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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Uncle John who loved God and human, the church and the world, and human and nature 032019
하나님과 사람, 교회와 세상, 인간과 자연을 사랑한 엉클 존(상편)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 존 스토트 - 목회자·BBC 복음주의자·엉클 존·애조가·한인애요한


(서울=뉴스앤조이) 이재근 기자 = 존 스토트(John R. W. Stott, 1921~2011)를 수식하는 말은 아주 많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함께 '20세기 영어권 최고의 설교자'로 자주 꼽힌다. 빌리 그레이엄과 함께 '20세기 세계 복음주의의 세계화와 확산을 이끈 지도자'라는 평가도 유명하다. 제임스 패커와 더불어(사실은 그보다 훨씬 많이) '20세기에 가장 많이 판매된 기독교 서적들을 쓴 저자'이기도 하다. 칼 헨리와 함께 '20세기 복음주의를 고립된 게토에서 공적 영역으로 끌어내어 자신감을 갖게 만든 인도자'라는 수식어도 가능하다.

다른 탁월한 지도자들과 공유한 이런 유산 외에도, 그의 이름을 단독으로 새겨 넣을 수 있는 유산도 풍성하게 남겼다. '세계 성공회 복음주의의 대변자', '전 세계 기독 청년 학생의 대부', '전 세계 개신교 목회자 및 사역자들의 멘토',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성공회 교회의 주임사제', '세계 선교 운동의 방향을 조정한 항해사', '여왕의 사제' 등이다. 이런 평가는 기독교 내부에서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2005년에 시사 주간지 <타임 Time>은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하나로 선정했다.1)

BBC가 그의 사망 부고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만약 개신교에도 가톨릭처럼 교황이 있다면,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존 스토트라는 데 많은 이가 동의했다.2) 물론, 격의 없는 편안함을 사랑한 스토트는 분명히 그 자리를 거절했을 것이다. 교황 같은 추앙을 받았지만, 교황 같지 않은 소박한 삶으로 후대의 가슴에 남은 존 스토트의 유산을 다음 다섯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자: 목회자, BBC 복음주의자, 엉클 존(Uncle John), 애조가愛鳥家, 한인애요한韓人愛約翰.


▲ 존 스토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1. 목회자로서으 존 스트트

존 스토트가 지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서적으로 안정된 목회자가 된 데는 몇 가지 중요한 배경과 요인이 있었다. 먼저, 그의 가정환경이었다. 1921년에 태어난 스토트의 부모는 아들의 안정감과 따뜻한 성품의 요체였던 것 같다. 아버지 아놀드 스토트는 1차 대전 당시 영국군 의무부대 소령으로 복무했고, 런던 웨스트민스터병원에 심전도검사 학부를 개설한 저명한 의사이자 학자였다. 할리스트리트(Harley Street) 58번지에 진료실 겸 집을 가진 그는 노년에는 왕실 의사가 될 정도로 실력과 경력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아버지보다 다섯 살 많았던 어머니 릴리 스토트는 독일인 모친에게서 태어났기에,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 자랐다. 어머니는 존보다 각각 아홉 살, 두 살 많은 두 딸 조애나와 조이를 독자이자 막내인 존과 함께 어릴 때부터 신앙으로 길렀다. 가족이 다니기로 결정한 교회는 랭엄플레이스에 위치한 성공회 올소울즈교회(All Souls, Langham Place)였다. 아버지는 별로 신앙이 없어서 거의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가족은 열심히 다녔다. 이 교회가 바로 스토트 가문의 모교회로, 나중에 이 교회 목회자가 되는 스토트는 일평생 한 교회에만 정식 등록한 '한 교회의 사람'이 되었다.

신앙의 유산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지만, 세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물려준 이는 아버지였다. 그는 과학이 세상을 더 낫게 해준다고 확고히 믿은 인본주의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열정적인 자연주의자이기도 해서, 음악, 우표 수집, 제물낚시, 와인 수집, 곤충 채집, 식물 관찰을 즐기면서, 아들을 이 취미에 끌어들였다. 존은 우표 수집과 와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음악과 곤충에 대한 애정이 나중에 새에 대한 더한 애정으로 변했다.

8살에 존은 글로스터셔 소재 오클리홀기숙학교에서 학생회장을 역임하고 졸업한 후, 1935년에 명문 사립 기숙학교 럭비스쿨(Rugby School)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아버지 모교이기도 했던 이 학교에서 존은 오케스트라 첼로 주자로 활약했고, 채플 성가대 솔로 주자로도 봉사했다. 여름방학에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가서 언어를 배웠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외교관으로 키우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15살인 1936년 성공회에서 견진을 받고 입교 신자가 되기는 했지만, 이 시기까지도 그에게 기독교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신앙에 별로 관심이 없던 존의 변화는 에릭 내시(Eric John Hewitson Nash, 1898~1982)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럭비스쿨에 다니던 1938년 2월 그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뚜렷하고 의식적인 회심을 경험했다. 배시(Bash)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내시는 성공회 복음주의 사제이자 성서유니온(Scripture Union) 소속 사역자로, 1932년부터 영국 내 상위 30개 명문 사립 기숙학교(영국에서 'public' school은 공립이 아니라 기숙형 사립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특수 사역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내시의 사역을 통해 영국 개신교, 특히 성공회를 이끄는 복음주의 지도자 다수가 배출되는데, 존 스토트도 그 열매 중 하나였다. 스토트는 학교에서 공부 외에도 연극, 연설 등 과외 활동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학생 대표에까지 선출되었지만, 자신이 성공회 목회자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당연히, 신앙이 별로 없었던 데다가, 아들이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와는 극심한 갈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3)

