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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시간: (EST) 2019년 12월 12일, 목 2:15 pm
[특집/기획] 스페셜리포트
 
"An intolerable nature of injustice is due to the legacy of my grandfather 072419
“불의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 할아버지의 유산 탓”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아서-1] ‘안악사건’ 정달하 후손 정상호씨(하편)



▲ 독립운동가 정달하 선생의 손자 정상호씨(82)가 지난 5일 본보 사무실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의 삶을 털어놓고 있다. ⓒ 김명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 미국 독립기념일 다음날인 지난 7월 5일 <코리아위클리> 사무실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 정상호씨는 세상을 달관한 듯 후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의사가 직업인 정씨는 은퇴를 두 번했는데, ‘마지막 은퇴’를 6월말에 했다.

“은퇴를 하고 나니 허전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한국에서 의사생활까지 합하여 56년 동안 같은 일을 했는데 갑자기 일을 놓으니 날짜 가는 것도 모르겠고 무슨일로 소일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우울해지까지 합니다. 다시 와 달라고 사정하는 곳이 있어서 고민 중입니다. 허허허”

정씨는 플로리다 북동부 잭슨빌에서 무려 46년 간 의사로 지냈다. 1971년 달라스와 필라델피아를 거쳐 1973년 잭슨빌에 거처를 잡은 후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이주한 적 없이 한 곳에서, 그나마 ‘잭슨빌 할렘’이라는 ’45번가’에서 줄창 가정전문의사와 응급의사를 했다.

밤낮 구분없이 누구도 들락거리기를 꺼려 하는 45번가에서 그는 36년 동안 의술을 펼쳤고, 그 지역에서는 ‘살아있는 슈바이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흑인들은 먼 발치에서도 금방 그를 알아보고 “하이, 닥터 정!” 하며 인사를 한다. 그 지역 주민들 가운데 닥터 정의 손을 거쳐가지 않은 흑인 가정은 드물다. 4대째 그의 치료의 손길을 거쳐간 흑은 가정이 한 둘이 아니다. ‘닥터 정스 클리닉(Dr. Jung’s Clnic)’은 45번가 주민들의 사랑방이 된 지는 오래 되었고, 이제는 그 지역의 ‘역사 유물’로 인식 되고 있을 정도다.

“우리 지역에 와달라”는 흑인 요청 받고 ‘45번가’에서 의술 배풀어

정상호씨가 그 지역에 병원을 내게 된 것은 지난 1975년이었다. 어느날 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한 흑인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우리 지역에 의사로 와 달라”는 초청을 하게 되면서부터다.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1970년 군의관 제대 후 선진 의학기술을 배우고 싶어 잭슨빌 대학에 유학을 왔고, 대학 병원(쉔즈)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의 손짓에 빨려 들어가듯 흑인 환자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흑백갈등이 무척 심해서, 버스를 타도 백인에게 무조건 자리를 양보하고 텅빈 버스에서도 뒷자리에 서성거려야 했다. 더구나 백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병원의 화장실도 백인이 이용하는 화장실 따로, 흑인이 이용하는 화장실 따로였다.

이 같은 환경에서 ‘닥터 정 클리닉’은 그 지역의 유일무이한 병원이었다. 작고 보잘 것 없었지만 병원은 항상 초만원이었고 하루 60명씩 환자가 밀려올 때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정씨는 이곳에서 가족 4대의 애도 받아내고 피도 뽑고 기브스도 해 주기를 무려 36년 간 한 것이다. 병원비가 없어 쩔쩔 매는 환자들의 등을 툭 치며 보내준 것도 헤아릴 수 없었고, 병원비를 못낸 환자들이 “고맙다”며 고구마, 과일, 견과류로 퉁치는 경우도 있었다.

정씨는 지난 2011년 병원 문을 닫을 때의 일을 평생 잊지 못한다. 은퇴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마지막 진료를 끝내고 문을 닫자 난리가 났다. 왜 문을 닫았는지, 다시 자기 동네에 다시 들어오지 않는지를 묻는 전화가 빗발쳤다. 꼭 한국의 시골 사람들처럼 인정 넘친 흑인들의 ‘항의’를 꿀꺽 삼켜내야 했다. 정씨는 이 경험으로 LA폭동때 지역 흑인 지도자들과 회합을 갖고 ‘한흑 갈등’을 풀고자 노력했고, 이 일로 본국 국무총리 표창을 받기도 했다.

