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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Jang Ilsoon biography9 032019
엘리트 여성 이인숙과 결혼
[무위당 장일순평전 9회]



▲ 장일순 선생 내외. 1991년 자택에서 ⓒ 무위당 사람들 제공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장일순은 이에 앞서 1957년 서울의 인텔리 여성 이인숙(李仁淑)과 결혼하였다.

부인은 1929년 12월 20일 서울 출생으로 이 왕가의 후손과 귀족의 자식들만 다닌다는 덕수국민학교(초등학교)를 거쳐 당시 명문으로 꼽히는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버지가 고성군 현내면에서 아연광산과 서울에서 해산물 도매상을 하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이었다. 이인숙은 두뇌가 영민하여 경기여고에 이어 서울대학교 사범대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20살 때인 1957년 한살 위인 장일순과 결혼하였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손으로 빨래 한번 해보지 않고 귀염둥이로 자라 명문 코스를 밟아, 앞날이 촉망되던 이인숙은 장일순과 만나 가난과 고난, 결혼 1년 뒤에는 선거에서 낙선하고, 3년 뒤에는 시국사범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는 역경을 거친다.

뒷날 남편과 사별 후 이인숙의 회고담이다.

내 친구가 원주여고에 와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그 친구랑 맨날 팔짱끼고 다녔거든. 걔가 외로우니까 어떻게 하든 나를 원주로 끌어내릴까 싶었고, 장윤 씨(대성학원을 함께 설립한 친구) 부인이 1년 선배거든. 장윤 씨 부인이 돌아가신 양반을 소개했어. 어떻게 연이 되니까 휘몰아쳤지. 재동에 있는 천도교회관 앞 다방에서 만나고 나오는데 "나는 맘에 드니까 빨리 회답을 달라"고 하시는 거야. 속으로 "뭐 이렇게 경망스러운 사람이 있담" 하고 생각했지.

나는 이 양반을 자세히 보지도 못하고 얼굴에 코만 봐서 코가 큰 남자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보고 바로 내가 좋다고 하니 얼마나 경망스럽게 느껴졌겠어. 그 다음에 또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종로에 있는 신혼다방에서 만났는데 남자하고 개별적으로 만나본 적이 없어서 쑥스럽잖아. 그래서 이 양반 얘기만 듣고만 있었어. 그러다가 덕수궁에서 만났는데 덕수궁 벤치에 앉아서 몇 시간을 자기 포부를 말하는 거야. 앞으로 원주에 지금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를 발전시켜서 교육도시로 만들겠다는 꿈같은 얘기를 하시는데 내가 사범학교를 나왔으니까 통하는 점이 있는 거야.

원주를 교육도시를 만들고 대학을 세우겠다는 포부가 대단했어. 오직 교육사업만 할 거라는 얘기를 하셨어. 나도 사범대학 갈 때는 좋은 교육자 되려고 갔는데 그 말씀을 하니까 마음이 끌리더라고. 그 다음엔 창경원에서 만났는데 몇 시간을 혼자 말씀하는 거야. 나는 탐색전만 하고(웃음). 그런데 빨리 회답 달라고 성화를 부리셨어.

작은 아버지가 서울대 문리대 학생이었는데 동생 편에 편지를 보내는 거야. 집에 와서 편지를 주고는 가질 않는 거야. 왜 안가냐고 물으면 회답 편지를 갖고 가려고 한다고 말하고는 내가 편지 써서 주기를 기다리는 거야. 꽤 여러 번 편지를 주고받고, 돌아가신 양반도 여러 번 서울에 와서 나를 만나곤 했지. 이 양반이 너무 적극적으로 대쉬를 해서 서둘러서 결혼하게 됐지.

우리 집도 사채업자에게 모든 걸 빼앗겨서 형편이 안 좋은 상황이었어. 그래서 서둘러 결혼을 했지. 결혼식은 가회동 성당에서 했어. 신혼여행은 충무로 사보이호텔에서 보내고 서울에 며칠 있다가 그 양반이 먼저 내려오시고 나는 따로 내려왔지. (주석 1)

장일순 부부의 신혼생활은 힘든 세월이었다. 전후 한국사회가 소수의 특권층 빼고는 힘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들 가족도 다르지 않았다. 남편의 가족은 시부모에 장성한 시동생들, 결혼 이듬해에 태어난 장남 동한(東漢)이까지 식구가 1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집에 오니까 먹을 게 있어야지. 우리 집은 여자 형제만 있었는데 여기는 남자들만 있으니까 그 남자들이 먹어대는 게 무시무시하잖아. 그리고 전쟁에 포탄이 떨어져 타버린 집에서 무얼 건졌겠어.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었잖아. 게다가 돌아간 양반(남편)이 책밖에 몰랐잖아. 돈벌이를 하려고 장사한 것도 아니고. 만날 때는 진짜 구름에 뜬소리만 해서 그거에 홀딱 넘어갔지. 그리고 이 양반이 엄청나게 서둘러대니까, 처음 만나고 "나는 마음에 드니까 빨리 회답 달라"고 그랬었어. (주석 2)

이인숙은 험난한 시대에 '시대와 불화(不和)'하는 남편을 내조하면서 가정을 지켰다. 장일순이 일관되게 시대정신을 지키면서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의 공이 컸다. 수없이 찾아오는 내방객들을 흔연히 맞아 식사를 대접하고 편안하게 맞아주었던 것은 높은 교양과 그 역시 시대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제강점기 우당 이회영은 국치를 당해 모든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가져갔던 돈이 다 떨어지고 당장 생계가 어려운 지경인데도 이회영과 부인 이은숙은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을 따뜻하게 접대하였다. 이은숙은 텃밭을 일궈 야채를 키우고 중국인들이 버린 배춧잎을 주어다 김치를 담궜다. 장일순의 부인 이인숙도 다르지 않았다.

군사독재 시대에 원주의 장일순 집에는 시대와 불화하는 민주인사들이 수없이 찾아들었고, 이인숙은 곱게 자랐던 섬섬옥수를 아끼지 않고 정성과 사랑으로 남편의 동지들을 접대하였다.

주석
1> 김찬수, <이인숙 사모님과의 대화>, '무위당 사람들' 제공.
2> 앞과 같음.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3월 21일, 목 6:1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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