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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Rhee Syng-man, who was impeached during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his ridiculous looks 030619
임정 때 탄핵됐던 이승만, 어이 없는 그의 모습들
이승만이 숱한 죄악 저지르면서도 일신의 영광 누린 비결


(서울=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 독립운동가들은 인생이 대체로 고달팠다. 그중 상당수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뒤에도 고달팠다. 1945년부터 미군정 거점이 된 서울로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은 특히 그랬다. 그들은 해방 뒤에도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뒤에도 어려움을 겪기는커녕 계속해서 행운을 누린 사람도 있다. 독립운동 한다고 꼭 고생하는 게 아님을 잘 보여준 인물로 이승만(1875~1965년)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억세게 운수 좋은 남자였다.


▲ 서울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이승만 자택)에서 찍은 이승만. ⓒ 김종성

일제강점기에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였다. 국제연맹이나 미국 정부 등에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 때문에 감옥에 갈 정도의 위험은 겪지 않았다. 이는 그가 특별히 힘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번 행운이란 게 그를 따라다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강점 이듬해인 1911년,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 일명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을 조작했다. 이로 인해 신민회 회원 및 기독교인 700여 명이 구속(최종 기소는 105인)됐다. YMCA 간부였던 이승만도 당연히 주목을 받았어야 했지만, 1912년(당시 37세)에 그는 용케도 미국으로 탈출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쓴 <독부 이승만 평전>에 그 행운이 소개돼 있다.

"105인 사건의 피비린내나는 고문•학살극이 자행되고 있을 때 이승만은 연루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가 발행한 일본인 여권으로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그의 출국을 주선한 인물은 친일파로 소문난 미국인 감리교 감독 해리스였다. 그는 출국 허가를 일본 정부에서 얻어주었고, 여행 내내 이승만에게 일본의 한국 통치 사실을 받아들여 상황에 적응하라고 역설했다."

행운은 이승만 신변의 위협을 차단해주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과도한 책임과 명예까지 떠안게 해주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그는 과분한 감투를 쓰게 됐다.

3•1운동 당시 그가 했던 일은, 조선이 국제연맹 위임통치를 받게 해달라고 우드로 토마스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한 것이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일반적 정서와 배치되는 일이었다. 그가 요청한 위임통치가 어떤 것이었는지, 역사학자인 고정휴 포항공대 교수는 '우리 역사 바로 알자: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했는가'란 논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파리 강화회의(1차 대전 평화조약)에서 고안된 위임통치제도란 식민지 재분할에 따른 승전국 열강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약소민족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제도적 장치로서, 실제로는 특정 수탁국의 식민통치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아프리카와 태평양 지역에 퍼져 있던 독일의 식민지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형식을 빌려 승전국 열강이 분할•지배하고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스스로 분명해진다."
- 역사비평사가 발행한 <역사비평> 1991년 11월호에 수록.


▲ 맥아더 장군을 만난 이승만. 이화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승만의 위임통치 요청은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미국의 잠정적 식민지배 밑으로 옮겨달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조선 땅에서 약 200만의 동포들이 일제 헌병의 총칼에 달려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을 때, 그는 '일본 대신 미국이 지배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 전체의 의사와 배치되는 일을 했는데도, 그는 3•1운동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운동 직후 설립된 3개의 임시정부에서 정부 수반급 대우를 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된 정부는 그를 대통령 밑의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으로, 상하이에서 수립된 정부는 국무총리로, 한성에서 수립된 정부는 집정관총재로 임명했다. 3개의 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된 뒤에는 임시대통령이 됐다.

억세게 운이 좋았던 사나이

그가 이렇게 급부상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종전을 계기로 윌슨 대통령과 미국의 영향력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영어를 잘하고 미국 정부와 교섭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무엇보다 그 시점에 미국에 거주했다는 점이 큰 도움이 됐다. 그가 거주하던 국가가 제1차 대전으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점이 그의 입지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이승만의 행운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불성실한 자세 등 때문에 1925년에 임시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됐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그가 상하이에 체류한 기간은 6개월 밖에 안 된다. 그나마 그 기간 동안에도 직무에 전념하지 않았다. 툭하면 상하이 밖으로 관광을 떠나곤 했다.

