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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Bach's Matthew Passon 041719
바하의 마태 수난곡
[예수생각]


(서울=뉴스앤조이) 박충구 (전 감신대 교수) = 하루 종일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들었다. 가사는 시인 피칸더의 것이지만 바하가 음악으로 옷을 입힌 것이다. 1971년 빈에서 Nikolaus Harnoncourt가 음악 감독을 하고 David Willcocks가 지휘한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이반 피셔가 녹음한 DVD도 있지만 나는 마태 수난곡은 음반이나 LP로 듣는 것이 좋다. DVD는 진행되는 이야기의 장면과 인물은 없고 연주자만 비치는 화면이 나의 상상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수난곡은 102개의 독창과 합창 아리아로 이어지는 대작이다. 이 음반을 들으려면 최소 세 시간을 내야 한다. 여러 번 들었지만 오늘처럼 세 시간을 꼬박 들은 적은 없었다.

마태 수난곡을 들으며 나는 깊은 산 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산에서 벗어나 장엄한 큰 산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산은 인간의 죄다. 합창은 큰 산을 노래하고 복음전도자는 진행 과정을 설명한다. 간간히 나오는 알토는 자비와 은총이 필요한 “우리의 실존”을 드러낸다. 이 수난곡 가사는 예수의 고난을 서술한 성서의 이야기들을 정밀하게 담고 있다. 음악에 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나는 예수의 고난을 대속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 바하의 수난곡에 깊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의 죄보다 다른 사람의 죄를 더 많이 본다. 어느 페친의 글에서 “다른 이에게는 봄바람 같이 대하고, 자신에게는 가을의 서릿발 같이 대하라”라는 좌우명이 담긴 것을 보았다.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악귀들이 날뛰는 것같은 세상에서는 더 어렵다. 그의 좌우명과 달리 우리는 자신의 죄를 덮어두고 감추기 잘하는 존재다. 반면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덜 관대하다. 죄라면 너무 종교적이니 차라리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바꾸어 생각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간혹 타인의 죄를 보면서 타인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보기도 한다. 심지어 정죄의 돌을 든 우리의 손이 우리 자신의 양심을 때릴 때도 있다.

이 수난곡을 들으면 예수의 수난의 과정에 등장하는 다양한 얼굴들과 그 장면이 떠오른다. 온갖 폭력, 멸시와 천대,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예수, 교활한 배반자 유다, 그는 예수를 팔기위해 예수의 적대자와 내통, 모의하고 예수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며 인사한다. 침묵하는 예수를 닦달하는 고위성직자, 그는 마치 하나님을 혼자 소유하고 있듯이 예수를 심문한다. 양심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계산하는 비겁한 빌라도, 선생을 배반할 것을 예고 받고서 펄펄 뛰었던 베드로, 그러나 그는 겁에 질려 예수를 하늘에 맹세하며 부인하고 닭소리를 듣고 통곡한다. 이런 장면 끝에 “나에게 자비를 베프소서!” 라는 가사의 알토가 이어진다.

마태 수난곡은 예수를 음해하고 죽이고 배반하며 도망치는 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죄스런 실존을 드러낸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사건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기성, 잔혹성, 불성실성, 비열함, 거짓됨, 비인간성, 창조주의 뜻에서 멀리 떠난 가련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느낀다. 못된 저들이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바로 나의 짓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이 동원하는 많은 용어, 원죄, 유전 죄, 알고 짓는 죄, 모르고 짓는 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일곱 가지 대죄... 등등은 보편적인 인간의 죄라는 거대한 실체의 일부를 지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나 연극을 보며 울고 웃는다.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주체와 객체가 교감하거나 일치하는 공감과 감정이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이 감정적인 기만을 당하는 것일까? 아니면 진실을 향한 일깨움일까? 어찌했든 죄의식의 이입이라해도 좋고 공감이라 해도 좋다. 나는 어느 순간 관객의 자리에서 예수를 배반하고 죽이는 무리에 서 있는 나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바하가 “자비를 베푸소서,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눈물을 보시고...” “보소서, 나의 심장과 눈이 당신 앞에서 비통하여 울고 있습니다” 라는 가사를 넣은 것이 이해가 된다. 물론 성서 텍스트에는 없는 내용이다.

