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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Brutal Northwest youth group 041019
잔인한 서북청년단, 4.3때 여성들에게 무슨 짓 한 건가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북에서 내려와 4·3 제주로 향한 서북청년단, 그들은 누구인가



▲ 국회 앞에서 시위하는 서북청년단. ⓒ 위키백과

(서울=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 해방정국 때 갑작스레 출현해 '학살 전위대'로 활약한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 1946년 11월 발족해 1949년 10월 법적으로 소멸한 이 단체는 '북에서 내려와 제주 4·3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서북청년단 대다수가 제주도로 갔다는 의미가 아니다. 북에서 내려온 그들의 폭력적 에너지가 제주 4·3항쟁 진압 과정에서 극명하게 표출됐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미군과 경찰의 명령을 받은 서북청년단이 4·3 때 무고한 양민들을 악랄하게 학살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단순히 인명을 살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성 인권까지도 무참하게 짓밟았다.

오금숙 제주 4·3연구소 연구원이 1998년 '제주 4·3 제50주년 기념 제2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인권 피해 사례'에 정아무개 교사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인명과 여성 인권에 대한 서북청년단의 이중적 악행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정씨는 진보 진영과는 무관했다. 그런데도 1948년 4·3항쟁 때 서북청년단에 붙들렸다. 실질적인 체포 사유는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약혼자인 홍경토도 붙들렸다. 초등학교 교사인 홍경토 역시 진보 진영과 무관했다. 체포된 홍경토는 공장 창고에 갇혔다. 거기서는 청년단원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구타하고 있었다.

청년단원들은 여성과 남성을 불러낸 뒤, 공개적인 데서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다가 쇠꼬챙이를 불에 달군 다음, 여성의 몸을 쑤셔댔다. 여성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홍경토는 조만간 죽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홍경토가 약혼녀 도움으로 살아난 것이다. 홍경토가 죽을 위기에 처한 그 시각, 정씨가 약혼자를 구하기 위해 약혼자 아닌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정씨를 납치한 청년단 간부는 그 살벌한 상황에서 청혼을 했다. 정씨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약혼자를 살려주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홍경토는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정씨는 학살자와 결혼했다. 그 뒤, 정씨가 불행하게 산다는 소문이 제주 시내에 퍼졌다.

4·3 당시 제주도에서는 서북청년단원들이 피해자 여성과 강제 결혼하는 일이 많았다. 이남에서 생활기반이 취약했던 이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제주도 정착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부잣집 딸을 노리는 경우도 있었다.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가족을 학살한 원수와 한 이불을 덮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제주도에는 정씨처럼 냉랭하게 사는 부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평생 가도 부부동반 외출을 안 하는 여성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은 남쪽 제주도에서 이처럼 입에 담기 힘든 악행들을 저지른 뒤 역사 속으로 숨어들었다.

1946년 11월 30일 결성된 서북청년단은 이북청년단


▲ 제주 4·3 당시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들. ⓒ 위키백과

현대 한국인들한테는 서북(西北)이란 방위가 평안도로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평안도·함경도·황해도를 통칭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됐다. <삼봉집>에 따르면, 비운의 재야인사인 삼봉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한테 자기소개할 목적으로 강원도 북부와 함경도를 잇는 철령 고개를 지나면서 "철령은 산이 높아 칼끝 같고"라는 시의 한 대목을 남겼다.

바로 그 칼끝 같은 철령이란 관문을 기준으로 북동쪽은 관북, 북서쪽은 관서, 동쪽은 관동으로 분류됐다. 개경 북쪽인 평양이 북경이 아닌 서경으로 불린 것도, 철령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위 관념에 따르면, 서북은 한반도 북부를 통칭하는 표현이었다.

그런 관념이 해방 직후까지도 통용됐다는 점은 1946년 11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지금 서울 시내에서 서북 청년들로 조직되어 있는 청년단체는 서북청년단, 대한혁신청년회, 북선(北鮮)청년회, 함북청년회, 평안청년회, 황해청년회, 양호단의 일곱 단체"라는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

위 기사에 따르면, 북조선이란 의미가 담긴 북선청년회, 함경도 출신들이 모인 함북청년회도 '서북 청년들'의 범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런 서북 청년들의 모임이 1946년 11월 30일 결성된 서북청년단이었다. 이 단체는 요즘 말로 바꾸면 이북청년단이 된다.

1986년 12월 17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서북청년단 특집 기사 제7편에는 "서청은 맨 처음 1천여 명의 회원으로 출발했으나, 마침내는 20만 회원(선우기성 위원장의 증언)으로 확장"됐다고 쓰여있다. 이북 청년들이 객지인 남쪽에서 이처럼 신속한 조직 확장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해방 직후의 대규모 인구이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이용기·김영미의 '주한미군 정보보고서(G-2 보고서)에 나타난 미 군정기 귀환·월남민의 인구이동 규모와 추세'에 따르면, 1945년 8월부터 11월까지 총 43만 2600명, 12월엔 7만 8884명이 38도선을 통해 남하했다. 1946년 1월부터 1948년 12월까지는 매월 수천에서 수만이 남하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본래 남쪽에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이런 인구이동 흐름을 타고 이북 출신들이 대거 남하한 것도 사실이다. 서북청년단의 등장과 확산은 이런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들이 남하한 원인으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은 북한의 친일청산과 토지개혁이다. 이 외에, 자본가 계급을 대변하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이 공산당한테 밀린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는 조선민주당 지지층이 북쪽을 떠나도록 유도하는 원인이 됐다.

