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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A distinguished speech by the judge 062619
판사도 감탄한 명연설, 재판정을 뒤집어 놓은 사진작가
[문재인 시대에 국가보안법을 논하다] 평화통일 운동가 이시우


(서울=오마이뉴스) 김창인 기자 = 이시우 작가는 민통선과 용산미군기지 일대를 촬영한 혐의 등으로 2007년 구속됐다. 당시 이 작가에게는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 탐지·누설, 이적표현물 제작·반포, 반국가단체 소속 인물과 회합·통신 등 20가지가 넘는 죄목이 쓰였다.

이 작가는 검찰로부터 10년 구형을 받았으나 2008년 1월 열린 1심 재판에서 이정희 변호사 덕분에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해당 사건은 2011년 10월 13일 대법원에서 공소 사항 전부에 대해 완전 무죄 판결로 마무리됐다. 당시 이시우 작가의 무죄 판결은 한국 사회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시우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 소식을 접하고 도피 및 수배 생활을 했다. 구속 이후에는 스스로 무죄 판결을 위해 예술가로서 창작의 자유를 바탕에 둔 논리를 구상하여 재판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재판정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발표할 정도였다. 국가보안법 체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예술가라는 관점에서 그의 이런 행동은 재조명될 가치가 충분하다.

이에 청년담론은 이시우 작가를 직접 만나 당시의 경험을 듣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본 기사는 2018년 12월 이시우 작가 자택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나는 출두 대신 도망을 택했다


▲ 이시우 작가 ⓒ 이시우

- 국가보안법 위반 소식을 접했던 당시 심정은 어땠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기사로 접했다고 들었다.
"나에 대한 내사는 2004년부터 진행되었다고 들었다. 기사로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를 처음 접한 후 작성한 기자에게 전화도 해보았다. 아마도 경찰이 기사로 먼저 흘리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떠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대부분 사람이 '내가 당당하게 출두해 모든 걸 밝히겠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식으로 대응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나한테 지금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를 먼저 생각했다. 당시 상황을 먼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일단 2007년 한국은 미국에 전시작전권을 돌려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전시작전권을 돌려주는 대신 '유엔사를 강화'해 이러한 합의를 무력화하려는 구상이 눈에 보였다. (전시작전통제권은 노무현 정부에서 2012년 4월까지 돌려받기로 합의를 하였으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정치-군사적 상황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이에 나는 '유엔사 해체'를 주장하며 관련 글을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유엔사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막지 못하면 전시작전권을 환수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에서 '유엔사 해체'를 주장하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결국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는 나에게 유엔사 해체와 관련한 글을 쓰지 못하게 해 입에 재갈을 물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제 발로 검찰의 소굴로 들어가는 건 공안세력을 돕는 것임이 명백해보여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단순히 도망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유엔사 강화를 막기 위한 글도 계속 써 내려갔다. 변호사는 '도주로 간주돼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감수하기로 했다. '유엔사 강화'라는 공안세력의 의도를 차단하는 것이 진정한 저항이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감옥에 있었던 시간보다 수배 중이던 시간이 더 힘들었다.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피 생활 중에는 온종일 유엔사와 관련된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통일뉴스 등에 글을 올릴 때는 숙소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글을 부치러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누가 "이 선생님, 이제야 뵙네요" 했다. 사복경찰 4~5명이 잡으러 왔다. 경찰차에 실려 남대문 경찰서로 가는데 국가보안법이라는 망령이 나의 손을 턱 잡는 느낌이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유령 같은 것이 내 손을 잡고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 가족들이 겪었을 고초 또한 걱정된다. 어떤 고충을 겪었는지 궁금하다.
"미안했다. 내가 도피를 위해 새벽에 집에서 나오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경찰들이 집에 들이닥쳤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겪고 나면 제일 먼저 동네 사람들의 눈초리가 무섭다. '저 사람 집에 시커먼 옷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치네'하는 것만으로 동네에서 낙인이 찍힌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대' 하면서 소문이 금방 퍼지기 마련이다. 어떤 분들은 도움을 주지만 또 어떤 분들은 외면한다. 그동안 동네에서 쌓아온 인간관계가 다 드러나는 순간이다.