럭비스쿨 졸업 후 스토트는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중심으로 언어를 전공한 후, 이어서 신학을 공부했다. 두 전공 모두에서 최우등 성적을 받고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에는 케임브리지기독학생연합[Cambridge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CICCU(KICK-YOU로 발음)]에서 활동했다. 세계 대학생 선교 단체의 시조로서 1877년 설립된 CICCU는 1928년에 옥스퍼드의 OICCU 및 다른 대학 조직들과의 연합을 통해, 기독학생회(Inter-Varsity Fellowship·IVF)로 재탄생했다. CICCU 활동과 에릭 내시를 도와 배시캠프(Bash Camp) 운영에 참여한 일은 그가 목회 후보자로 준비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케임브리지 소재 성공회 신학교 리들리홀(Ridley Hall, Cambridge)에 입학해 목회자 교육을 받았다. 1881년에 설립된 리들리홀은 헌장에 복음주의 신학교라는 명시가 있었음에도, 스토트가 다니던 당시에는 신학적으로 훨씬 자유로운 성향의 교수가 적지 않았다.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팽배한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스토트를 더 자극했다. 그는 이 상황이 자신이 더 철저한 성경 연구를 통해, 오히려 성경에 내재된 일관되고 신뢰할 만한 논리를 찾아낼 수 있게 만든 '영적 광야'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4)

신학 공부를 끝낸 후 1945년 12월에 스토트는 성공회 부제로 안수를 받았다. 그의 첫 사역지는 모교회 랭엄플레이스 올소울즈교회였다. 당시 이 교회의 교구사제는 해럴드 언쇼-스미스(Harold Earnshaw-Smith)였다. 케임브리지대 크라이스트칼리지에서 고전을 공부하던 중에 CICCU를 통해 회심한 경력에서 알 수 있듯, 스미스도 복음주의 성공회 사제였다. 영국의 대표적인 신앙 갱신 연례 사경회인 케직사경회(Keswick Conference) 강사로도 활약한 그는 1936년부터 올소울즈에서 사역하면서, 전시 공습 기간에도 지하 방공호에서 겁에 질린 시민을 위로하는 사역을 한 성실한 사역자였다.

스토트는 "나는 그분의 구두라도 기꺼이 닦았을 것"이라 말할 만큼 언쇼-스미스를 존경했기에, 그를 통해 복음주의 설교와 목회를 잘 배웠다. 또한 올소울즈교회는 복음전파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교회이기도 했다. BBC 방송국이 바로 옆에 있었고, 병원과 상점, 기업체가 즐비한 곳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언쇼-스미스는 5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수면 중에 갑작스러운 심장성천식으로 급사했다. 1950년 3월이었다.5)

올소울즈는 수상의 조언을 받아 왕실이 교구사제(vicar)를 임명하는 전통이 있는 교회였다. 수상과 교구위원회 추천을 받은 왕실은 29세의 스토트를 교구사제로 임명했다. 후임자가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일부 교인의 우려에도, 그는 훌륭한 설교자, 능력 있는 행정가, 가난한 이들과 청년, 어린이 사역자로 인정받았다. 교구사제가 된 후 스토트는 기도, 강해 설교, 정기 전도, 새 신자 제자 훈련, 평신도 지도자 훈련을 교회의 우선순위로 삼고 전략적으로 목회했다. 특히 교구사제 시기에 그는 건실한 목회와 탁월한 강해 설교를 하는 젊은 복음주의 성공회 목회자로 널리 명성을 떨쳤다.6)

명성이 높아지면서, 국내·북미·오세아니아·남아프리카 등지의 IVF(국제 조직은 IFES) 등의 청년-학생 집회, 케직사경회, 복음주의연맹, 성서유니온, 티어펀드(복음주의연맹 구호 기금), 어바나 대회 등에서 강사로 초빙되거나 임원으로 봉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 결과, 그는 교구사제가 된 지 20년째 되는 1970년 교구사제직을 마이클 본(Michael Baughen)에게 위임했다. 스토트는 일상 목회의 의무를 경감받은 교구담임사제(rector)가 되어 외부 사역에 한층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75년에는 은퇴사제로서 명예직만 유지할 수 있게 되자, 이후 30년간 전 세계를 교구로 삼는 사역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스토트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처음 다닌 교회에서 부제와 교구사제, 교구담임사제, 은퇴사제를 거쳤다. 그런 이유로, 여러 훌륭한 전임자와 후임자의 존재에도, 런던 매러번(Marylebone) 랭엄플레이스 소재 올소울즈교회는 주로 한 사람의 이름으로 널리 기억되었다.

1956년 10월, 설교차 방문한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존 스토트(중앙의 검은 코트)와 캐나다 학생들. 사진 출처 플리커 (상편 끝)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3월 21일, 목 6:3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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