47. Aria – Alto
Erbarme dich,
Mein Gott, um meiner Zähren willen!
Schaue hier,
Herz und Auge weint vor dir
Bitterlich.

사람은 자기 내부의 검열자를 각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해도 될까, 안될까?”를 묻게 만들어진 인간이다. 자연적 욕망을 조절하는 도덕적 기재라고 할까. 성찰적 인간에게는 이런 기재가 홀로 머물 때 좀 더 날카롭다. 그러나 그런 인간도 집단 속에 들어가면 성찰의 기회는 줄어들고 무뎌진다.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이론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 혹자는 아무도 없을 때 사람은 죄를 더 많이 짓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경우 죄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의 표현과 대부분 연관되는 것이다. 페북에서 글을 쓰는 행위도 스스로의 검열을 통해 나온다. 검열 기재가 강하면 썼다가 지우기도 한다. 자기 검열에 걸려서다. 이런 검열기재는 우리의 도덕적 자아를 제대로 지켜줄 수 있는 것일까?

간혹 검열기재가 너무 약하여 욕망에 따라 중구남방 날뛰는 경우도 있다. 버닝썬이나 김학의 사건은 그런 속성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일 부류 속에 머물 때, 가진 힘이 클수록 우리는 유혹에 무력해질 수 있다.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도 그랬고, 비상식을 유통시키는 종교집단 안에서도 그렇다. 문제는 그들을 비판하다 보면 우리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도, 제자들도 좋은 제자가 되고 싶었던 그 기준의 검열 기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실패한 베드로는 슬프게 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바하는 우리도 그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도 우리도 죄인이라는 의미다. 후회와 눈물과 반성과 각오와 결단이 늘 모자란다.

그래서 나는 죄인으로 사는 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라인홀드 니버가 이해가 된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죄의 굴절 각도를 늘 예상하고 살아야 한다는 기독교 현실주의 전통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천진난만한 순진함에 빠지거나, 사악함에 빠지기 쉽다. 순진함과 사악함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악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순진함은 악을 저지할 능력이 없고, 사악함은 악의 크기와 심도를 더 강화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쳤던 대중은 사악하기 보다는 순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순진한 이들은 선명한 목소리로 악에 저항하거나 이견을 말하지 못한다. 순진함은 악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기에 악을 이겨내지 못한다. 순진함과 사악함은 복종과 질서의 궤도를 타고 일치를 이루어낼 때 더 큰 악을 유통시킨다.

그래서 나는 악에 관한 비판과 이견이 없는 집단은 무섭다. 베드로조차 아무 소리를 낼 수 없었던 그 무서운 골고다, 살기등등한 무리들이 전원 일치로 힘을 모으던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임을 당했다. 이견자는 소리 없이 숨죽이고 있거나, 아니라고 손 사래질 치거나, 알몸으로라도 도망을 쳐야 했던 자리가 골고다다. 사악한 대제사장이 순진한 집단을 이끌고 올라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리가 골고다다. 생명과 평화의 언덕이 아니라 해골의 자리, 죽음의 자리다. 슐라이에르마허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 의식의 밀도가 깊었던 이를 죽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근성, “하나님과 나는 하나”(요 10)라고 생각하며 살던 이를 죽인 것이다. 예수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죽이려 했던 것일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바로 그곳에서 인간의 죄가 아주 적나라하고, 아주 깊게 드러난다. 유다, 베드로, 도망친 제자, 빌라도, 제사장, 못 박는 자, 제국의 창으로 찌르는 자, 제비 뽑아 예수의 옷을 가지려는 자. 그들을 닮은 우리 인간은 눈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저 윤리적, 도덕적 오류를 범한 자가 아니라 죄인이다. 바하가 본 인간이다.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4월 18일, 목 6:5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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