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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Jang Ilsoon critical biography 082819
민청학련사건으로 지학순 주교 구속
[무위당 장일순평전 27회] 한국 가톨릭이 반독재 저항운동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고



▲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이에 전국의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이 원주 원동성당에 모여 정부규탄과 지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주여, 이땅에 정의를!", "부정부패 뿌리뽑아 사회정의 이룩하자"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 지학순정의평화기금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권력의 한 속성이기도 하지만 권좌(權座)는 주인을 잘못만나기라도 하면 불박이게 된다. 민주공화제를 정체로 하는 대한민국의 최고 권좌가 박정희를 만나면서 공화주의를 빼앗기고 고착되었다.

고인물이 썩듯이 불박이된 권력은 부패한다. 원주에서 지학순과 장일순이 앞서고 많은 성직자ㆍ신도 그리고 시민들이 요구했던 '부정부패 일소' 운동이 박정희 정권에게는 반성과 깨우침 대신에 '불순세력'으로 인식되었다.

4천년 봉건군주체제에서 살아오던 한국은 일제 식민지치하인 1919년 3월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4월에는 민주공화의 깃발 아래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해방 후 이승만이 권좌를 불박이 하려들자 6ㆍ25전쟁 9년 만에 4ㆍ19혁명을 일으켜 독재자를 쫓아냈다. 이승만의 아류격인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대일굴욕회담을 감행하자 고등학생들까지 나서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권력자는 반성보다 체제강화로 역주행만 일삼았다.

박정희와 그를 추종하는 권신(權臣)들은 국민의 수준 높은 민주정신을 헤아리지 못했거나, 알고도 이를 무시하였다. 유신쿠데타로 정권을 불박이했는데도 개헌과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학생ㆍ종교인ㆍ교수ㆍ문인들의 성난 외침은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다. 시민들의 합세도 늘었다.

박정희는 유신쿠데타와 함께 대한민국의 헌정궤도를 완전히 이탈했다. 제3공화국 시대까지는 최소한 헌정의 테두리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3선개헌을 변칙처리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종신집권은 물론 국회의원 3분의 1과 법관의 임명권까지 자신이 장악하는 유신체제를 발족하고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수장시키려다 국내로 납치해오는 등 폭거를 감행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유신 체제에서 처음으로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벌인 것을 시발로 시위는 곧 전국의 대학으로 확산되고, 12월 24일에는 함석헌ㆍ장준하 등 재야 민주인사들이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지극히 온건한 방식으로 유신헌법을 개정하자는 운동이었다.

박정희가 믿는 것은 오로지 힘(공권력) 뿐이었다. 제1야당 신민당까지 개헌을 요구하고 나서자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했다. 1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헌논의 금지,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였다. 국민의 정당한 주권행사를 금지시키고 평시인데도 군사재판소를 설치하고, 여기서 민간인들을 재판하였다.

4월 3일에는 날조한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을 발표했다.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정부를 전복하고 노농(勞農)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지학순 주교를 비롯 윤보선 전대통령, 박형규 목사, 김찬국ㆍ김동길 교수ㆍ시인 김지하, 이철 서울대생, 인혁당 재건 관련자 21명, 일본인 2명을 포함 무려 253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동시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여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하는 등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유신체제를 유지하고자 학생ㆍ민주인사들을 다시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권력의 사유화는 뒷날 그의 충실한 장학생(전두환ㆍ노태우ㆍ이명박)으로 전승되고 딸(박근혜)에게 이어졌다.

지학순 주교는 어마어마한 누명을 뒤짚어쓰고 구속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것이다. 누구보다 심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장일순과 협동조합을 함께 해온 회원들이었다.

그동안 반부패 투쟁 등 원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해온 데 대한 보복으로 인식하였다. 박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지학순 주교를 귀국하는 김포공항에서 납치하다시피하여 중정으로 끌고갔다. 그들에게는 가톨릭 주교의 신분도 안중에 없었다.

지학순 주교가 1974년 7월 6일 오후 4시 50분. CPA 450편으로 분명히 귀국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그 행방이 묘연해지자 원주교구는 발칵 뒤집혔다.

7월 7일 아침에 중정으로부터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김수환 추기경은 중앙정보부로 가서 지학순 주교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지학순 주교는 자신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학생들에게 김지하를 통해 얼마간의 자금을 주었는데, 유신 당국이 그것을 문제 삼고 있다면서, 자신은 떳떳하다고 밝혔다. 오후에는 교황청 대사도 지학순 주교를 면회했다. (주석 1)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저항의 도시 원주를 다시 뜨겁게 달구고 장일순을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냈다. 또한 한국 가톨릭이 반독재 저항운동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재가 저항자를 탄압하면 탄압 받는 사람들이 더욱 강하게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장일순은 할 일이 더 늘어났다. 천주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모아 지 주교의 석방운동과 반독재 투쟁을 벌였다.

주석
1> 김정남, <이 사람을 보라(1)>, 60쪽, 두레, 2016.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8월 30일, 금 6:2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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