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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Uncle John who loved God and human, the church and the world, and human and nature(2) 032719
하나님과 사람, 교회와 세상, 인간과 자연을 사랑한 엉클 존(중)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 존 스토트 - 목회자·BBC 복음주의자·엉클 존·애조가·한인애요한


(서울=뉴스앤조이) 이재근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대학교)

BBC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만일 영국 복음주의의 놀라운 성장을 어느 한 사람의 공로로 돌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스토트일 것이다"라며 스토트를 현대 영국 복음주의 대표자로 평가한다.7) 한 지역 교회 목회자로서의 존 스토트가 세계의 지도자가 된 것은 그가 전도 집회 및 사경회에서 설교로 20세기 복음주의 신앙 운동의 전 세계적 확산을 도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확산된 복음주의 공동체가 어떤 신앙과 실천을 그 공동체의 핵심 강령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해 일종의 매뉴얼을 제공한 인물이 스토트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스토트의 복음주의는 그 자신도 자주 언급한 대로, 영국 공영 방송국의 이름을 따서 주로 BBC로 불린다. 'Biblically Balanced (또는 Biblical and Balanced) Christianity', 즉 '성경적(으로), 균형 잡힌 기독교'였다.

스토트의 복음주의 신앙이 자란 모판은 이미 언급한 대로, 럭비스쿨 시절 배시와의 만남이었다. 스토트가 자신이 회심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배시에게 보낸 후, 배시는 이후 5년간 매주에 한 통씩 스토트에게 기독교 교리나 신앙 훈련, 훈계 등을 담긴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배시의 여름 캠프에 참여하면서 그를 도운 일도 복음주의 신앙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케임브리지 CICCU에서 강조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및 이신칭의 등의 정통 교리도 그를 복음주의자로 만들었다. 리들리홀에 다니면서 복음주의 신앙의 내적 일관성을 발견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런데 스토트는 이런 형식적인 과정 이외에, 자신이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회심'을 경험하게 된 과정을 내밀하고 개인적인 언어, 즉 아주 전형적인 복음주의적 언어를 통해 고백한다. 천국의 사냥개가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말콤 머거리지, C. S. 루이스를 추적했듯이, 자신도 그 사냥개의 추적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직접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렸을 때, 자신이 그리스도께 끌린 두 방식 중 하나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감, 두 번째가 자신의 패배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두 감정 속에서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 있던 자신에게 그리스도는 지속적으로 문을 두드려 결국 마음 문을 열었다고 고백한다.8)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측면에서 고백적인 복음주의 목회자였던 그가 일개 교회의 사역자 범위를 넘어, 처음에는 영국 복음주의권, 이후에는 미국을 포함한 세계 복음주의권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한 시기는 1955년 이후였던 것 같다. 이 과정은 1945년 이후 영국 복음주의 진영 전반의 흐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역사가 브라이언 스탠리에 따르면, 전후 영국 복음주의에는 미국에서와 같이 극단적으로 보수적이고 분리적인 성향을 가진 근본주의자가 거의 없었다. 영국의 교파 지형은 미국만큼 다채롭지 않았고 개교회적이지 않았기에,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교단을 바로 뛰쳐나가 새로운 교파나 회중을 설립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라는 용어 자체도 영국에서는 대체로 미국보다 더 느슨하게 적용되었다. 주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그러므로 바로 그 성경이 명령하는 대로 전도에 우선순위를 두는 공동체를 지칭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에 이 느슨한 연대에 좀 더 분명한 색깔과 경계를 규정해야 하는 현실이 찾아왔다. 하나는 잉글랜드국교회, 즉 성공회 내부의 일부 진보적 복음주의자 그룹이 뚜렷한 자유주의 성향으로 이동하면서, 자신들을 더 이상 복음주의자라 지칭하지 않게 된 현상이었다. 이로써 성공회 복음주의 왼쪽의 한 영역에 자리매김하던 집단이 사라졌다. 또 하나는 미국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의 영국 런던 해링게이 집회(1952~1954)와 케임브리지 집회(1955)가 준 충격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전국구 부흥사로 떠오른 빌리 그레이엄은 원래 미국 남부 근본주의 배경 출신이었다. 그가 근본주의자가 아닌 다른 진영의 기독교인과도 관계를 확장한다는 이유로, 미국 근본주의 진영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반대로, 영국에서 그레이엄은 전형적인 미국식 근본주의, 분파주의, 인기영합주의를 추구하는 인물로 비판받았다.