가슴이 아프다 못해 쓰린 은퇴를 한 정씨는 이후로 다시 병원에 붙잡혀 8년을 더 의사로 근무한다. 이번에는 미국 IPC 메디컬 그룹에서 파견을 받아 너싱홈에서 응급의사로 근무하게 된다. 100여개의 잭슨빌 지역 너싱홈 가운데 3~4곳을 순회하며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환자들을 진료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난 6월 말 두 번 째 은퇴를 했다. ‘두 번 째’ 은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또다시 그를 부르는 곳이 있고, 이 때문에 다시 갈등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씨는 "나이도 있고 여러가지 한계를 느껴서 ‘양심상’ 의사일을 계속하는 것은 욕심”이라면서도 “도움이 필요하다며 간청하니 안 할 수도 없고 고민중”이라고 했다. 교회 장로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정씨는 일찍부터 ‘오라는 곳’을 거절한 적이 별로 없다. 정씨는 ‘오라는 것’을 ‘하나님이 손짓을 하시는 것’으로 여겼고, 그에 따랐던 기억이 많다.

1963년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충남 보령 대천 지역(3개면)에서 2년간 무의촌에서 봉사했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응급 의사로 일했다. 10년 연애끝에 1963년 함영선씨와 결혼한 후에는 1964년 국립의료원정형외과에서 근무했고, 이후 종업원 800명의 울산 영남화학(비료회사)에서 ‘케미컬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해 꼭 와달라’는 간청에 붙잡혀야 했다.

사실 정씨의 이력 속에는 그가 의사로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 외에도 젊은 시절 한 때 ‘사회를 구하는 일’에도 나선 것도 눈에 띈다. 부패한 사회가 신음하고 있던 시절에 그는 그 부름에 팔을 걷고 나선 열혈 학생이었다. 그의 ‘운동’ 경력을 듣다보니 ‘독립운동가 정달하’의 얼굴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민족의 정기’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불의, 불합리에 대한 항거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그와 그의 할아버지는 ‘통’한다.


▲ 정씨는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 할아버지의 성정을 물려받은 탓인 것 같다”며 1960년 3.15부정선거 시위 당시 이기붕씨 관저 담을 넘었던 사실을 털어놨다. ⓒ 김명곤

'운동권 학생’ 정상호, 이기붕의 치부를 드러내다

때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로 온 대한민국이 들끓고 있던 시기였다. 3월 26일 담화 발표가 있고 나서 4월 21일 발포로 시위 주춤했고, 27일쯤 운동권 학생들이 부정선거 원흉 이기붕 체포 작전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이기붕의 사저를 밤새 돌다가 관저 담을 넘어 들어갔는데, 당시 전위에 선 학생들 가운데 하나가 의대생 정상호였다. 정상호는 숨겨왔던 ‘역사적 사실’ 하나를 기자에게 털어 놓았다.

“데모대와 함께 담을 넘어가 박 마리아가 도망하다 남긴 쫄쫄이 신발로 현관 바닥을 때리며 ‘숨지 말고 나오라’고 소리쳤죠. 집안 한켠에 비단 필 등 축재한 물품들이 쌓여있었는데, 데모대들이 그걸 펼치며 불을 붙였는데그 불이 서소문밖 농협건물까지 이어질 정도였습니다. 도망가던 이강석의 파커를 발견했는데 뭔가 떨어져 주어보니 두루마리였습니다. 거기엔 경자년 새해에 이기붕에게 세배차 방문한 412명의 명단과 물품 목록이 빼곡하게 써 있었는데 당시 신문기자가 저에게 요청하여 기사화 했습니다. 당시에 주은 자료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정씨는 데모가 끝난 후에 보니 그 세배자 명단에 들어있던 여운홍(몽양 여운형의 동생으로 당시 자유당 선전부장)이 참의원에 출마하려고 한 사실을 알게되고 격분한다. 정씨는 그에게 연락을 취해 ‘당신은 독재세력의 주구 가운데 하나로 학생들의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인데, 어찌하여 그 피를 이용하여 출세하려 드는가’라며 항의했고, 놀란 여운홍의 측근들이 그를 만나 회유를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씨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평소 왠만한 일에 별 말씀이 없고 칭찬도 없으시던 아버지가 아들의 의거에 손을 부르르 떨며 “잘했다,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정씨의 아버지 정선규는 일찍이 신학문의 영향으로 일본 청산학원을 나와 나중에 수원농대(현 서울 농대)와 서울대 경제학 교수를 지냈다.