서북청년단 영향력 배후는 미 군정과 친일세력의 정치적 수요

노동자와 빈농의 급격한 지위 향상도 원인이 됐다. 해방 2년 전인 1943년 현재, 전국 사립학교 중 264개가 북쪽에, 80개가 남쪽에 있었다. 북쪽 사립학교 학생의 대부분은 지주 등을 포함한 상류층이었다.

이 같은 교육 양극화는 해방과 함께 극적으로 역전됐다. 해방 뒤 북쪽에서는 노동자·농민의 취학률이 급증하면서 이들이 학생 정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이는 기존 상류층을 불안케 하는 원인이 됐다. 역사학자 김평선의 논문 '서북청년단의 폭력 동기 분석'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해방 이후, 식민시기에 교육적으로 소외되었던 노동자와 빈농들이 교육적 혜택을 받게 되면서 점차 사회·경제적으로 그 지위가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9월 평남 지역 중등 이상 입학생의 출신성분을 보면, 노동자와 농민이 각각 18.5%와 60.7%를 차지하였다. 이들의 교육적 수혜 증가는 소련 당국의 입장에서 간부 양성의 필요성 때문에 추진되었다. 점차 이들은 이북 지역에서 정치·경제·치안 영역에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제주 4·3연구소가 2010년에 발행한 <4·3과 역사> 제9호·제10호 합본호.

이런 흐름 속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상류층과 기존 식자층이 38도선을 넘어 대거 남하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서북청년단을 결성해 남한 정치무대에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같은 한반도 안이라고 해도, 고향 떠난 사람들이 불과 1~2년 사이에 객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1천으로 시작했던 타향인들의 조직이 얼마 안 가 20만으로 급증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타향인들의 조직이 그렇게 팽창하는 것을 토착민들이 그냥 지켜보지도 않는다. 서북청년단이 조직과 영향력을 급속히 팽창한 것은 상당히 경이적인 일이다.

그런 경이적 현상의 배후에는 일차적으로 미 군정과 친일세력의 정치적 수요가 있었다. 중도 성향과 진보적 성향을 함께 띠었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해방 직후 전국적 지지를 받은 사실, 미 군정이 여운형 세력을 억누른 뒤인 1946년에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목적으로 일시적이나마 여운형의 입지를 살려준 사실에서도 나타나듯이, 해방 공간에서도 지금처럼 진보 진영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북 청년들이 서북청년단에 가담해 학살 청부업자로 살길 모색


▲ 4·3 유해 발굴 현장. ⓒ 제주 4·3 아카이브

그런 상황에서 미 군정이 오로지 군사력만으로 진보 진영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는 통치의 정통성을 획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 군정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민중 속에도 좌파에 맞설 대중 조직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주목한 대상이 이북 출신 청년들이었다. 언론인 리영희는 <대화>에서 "이북에서 도피해온 그런 부류의 청년들이 서북청년단이란 것을 결성해 미 군정과 경찰의 비호하에 온갖 테러와 불법행위·폭력을 자행"했다고 말한다.

미 군정이 서북청년단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는 점은 위 김평선 논문에 소개된 청년단원 박아무개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미 군정은 박아무개를 서귀포시 표선면사무소에 취업시켜주었다가, 거기서 해고되자 이번에는 미 육군 제24사단 첩보부대인 CIC 성산포 사무소 직원으로 채용해주었다. 이런 식으로 미 군정이 '살뜰히' 챙겨주지 않았다면, 이북 청년들이 그 짧은 시간에 객지에서 정치적 기반을 굳히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북청년단이 급속히 팽창한 데는 경제위기도 한몫했다. 해방 뒤 남한에서 가중된 극도의 청년실업이 이북 청년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한편, 미 군정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됐다. 미 군정은 청년실업을 해소하고자 단기 일자리 창출 방안 등을 모색했지만, 해방 직후의 경제위기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북 출신들은 이남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열악한 경제적 조건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평선 논문에 따르면, 1947년에 월남민 12만 766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6만 8248명이 실업 상태에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런 경제위기는 이북 출신들이 정치무대에서 일자리를 찾도록 유인하는 요인이 됐다. "남한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월남민들은 실업난과 식량난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강요받았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김일성 정권을 피해 남으로 내려왔더니, 남쪽에는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미 군정과 친일세력이 독자적으로 남한 민중을 상대할 수 없고 남한에서 경제위기가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이북 청년들이 서북청년단에 가담해 학살 청부업자로 살 길을 모색하게 되고, 이로 인해 분출된 그들의 폭력적 에너지가 제주 4·3항쟁에 대한 진압을 통해 극명하게 표출됐던 것이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4월 13일, 토 10:3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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