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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Jang Ilsoon biography7 030619
고향 원주에 정착하며 교육사업
[무위당 장일순평전 7회] 장일순의 ‘원주사랑’은 남달랐다



▲ 1989년 한살림 모임에서 장일순 선생 1989년 한살림 모임에서 ⓒ 무위당 사람들 제공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장일순의 '원주사랑'은 남달랐다. 고향사람은 사람의 원초적인 감정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그의 고향 원주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관념적이 아닌 실천적이었다.

"남자는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낸다"는 속언까지 생겼듯이 예나 지금이나 출세지향적인 인물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서울로 서울로 몰려든다.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말이 나온지도 반세기가 훨씬 지났다. 하지만 장일순은 크게 달랐다.

장일순은 '원주사람'이라는 도장을 사용할 정도로 원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가 훗날 시(詩), 서(書), 화(畵)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 때도 주로 원주에서, 한 번은 춘천에서 열었으니 모두 강원도에서 연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향 원주에 대해 소박한 말로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애정이 그를 '지역사회 운동가'라는 이름을 갖게 한 것 같다. (주석 1)


▲ 최시형 추모비 건립 당시의 장일순 선생 최시형 추모비 건립 당시의 장일순 선생 ⓒ 모심과 살림 연구소

장일순은 어느 강연에서 자신의 '원주사랑'에 관해 피력한 바 있다.

임진왜란 때 이곳 원주에서 전사하신 13대조 할아버지 이래로 우리 가족은 원주 토박이가 되었지요. 제 위로 형님이 계셨지만 열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으니 차남이었던 제가 장남이 되었지요. 그런데 무엇보다 제가 제주가 없어요. 무능해요. 다른 이유는 자기 고향을 무시하고 자기 겨레를 무시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마뜩잖데요.

원주는 치악산이 막혀서 사람이 나지 않는다는 옛 이야기가 도무지 내 마음에 맞지 않았죠. 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사는 게 가장 보배로운 삶이 아니겠냐?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그냥 고향에 남게 되데요. (주석 2)

장일순은 원주를 본거지로 삼아 한때 정치에 참여하고, 이후 사회문화활동ㆍ민주화투쟁ㆍ한살림운동 등을 벌였다. 그래서 '지역사회 운동가'로 불리기도 하였다. 전후에 원주로 돌아온 장일순 가족은 잿더미가 된 평원동집 대신 봉산동에 땅을 사서 새로 집을 지었다.

둘째 동생 장화순의 증언.

평원동 집이 폭격당한 후 봉산동 원주초등학교 앞에 세를 들어 살다가 지금 형님 댁과 우리집이 있는 땅을 사서 집을 지었어요. 집짓기 전에 이 땅은 채마밭이었어요. 땅 주인이 채소를 심어서 시장에 내다 팔았어요. 이 땅을 팔라고 했더니 땅 주인이 "제가 이 밭을 부쳐서 먹고 살고 있기 때문에 팔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다며 팔겠다고 해서 땅을 사게 되었지요.

집은 우리 형제들이 직접 지었어요. 나중에 결혼해서 분가해 살 때도 형제들이 정권에 탄압받는 형님을 지켜야 되겠다고 해서 형님 댁 주변에 모여 살았어요.
(주석 3)

장일순은 부농 출신인데도 비판적 지식인의 길을 걷고 진보성향이었다. 그리고 청소년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학 복학을 포기한 장일순은 청소년 교육에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졸업 때까지 자신이 내는 등록금이면 60명이 넘는 가난한 아이들을 무상으로 가르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머리 좋은 아들이 복학을 포기하고,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고 있는 혼란기에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겠다고 나선다면 말리지 않을 부모는 흔치 않을 터이다. 더욱이 원주는 전화가 극심했고 그만큼 희생자가 많은 지역이었다.

장일순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일제의 우민화 정책과 전쟁을 겪느라 배움의 기회를 잃고, 특히 원주에는 피난민이 몰려오면서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만큼 많았다. 부모의 동의를 얻어 25살이던 그는 1953년 국민학교(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중등과정을 교육하는 성육(聖育)고등공민학교 교사로 들어갔다. 월급도 받지 않는 자원봉사였다.

1년여 후 학교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교장이 공립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아 떠나게 되었다. 교사들이 "우리가 학교를 민주적으로 운영해 보자"며 돈을 모아 학교 운영권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리더십과 포용력이 뛰어났던 장일순을 교장으로 추대한다. 26살 때이다. 그는 교장이 되었지만 교장실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학생들에게 영어와 수학 과목을 가르쳤다. 교실 안에서는 엄한 스승이었지만 교실 밖에서는 한없이 자애로운 큰형님, 큰오빠 같았다. (주석 4)

장일순은 1954년 도산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했던 민족학교 대성학원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학교 이름을 대성학교로 고치고, 학생들의 인성교육에 전념하면서 교훈을 '참되자'로 정한다. 이때 내건 '참되자'는 평생 그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이 되었다. 참된 가치관을 갖고 참되게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1인1기(一人一技)의 교육을 통해 사회에 적응토록 가르쳤다. 향후 5년 동안 이사장으로서 학교의 발전에 헌신한다.

성육학교가 전수학교(專修學校)이다 보니 아이들이 정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정규 고등학교를 설립하자는 결심을 하신거죠. 교육부로부터 어렵게 설립 인가를 받고 교실이 완성될 때까지 명륜동 원주향교의 건물을 빌려서 열댓 명 학생으로 받아 학급을 꾸렸습니다. 학교는 향교 뒤편 야산을 깎아 지었습니다.

미군부대에서 구한 아스팔트루핑으로 지붕을 씌운 건물을 지어 3학급 150명 학생들을 향교와 신축 교사에 나누어 가르쳤습니다.

학교 운동장은 원주에 진주해 있는 1군사령부군대 장비를 지원받아 만들었습니다. 일순 형님이 이사장을 맡았고, 학교를 같이 설립한 친구 장윤 씨가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주석 5)

주석
1> 이창언, <좁쌀 한 알 장일순선생의 삶과 사상>, <진보정치> 64호, 222쪽, 메이데이, 2015.
2> 이창언, 앞과 같음.
3> 장화순, 앞의 글.
4> 김영주, 앞의 증언.
5> 김홍렬, 앞의 증언.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3월 07일, 목 11:2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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