정씨는 아버지를 ‘선이 굵은 분’으로,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무실역행(務實力行: 공리공론을 배척하며 참되고 성실하게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교육사상)을 삶의 신조로 삼아 자녀들을 교육하던 분으로 기억한다. 한국전쟁이 나기 전(1949년) 어느날 아버지와 함께 경교장으로 김구 선생을 방문했던 일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정씨는 일찍부터 교육자 가정에서 자라났다. 황해도 봉산 출신인 어머니 이예행은 12세에 숙명여학교 진학, 일본 내량(나라) 여자사범 문과 졸업하고, 개성 호수돈 여학교 사리원여학교 교편생활을 했다. 해방후 보사부 부녀국장을 거쳐 숙명여자중고 교장(1966~1973)을 지냈고, 여성의 법적 지위 향상과 여성교육에 몰두한 ‘신여성’이었다.


▲ 1940년대 모친 이예행 여사와 정씨의 손아래 동생들이 함께 촬영한 가족사진 ⓒ 김명곤

기독교인인으로 교육자 가정에서 반듯하게 자란 정상호씨에 대해 한인사회에서는 ‘알고 지내면 부드럽고 정 많은 사람’으로 통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너무 바른 소리를 잘해 자주 손해를 본다’는 말로 열패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기자가 정씨를 긴 시간을 두고 만난 것은 4~5년 전이었다. 그의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건이 아닌 교회에서 겪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일 때문이었다. 당시 정씨는 “살만큼 살았고 인생 경험도 남만큼 했으나 모든 것을 묻어둘 있으나, 신앙양심상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힘든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교회문제로 당하는 고통 “불의 용납치 않은 할아버지 유산 때문인 듯”

정씨의 고백인 즉, 1979년에 잭슨빌에 교회를 개척하여 자리를 잡아 한인사회에서 제법 인정 받는 교회로 성장했는데, 담임 목사가 바른 말 하는 교인들을 하나 둘씩 쳐내고 노인층이 대부분인 교인들의 서명을 받아 (정씨 가족이 사서 헌납한) 교회 사택과 교회 소유 재산을 자신과 가족 앞으로 소유권을 이전했다는 것이다. 당시 150만불 가치(현재 추산 250만불)의 교회공유재산이 신학교를 세운다는 명분 등으로 목사 가족 소유로 넘어간 사실을 알게 된 정씨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고 한다.

정씨는 당시에도 그랬었다.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이제는 이해하는 사람도, 지지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나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요. 주변에서 관심도 안 보이고 이해해 주지 않는 것, 이게 더 힘듭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게 모두 할아버지의 유산인 듯합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이 좀 유별나요, 이 나이 들도록”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인 함태영 선생, 사상가 함석헌 선생과 친족 관계인 부인 함영선씨는 ‘남편이 너무 힘들어 해서 왠만하면 넘기려 했으나, 이건 지역 한인교회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문제라서 참지 못하겠다’며 ‘횡령’과 관련한 서류 뭉텅이를 기자에게 건넸었다.

사실상 개인관계에서도, 집단 간에서도, 크게는 역사적 맥락에서도 이 같은 예는 비일비재하다. ‘친일파 숙청’에 대한 요청은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이 건국될 당시에 이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으나, 미국의 힘에만 의존한 이승만의 배신적 책략으로 해체된 이후로 이른바 역사청산의 길을 영영 사라져 버린 형국이 되었고, 그 여파가 여전히 한국사회 전반에 악폐로 남아있다. 바른말 하던 사람들은 숨죽여 지내야 했고, 이 바람에 국가적 정통성을 북에 빼앗겼다는 비판을 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제는 일제청산을 외치는 측에 대해 ‘지난 일에 몰두하는 좌빨’로까지 학대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끝으로 최근 친일파 청산과 독립유공자 예우 문제에 대한 정씨의 ‘바른말’을 들어본다.

“친일파들이 국립 현충원에 묻힌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얼마나 양심에 찔리며 불안하겠습니까. 양심이 살아있다면 거기서 나가야 합니다. 또하나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본국 가서 보니 자격 없는 사람들이 이 사람 저사람 찾아다니며 서명 받아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받는단 얘기 듣고 정말 충격받았어요.이래저래 구차해서 단념하고 돌아왔습니다. 할아버님에게는 참 죄송하지만요”
 
 

올려짐: 2019년 7월 26일, 금 11:3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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