전진기지가 되고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지학순 주교와 같은 정의로운 성직자의 존재, 이와 관련 행사를 준비하고 사람을 불러모으고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장일순이 자리잡았다.

민청학련 당시, 장일순 선생과 지학순 주교의 연대는 1970년대 널리 퍼진 지식인과 종교계의 유일한 결합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 이후 1976년 3월 명동성당에서 친명된 '민주구국 선언'을 비롯, 유신독재가 몰락할 때까지의 많은 일들에 원주를 중심으로 한 인적ㆍ공간적 연결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80년 6월 광주 사건의 진상을 알린 이후 쫓기던 김현장, 1982년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문부식과 김은숙이 이곳에서 몸을 숨기다 구속된 것도 그 연장이었다. (주석 2)

가톨릭 신부들의 거센 비판을 신호로 각계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반유신 저항운동, 여기에 국제인권단체가 한국 정부의 인권탄압을 비판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구속자 일부를 석방하였다. 1975년 2월 지 주교도 풀려났다.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김영주 회장의 증언.

지 주교님이 석방되어 원주역에 도착한 날은 원주시민 거의 반 이상 거리로 뛰쳐나와 환영하는 인파로 북적거렸죠. 중간에 주교님은 차에서 내려 환영 나온 사람들과 함께 원동성당으로 행진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원동성당에 도착할 무렵 한 청년이 주교님 앞에 와서 외투를 벗어 길에 깔자 너도나도 외투를 벗어 길에 깔았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었습니다. 이것이 원주였죠. 민중의 고향! 호산나의 원주! (주석 3)

장일순은 지 주교를 얼싸안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면서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는 작은 노력도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주석
1> 함세웅 신부의 시대증언, <이땅에 정의를>(한인섭 대담), 77쪽, 창비, 2018.
2> 최장문, <원주의 두 지성인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 <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 17호.
3> 앞과 같음.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9월 15일, 일 8:2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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