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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In search of new paradigm of immigrant ministry 042419
교회가 가야할 길 ‘죽임 당하신 어린양 패러다임’

(워싱톤=뉴스M) 김영봉 목사(와싱톤사귐의교회) = (이 글은 2019년 4월1일에 있었던 버지니아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of Virginia) 제2회 학술공개강좌 “Diaspora 신학과 한인교회”에서 김영봉 목사가 발표한 것으로, '이민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마지막 글이다. 편집자 주)

위에서 살펴 본 세 가지 사례는 모두 기존의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습니다. 현재 상황에 대해 각 저자가 택한 유비는 다르지만 그 초점은 동일합니다. 동시에 세 저자는 지금 북미에서 교회가 처한 소수자의 상황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콘스탄틴의 승인 이후로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다수자의 위치에 서고 세상의 중심에 섬으로써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을 소수자가 된 상황에서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세 사람 모두 그 전범을 성경과 초대 교회에서 찾습니다. 구약의 역사와 초대 교회의 역사를 볼 때 믿음의 사람들은 소수일 때가 많았으며 소수자로 있을 때 혹은 주변에 있을 때 그 본질을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처한 현실 상황을 인식하고 크리스텐덤의 패러다임을 벗어나 식민 도시, 유배 혹은 주변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하여 교회와 목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재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슬레인 램 패러다임’(Slain Lamb Paradigm, 죽임 당하신 어린 양 패러다임)이라고 이름 지으려 합니다.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은 ‘왕좌에 오른 교회’를 꿈꾸게 만들지만, 슬레인 램 패러다임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낮은 자리에 처하여 희생하는 교회를 꿈꾸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교회가 교회 되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되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처한 소수자로서의 상황적 요구이지만 실은 그 이상입니다. 교회는 콘스탄틴의 공인 이후에도 여전히 소수자로서의 정체성과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미국의 주류 교회도 이 세상의 중심에 서서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을 때 이 사실을 기억 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미국 교회는 영적으로 부패하지도, 외형적으로 쇠락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도 사실입니다. 80년과 90년대의 절정기에 한국 교회는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을 신봉하며 세상의 중심에 서서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2천년대 이후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메가 처치의 스캔들을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슬레인 램 패러다임으로 목회를 한다면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고 또한 무엇이 변화될 것입니까? 앞에서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서의 목회의 특징들 중 셋을 특정한 것처럼 여기서도 세 가지 영역에서의 변화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의 ‘하나님의 어린양’

1) 주변부로 향하는 교회

슬레인 램 패러다임으로 본다면, 교회는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로 즉 낮고 어둡고 냄새나는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다시금 갈릴리로 부르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갈릴리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자리였고 또한 밑바닥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자리가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그분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가장 낮은 종의 모습으로 내려 오신 분입니다(빌 2:6-8). 그분은 또한 성문 밖에서 수치를 당하신 분입니다(히 13:13). 만일 오늘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교회라면 낮은 곳으로, 가장 자리로 내려 가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가장자리 혹은 낮은 곳이 교회가 서야 하는 곳인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중심의 자리에서 서 있는 교회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의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용 자원(인적, 물적)이 충분한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기 전에 먼저 광야에서 유랑하게 하신 이유는 인간 사회의 끝자리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인간적인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해야만 하나님 나라를 대변할 수 있고 또한 그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가장자리 혹은 낮은 곳에 교회가 서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낮은 곳에서 보아야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중심부 혹은 높은 곳에서의 시각으로 운영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절대 소수의 행복과 절대 다수의 불행이 당연하게 취급 받습니다. 높은 곳에서 보는 정의는 낮은 곳에서는 불의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견지에서 볼 때는 ‘뒤집어진 나라’(Upside Down Kingdom)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려면 주변부로 나아가고 바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가 제대로 보이게 되고 교회가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가장자리 혹은 낮은 곳을 지향하는 교회는 외적 성장에 목을 매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성장 하더라도주어지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에 도취하여 복음의 정신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자리를 지향하는교회는 외적 성장을 경험한다 해도 여전히 가장자리와 바닥을 지향합니다. 또한 이러한 지향점을 가진 목회자들은 외적 성장에 매몰되어 타락하지도 않고 외적 성장을 경험하지 못해도 패배감이나 열등감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외적 성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복으로 알고 오직 복음과 교회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2) 섬기는 교회

