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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Jang Ilsoon critical biography 062619
신협운동으로 농촌살리기에 적극 나서
[무위당 장일순평전 23회] 원주를 신협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만들다



▲ 1991년 지학순 주교와 함께 1991년 지학순 주교와 함께 ⓒ 무위당 사람들 제공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추진한 근대화 정책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35년 식민지 핏값으로 들여온 외자와 베트남전에 파견되어 사망한 5천여 장병들의 희생의 댓가로 들어온 외자의 힘으로 고속도로가 뚫리고, 공장이 들어서고, 일부 도시와 지역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러나 강원도 지역은 여전히 낙후성을 면치 못하였다. '호남 푸대접론'과 함께 '강원 무대접론'의 세론 그대로였다.

장일순은 강원도 산골마을을 다니며 자주 농민들과 어울렸다. 가는 곳마다 낙후성이 10년 전이나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농민들의 어려운 삶과 진솔한 대화는 새로운 영감과 통찰력의 원천이 되었다. 농민들에게서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의 지평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관념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소박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후반기 삶의 가치관이 된 생명사상의 싹을 틔운 것이다.

상대가 누구이거나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면서 검약과 자애로써 사람을 대하였다. 이것은 그의 타고난 성정이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갖게 된 신념의 발현이었다. 그래서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고 신뢰가 쌓였다.

그는 지인에게 "목에 힘 빼 그래야 살아"라는 붓글씨를 써줄만큼 겸손과 겸양을 갖고 실천하였다. 항상 낮은 자리를 찾았고 그렇게 행동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신앙해온 천주교의 생활태도이고 동학(東學)의 교리에서 얻은 철학이었다.

장일순은 농민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더욱 농촌문제에 관심이 쏠렸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청년들이 도시로 떠나고 날이 갈수록 농촌은 황폐화되어갔다. 정부의 저곡가 정책은 농민들이 아무리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농가소득은 늘지 않았다. 살농정책이란 말이 나오고 '농자천한지대본'이라는 자조의 소리가 나돌았다.

그래서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펴기로 했다. 1966년 11월 천주교 원주교구가 설립한 원주신용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농민들이 연대하여 정당한 권리를 찾고 나라의 근원인 농촌을 살리자는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장일순이 1966년 신협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참여한, 전 신협중앙회 사무총장 이경국씨의 증언.

협동조합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해 교육을 받으면서 생소하기는 했지만 신선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150여 년 전에 영국에서 로치데일 공장개척자 28명의 노동자가 협동운동을 시작하던 시절, 그리고 프랑스, 독일에서 시작된 협동조합운동이 기업의 착취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의 모순을 헤쳐나가며 함께 잘살아 가는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 감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농촌운동을 겸한 라이파이젠 신용조합, 도시의 슐체 델리취 신용조합, 그리고 20세기 캐나다, 미국의 신용조합 성공 사례를 듣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캐나다에서 교육을 받고 오신 메리 가별 수녀님이 1960년 5월 부산에서 33명의 조합원과 함께 3,400환을 모아 성가신협을 시작한 후 전국에 50개 조합이 설립된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무위당 선생님도 강의를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조상들의 전통문화인 두레, 계, 품앗이 등 다양한 협동의 문화를 소개하시고 돈이 중심이 되는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고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살려면 협동운동을 펴나가야 한다, 더구나 이농현상이 점점 가속화되고 은행 문턱이 높아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일수놀이나 사채 시장에 매달려 허덕이는 중소상인을 위해서도 신용협동조합 조직을 키워내어 땀흘려 노력하는 민중이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어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석 1)

신협중앙회가 설립되고 장일순은 감사로 참여했다가 얼마 뒤에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6개월도 안 되어 큰 시련에 직면한다. 실무를 맡았던 사람이 회원들의 출자금을 갖고 자취를 감추었다.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여러 사람을 설득하여 가입시키고 출자하도록 했는데 몽땅 털어 도망간 것이다.

장일순은 친지와 지인들에게서 돈을 꾸어 출자금 전액을 변제하였다. 조합원들에게는 하나도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고, 강원도 지역의 신협운동이 크게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주에는 진광신협이 별도로 설립되고 많은 시민ㆍ농민ㆍ상공인들이 참여하였다. 장일순은 이때 꾼 돈을 갚느라 여러해 동안 무진 고생을 해야 했다.

장일순의 협동조합운동은 때마침 지학순 주교가 원주 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활력을 갖게 되었다. "생활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는 슬로건으로 두 사람이 손잡고 다양한 협동조합운동을 추진하면서 원주는 차츰 신협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경국 씨의 회고에서 장일순의 신협에 대한 애정(신념)의 일단을 찾게 된다.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협동조합운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인간화 운동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람사는 게 편리해지면, 협동조합이 사람보다 돈을 중심으로 가기 때문에 부단히 조합원 교육, 임직원 교육에 임해야 한다.

둘째는 임원은 사회를 밝게 하려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명문대학을 나오거나 학식이 높은 사람들은 봉사하기 힘들다.

셋째는 지도자는 편견이 없는 사람, 정치ㆍ종교ㆍ학력ㆍ지역을 뛰어넘어 누구나 어울리는 사람이 필요하다.

넷째는 협동조합 운동가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한 강한 의지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주석 2)

주석
1> 이경국, <무위당의 사상과 협동운동의 기억>, <무위당 좁쌀 만인계>, 2009년 3월.
2> 앞과 같음.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7월 03일, 수 9:5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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