당시 아내는 공장에 다니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노동자였다. 하지만 내가 체포된 후 본격적으로 조사를 받게 되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아니,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생계를 이어갈 수단이 사라지자 아내는 주변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그게 아주 힘들었다. 수배 생활 중에도 돈이 필요하니 가족들에게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이중, 삼중으로 손해를 끼치고 있었다. 아내는 거의 정신을 놓고 살았다. 하루는 서울에서 시위를 하고 돌아오는 데 빨간불에 그냥 길을 건너려고 했다고 한다. 중학생이었던 아이가 "엄마 왜 그래"하면서 말릴 정도로 혼이 나간 채 살았다. 가족들에게 끼쳤던 피해는 평생 짐으로 남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재판 과정에서 판사의 감탄을 끌어내다


▲ "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진 대법원 청사. ⓒ 권우성

- 재판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재판 중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재판에 임하는가'가 매우 중요했다. 구속되면서 바로 단식에 들어갔다. 국가보안법을 거부하면서 법 자체도 거부한다고 했는데, 재판을 받는 것이 법을 인정하는 것처럼 되는 것 같아 고민이 되었다. 변호사는 만약 재판을 받게 된다면 몸을 회복해 재판에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재판을 결국 받기로 한 순간, 방어가 아니라 꼭 이겨야 한다는 것이 재판의 목적이 되었다.

검찰은 사진을 찍고 글을 쓴 것에 국가보안법 위반을 걸었는데 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틀을 '창작의 자유'라는 틀로 바꿔보고자 했다. 창작의 자유라는 틀로 검사도 설득할 수 있도록 게임의 규칙을 다시 정하고자 했다. 변론 과정에서 예술 작품들을 슬라이드로 하나씩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이 사진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찍었다는 등 창작이라는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설명했다.

'지뢰밭에서 지뢰를 찍을 때 혹시라도 지뢰를 밟을 수 있어서, 사진이라도 살리자는 마음으로 사진기를 던지고 디딤돌을 밟고 나왔다는 과정 등을 설명했다. 창작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들을 했다. 나중에는 판사가 자기도 모르게 '아...'하면서 감탄했다. 그때 창작의 자유로 재판의 룰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또 하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적 표현물 소지 혐의'였다. 북한의 책을 연구했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정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국정원에서 대출하는 북한 책을 신청을 해보았다. 검찰이 문제 삼았던 책들을 전부 신청했는데 일주일 후 국정원에서 책을 받으러 오라고 이메일이 왔다. 검찰이 완벽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적표현물 소지'는 이적의 목적으로 활용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인데 나는 그 책을 이용해 학술 활동을 했을 뿐이었다."

-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기 위해선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근본적으로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진 기본적인 철학적 배경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보안법의 본질은 외부에 있는 적을 내부로 끌어오는 것이다. 세상을 볼 때 보통 나와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밖에 있는 세계를 나에게 심어놓은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우리 사회에 적이 있다. 그 적이 현재 안에 들어와 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합법적인 활동 영역 내에서 내부의 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국가보안법을 돌이켜보는 과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종북이라는 프레임의 문제가 크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사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북한'과 '국가보안법'을 빌미로 일어났다. 통합진보당 사태도 마찬가지다. 진보적인 사람 중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문제로 닥쳤을 때 북한에 대한 관점이나 태도에 대해 현실적으로 거부하고 분열되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 표방하는 명문과 내면의 심리가 달리 작동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다. 국가보안법 반대 투쟁은 국가보안법 자체를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보안법을 없애도 반공적 분위기가 계속 살아있다면 또 다른 이름의 국가보안법이 생길 수 있다. 법 자체를 없애는 것도 첫 단계로 중요한 목표지만 이 체계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청년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 마지막으로 우리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청년이라면 대학생뿐만 아니라 취준생, 직장인 등 많은 20·30세대가 힘든 삶을 겪고 있다.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다.
"'청년들이 문제가 있다'라고 계속 떠드니까 청년들 스스로 문제 덩어리인 것처럼 느끼고 있다. 사회는 청년들한테 특별히 해준 것도 없으면서 자꾸 청년들한테 문제라고 한다. 그것도 어찌 보면 사회가 테두리 쳐놓는 편견일 수 있다. 오히려 청년들이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대 세계는 사람을 끊임없이 수동적으로 만든다. 수동적으로 만들어야 통치가 편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힘든 상태다, 수동적이어야 잘 이해한다'고 하니 정말 수동적으로 변하곤 한다. 그 프레임 자체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왜 삶이 어렵지? 내가 왜 이 고통에 수긍해야 하지?'라는 의문을 근본적으로 가져보는 것부터가 오히려 여러 가지 부분적 대안들로 현실을 땜질하는 것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시우 작가의 경험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특수하다. 도주를 비롯해 국가보안법이라는 프레임을 창작의 틀로 바꿔 승소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또한 자신을 비롯해 가족들까지 장기간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피해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이시우 작가의 바람대로 국가보안법은 법 자체의 폐지부터 국가보안법 체제라는 사회 자체가 변화해야 할 것이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7월 03일, 수 10:4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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