이 때문에 영국 복음주의자가 빌리 그레이엄과 연대할 수 있는지, 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는지가 논란거리였다. 이 논란에 스토트가 끼어든 것이 1955년으로, 그는 그해 11월과 이듬해 5월에 잡지 <크루세이드 Crusade>에 글을 실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은 신앙의 근본을 붙든다는 의미에서의 근본주의를 지지하고 인정하므로 빌리 그레이엄 사역을 지지하지만, 미국식 근본주의의 과장, 이벤트성, 반지성주의, 반문화주의에는 반대하는 복음주의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이 두 기고문이 1956년 소책자 <근본주의와 전도 Fundamentalism and Evangelism>9)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이 스토트를 무대 전면에 등장시킨 계기를 만든 작품으로, 이후 그는 "영국판 신복음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계자"가 되었다.10)

이렇게 무대에 등장한 스토트의 복음주의 특징은 비교-대조의 방식을 취하면 더 분명해질 것이다.

첫째, 빌리 그레이엄을 대표로 하는 미국 복음주의와의 차이. 나이가 비슷했던 스토트(1921년생)와 그레이엄(1918년생)는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고 협력한 특별한 친구였다. 1946년부터 영국에서 집회를 인도한 그레이엄이 1952년에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의 초청으로 런던 해링게이에서 2년간 연속 집회를 연 이후, 두 사람은 절친이 되었다. 그레이엄은 집회가 없는 날에 스토트의 교회에서 예배하거나 성찬에 참여했고, 스토트는 자기 교인들과 함께 그레이엄 집회에 꾸준히 참석했다. 마지막 해링게이 집회가 열린 1954년 5월 22일 집회에는 한 번에 12만 명이 모였다. 영국 역사상 한 자리에 가장 많은 청중이 모인 신앙 집회였다.

영국의 신앙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며 교회가 비어 가는 와중에 그레이엄의 집회에 이토록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사람들의 의문에 스토트는 "빌리는 이 사람들이 지금껏 보아 온 사람들 중 가장 투명하고 신실한 설교자"였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11) 그레이엄은 1955년 11월의 케임브리지 집회가 끝난 후 스토트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 두 사람은 아직 젊소. 많은 사역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소. 우리 우정이 더욱 성장하고 깊어지기를 기도하겠소. (중략) 웨슬리와 휫필드의 우정처럼 우리도 그분께 쓰임 받기를 바라오. 이렇게 짧은 시간을 만나면서 당신처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 사람은 별로 없었소. 케임브리지에서 해준 모든 일에 진심으로 감사하오."12)

이런 우정에도 스토트는 그레이엄이 대변한 미국식 복음주의의 전반적인 대중영합주의, 상업주의, 반지성주의,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태도와는 선을 그었다. 예컨대, 1974년 로잔 대회의 성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의가 대표적이었다. 1966년 베를린 전도 대회의 후속 대회를 전 세계 규모로 방대하게 열자는 그레이엄의 제안에, 스토트는 이 대회가 이벤트성 집회가 아니라 충분히 준비된 학술 대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며 참가를 주저했다.

스토트의 견해는 당시 영국 복음주의자 전반의 의견을 대변했다. 또한 대회의 최종 결과로서 로잔 언약이 복음 전도와 함께 사회참여를 기독교인의 실천의 양 날개로 규정한 것도 이런 차이를 보여 준다. 당시 북미, 특히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이 개신교 에큐메니컬 진영이나, 가톨릭 해방신학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라며 크게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스토트는 성경의 원리는 인간의 영혼과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과 광범위한 도덕 이슈에도 같은 무게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스토트의 BBC 복음주의는 그레이엄의 것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전인적이고, 총체적이었다.13)


▲ 왼쪽부터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모리스 우드.

둘째, 마틴 로이드 존스를 대표로 하는 영국 비국교도 개혁파 복음주의와의 차이. '독터'(Doctor) 마틴 로이드 존스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영국 보수 복음주의 르네상스를 이끈 영혼이었다. 1943년부터 1968년까지 독립 교회인 런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개혁파 신앙에 근거한 탁월한 강해 설교와 저술로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말씀 및 지성에 대한 갈급함을 채워 준 인물이다. 1899년생인 로이드 존스는 스토트보다 22살이 많았으므로, 동시대에 활약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로이드 존스가 스토트보다 한 세대 앞선 선배였다. 둘은 서로를 존경하고, 설교와 강연, IFES 사역을 통해 영국 복음주의의 지성적, 영적 부흥에 함께 했지만, 교회론에서 강조점이 달랐다.

성공회가 아닌 독립 교회 소속, 정규 신학교를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한 신학 교육, 잉글랜드인이 아닌 웨일스인 민족 정체성, 성공회식 중도(via media)보다는 엄밀한 개혁파 교리를 강조하는 신학이 어우러져서, 로이드 존스의 분리주의 성향을 주조해 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66년 10월의 제2차 전국복음주의자회의(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였다. 로이드 존스가 복음주의자는 배도한 교회에서 나와 복음주의 신앙관이 투철한 이들만의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연설한 유명한 사건이었다. 대회장이 충격으로 술렁거리자, 대회 의장이었던 스토트는 연설 중간에 개입해 로이드 존스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대회 후에는 스토트와 같은 성공회 소속의 제임스 패커도 이에 반대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했다.