중심부를 지향하는 교회는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사실 군림과 지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는 무한 성장을 추구한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군림과 지배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을 통해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목회자의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한국 교회에 정형화 되어 있는 톱 다운 식의 의사 소통 구조는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능력있는 목회자는 최상위에 앉아서 군림하고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제자의 리더십과는 다릅니다. 슬레인 램 패러다임에서 목회자는 신도들의 자리로 내려와 인격적으로 소통하며 함께 영적 여정을 걷는 사람입니다. 이정용 교수는 주변성의 목회자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목회자는 겸손과 감사로 다른 사람을 돕는 종이자, 설교자로서 정의와 평화를 말하는 예언자이고, 선생으로서 진리와 영적 성취로 인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자, 치유자로서 영혼을 치유하고 사회적 병폐를 풀어내는 의사아며, 위로자로서 주변부 삶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친구다.” (214쪽)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서 선교는 점령과 지배의 사고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18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선교는 대부분 제국주의적인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교 방식이 기껏해야 명목상의 신자들만 만들어 낼 뿐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복음에 대한 혐오감을 조장한다는 사실을 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반면, 슬레인 램 패러다임에서 본다면 선교는 현지인들을 섬기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돈의 힘으로 현지인들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을 통해 감화시키는 선교 방식을 택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식의 전도 방식도 역시 크리스텐덤 패러다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경고와 위협과 협박을 전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전도자들에 대한 혐오감이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습니다. 전도자들은 일방적이고 무례하며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마치 하늘로부터 파송받은 예언자라도 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경고하고 위협합니다. 슬레인 램 패러다임에서 전도는 이웃의 삶에 동참하며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좀 더 관계 중심적이며 쌍방 소통적인 방식의 전도를 선호할 것입니다.

영적 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의 문제보다 무엇을 지향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3) 하나님 나라의 복음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은 복음의 초점을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성장학’이라는 괴상한 학문이 탄생했고 ‘번영의 복음’이 번성했습니다. 메가 처치 현상이 교회 지형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중심부에 서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 낸 왜곡이요 탈선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계속 전해야 합니다. 이 복음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가 되게 합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땅에 붙들리지 않게 하고, 물질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물질에 사로잡히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빛으로 자신의 일상을 살게 하고 이 세상을 보게 합니다.

이 세상의 중심부에 서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점점 많아지면 하나님 나라는 점점 흐려지고 멀어집니다. 그렇기에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땅의 복음으로 왜곡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가장자리로, 바닥으로, 어두운 곳으로 눈길을 두고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늘 그런 환경으로 자신을 내몰아야 합니다. 의식적으로 그런 자리로 자주 내려 가야만 흐려진 영적 시야를 회복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영적 생활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적 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의 문제보다 무엇을 지향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목회자의 영적 생활의 초점은 많은 경우에 현실적인 문제와 물질적인 차원에 묶여 있습니다. 영적 생활이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조건에 매몰된 자신을 깨워 영적 존재로서 다시 회복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영적’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깨어나고 깨어 있는 상태에 머물러 살아가려면 여유롭고 풍요로운 물질적인 환경을 자꾸 벗어나야 합니다. 고통 받는 신도들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영적 생활입니다.

이 글은 저 자신에게 있어서는 회심 고백과 같은 글입니다. 지난 날의 저 자신의 삶과 목회 여정을 돌아 보니 크리스텐덤 패러다임 안에서 분투해 왔던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어떻게든 복음의 정신에 충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로 인해 때로 복음 정신에 맞는 선택과 결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의 생각이 크리스텐덤 패러다임 안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통감했습니다. 이번 저에게 주어진 주제와 발제 기회는 저로 하여금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었고 저 자신의 과거 여정을 돌아 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앞으로 저 자신을 더 깊이 돌아 보면서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의 잔재를 없애고 슬레인 램 패러다임으로 살고 목회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다짐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두에서 언급한 토마스 쿤이 말한 혁명적 변혁이 일어나 앞으로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을 제거하고 교회로 하여금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특별히 소수자가 되어 버린 교회 안에서도 소수자인 한인 이민 교회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그런 거대한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각자가 선 자리에서 슬레인 램 패러다임으로 목회를 하고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다수자로서 살아왔고 살고 있는 백인 기독교인들은 소수자로서의 현실을 인정하기도 힘들고 소수자로 살아가는 방법도 낯섭니다. 하지만 이민자들은 태생적으로 소수자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소수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소수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본성적으로 압니다. 만일 우리 이민자들이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으로 살아간다면 신앙의 힘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이민 교회에서 번영의 복음이 선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슬레인 램 패러다임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소수자로서의 우리의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외적 상황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의미 있고 희망 있는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면적인 혁명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면 우리 각자의 작은 노력은 그 혁명을 앞당겨 줄 것입니다. (본보 제휴 <뉴스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5월 10일, 금 6:0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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