영국의 두 주요 복음주의 진영의 갈등은 1967년 4월에 킬(Keele)에서 열린 전국 복음주의 성공회 대회(National Evangelical Anglican Congress)와 직후 탄생한 킬 성명서(Keele Statement)를 통해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대회에서 스토트, 패커, 마이클 그린, 필립 휴즈 등이 이끄는 성공회 복음주의자 1000여 명이 자신들은 분리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명확히 하고, 동시에 복음의 사회적 측면도 강조했다. 이로써 스토트가 대표한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는 분파적 고립주의를 피하고, 교회의 공교회성과 일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주의로 자리매김했다.14)

셋째, 성공회 내부 고교회 및 광교회와의 차이. 스토트는 일평생 성공회 신자이자 사제였음에도, 성공회 정체성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1980년대에 다음과 같이 말한 적도 있다.

"가장 먼저 저는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다음으로 저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중략) 셋째로, 저는 성공회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속한 역사적 전통과 교파가 성공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교파주의를 변호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저는 성공회를 가장 먼저 내세우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어떤 사람을 복음주의 '성공회' 교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성공회 '복음주의자'라고 부르는 편이 더 옳은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독교 정체성의 순서를 그리스도인, 복음주의자, 성공회 신자 순으로 두었다. 이 점에서 성공회 내부의 고교회파(Anglo-Catholics), 광교회파(Liberals)보다도, 성공회 바깥의 복음주의자와 더 친밀감이 높았다. 그럼에도 스토트가 성공회 신자였다는 점이 그의 복음주의가 띠게 될 색깔을 대략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성공회 특유의 중도성, 즉 유연성과 공존을 강조하는 에큐메니컬 정신 때문에, 고교회파가 성공회를 이탈해 가톨릭으로 가지 않듯, 광교회파가 성공회를 이탈해 자유주의 교단을 만들지 않듯, 저교회파 복음주의자인 스토트와 그의 동료들도 로이드 존스의 요청을 따르기를 거부한 것이다.

넷째, 르네 파디야가 대표하는 남미 복음주의와의 차이. 주로 전도와 영혼 구원을 우선순위로 두는 복음주의는 대체로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19세기 복음주의 2차 대각성이 영적 해방으로서의 회심, 부흥, 선교의 영역을 억압받고 소외되고 핍박받는 흑인, 여성, 고아와 과부, 이민자, 문맹자, 노동자의 사회적 해방으로 확대 적용한 전례가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1947년 이래 미국 신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 칼 헨리는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을 통해 복음주의 사회참여 지향성의 역사적 유산을 소환한 바 있었다. 그러나 헨리가 주로 애통해했던 미국 근본주의/복음주의 전통과는 달리, 각국 국교회인 잉글랜드성공회와 스코틀랜드장로회는 교회와 세속과의 관계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미국식 정교분리 제도는 영국에서는 낯선 전통이었다.

아마 이런 이유로, 로잔 대회에 초대받은 남미 복음주의자들이 대회에서 급진적 제자도에 근거하여 정치 상황에 대하여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자고 요청했을 때, 미국 지도자들은 화들짝 놀라고 진의를 의심했다. 이와는 달리, 스토트를 비롯한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그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남미 급진 복음주의 지도자 르네 파디야는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존을 로잔 1차 대회의 핵심 인물로 사용하셨다. 나는 '복음 전도와 이 세상'이라는 주제에 대한 회의에서 발제를 하도록 초청받았다. 거기서 나는 복음주의자들이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고 믿은 여러 이슈들, 즉 생활 방식의 문제, 교회 성장을 위한 '종족 단위 원리' 채택의 문제, 복음과 문화의 관계,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와 같은 이슈를 제기하였다. 그 결과 나는 대부분의 복음주의 진영, 특히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거부당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이슈는 로잔 언약에 포함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여전히 존에게 깊이 감사하는 것은, 그가 1977년부터 1982년까지 로잔의 신학과교육위원회의 의장으로 주도한 일련의 회담에서 같은 이슈들을 다루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모든 회담에 나를 주강사 중 하나로 초대해 주었다."15)

서양 지도자 대부분에게 거부당한 남미 지도자 파디야, 사무엘 에스코바르, 올란도 코스타스를 스토트는 품었고, 그 결과 20세기 복음주의 운동의 일대 전환을 만든 로잔 언약이 탄생했다.16) 그러나 남미 복음주의자들과 친밀했고 그들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음에도, 그는 이 급진 복음주의자들의 일부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즉,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시므로, 남미 해방신학의 '해방' 개념을 기본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남미 지도자 일부가 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끌어들이는 논리, 또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서구, 특히 미국 탓으로 돌리는 주장, 폭력혁명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과도함에는 동의하지 않았다.17)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3월 28일, 목 10:4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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