<오마이뉴스> 기자인 김종훈•김혜주•정교진과 통역가 최한솔이 공저한 <임정 로드 4000km>란 책이 있다.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답사한 과정을 담은 책이다. 공저자들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청사를 추적하느라 애를 좀 먹었다. 임정 사람들이 마치 월세방 옮겨다니듯이 시내 여러 곳을 전전하며 청사를 옮겨다녔기 때문이다.

"상하이 첫 번째 청사와 두 번째 청사, 마지막 마당로 청사는 걸어서 불과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걸어서 몇 십 분 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 안에서 임정 사람들이 이사를 다녔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승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도자라면 자금 마련에 관심을 쏟아야 하지만, 그에게는 '대통령' 명함을 지키는 게 중요할 뿐이었다.


▲ 1951. 4. 18. 왜관, 이승만 대통령이 낙동강 철교 복구공사 현장에서 치사하고 있다. ⓒ NARA

뒤늦게나마 탄핵을 당했지만, 이 역시 별다른 충격이 되지 않았다.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욕을 많이 먹었지만, 미국 활동에는 별로 문제 되지 않았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남북 공동으로 2019년 3•1절 행사를 열자는 제안에 대해 북한은 시간 부족을 이유로 고사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거절한 진짜 이유는 임시정부에 대한 관점 때문이라고 한다. 남한과 달리 임정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태도가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북한이 임정을 부정하는 것은 김일성 중심의 항일투쟁 관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임정이 제 역할을 못했다는 비판 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임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은 바로 이승만이었다.

6년간이나 임시대통령이었던 사람이 불성실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것도 모자라 임정을 분열시키기까지 했으니, 임정이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통합력을 발휘하고 일본을 상대로 투쟁력을 발휘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형식적인 탄핵을 받은 것 외에는 별다른 불이익을 입지 않았다.

이승만의 행운은 계속됐다. 그는 29세 때부터 해방 때(70세)까지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1904년 미국에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10년 귀국했다가 2년 뒤 다시 건너갔다. 그 뒤 임시대통령으로 약 6개월간 상하이에 체류한 적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지만, 국내나 중국•러시아에서 투쟁한 사람들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해방 이후에 맞았다.

이승만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6일 일본을 경유해,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제공한 군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그 뒤 미군정의 지원으로 38도선 이남의 최고 권력자로 급부상하다가 대통령이 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어 대한민국정부에서도 대통령이 된 것이다.

임시정부 때 했던 것처럼 이때도 그는 죄악을 저질렀다. 38도선 이남에서만이라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심에 민족분단을 획책하는 범죄를 자행했다. 그랬는데도 그는 12년간이나 미국의 지원 속에 안정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이 기간에도 중대 죄악을 범했다.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강권 독재정치를 펼치는 죄악을 추가로 저질렀다.

미국에 대한 일편단심

이승만이 숱한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일신의 영광을 누린 최대 비결은 미국에 대한 일편단심 때문이다. 미국에 무한 애정을 쏟아붓고 가급적 미국 땅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 것이, 미국의 선택을 받아 대한민국정부 대통령이 되는 데 결정적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에 대한 한 조각 붉은 마음을 끝까지 유지한 게 그가 행운을 누린 노하우였던 것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이전만 해도 미국이 세계 최강이 되리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제1차 대전 참전을 계기로 미국은 경제적 의미의 세계 최강이 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측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1920년 설립된 국제연맹에도 미국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제2차 대전 이전만 해도 미국이 오늘날 같은 강대국이 되리라고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미국에 대한 일편단심을 끝끝내 유지한 결과로 국제적 명성을 이어가다가 대통령까지 된 것이 이승만 입장에서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선견지명에 스스로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이승만이 미국에 애착을 갖게 만든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 있다. 바로 고종 임금이다. 고종은 세계 각국을 조선 무대에 끌어들이면 어느 한 나라도 조선을 삼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른바 세력균형정책을 펼쳤다. 세계 열강을 끌어들여 자기들끼리 경쟁하도록 함으로써 조선 정세의 세력균형을 만들어내겠다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 하에서 고종이 가장 신뢰한 대상은 미국이다. 고종은 1880년에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조선 정부에 선물한 <조선책략>이란 논문을 매우 좋아했다. 이 논문은 "미국은 언제나 정의를 숭상하는 나라"라면서 "남의 영토를 탐내지 않고 남의 백성을 탐내지 않으며 남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886년까지 미국은 인디언과의 전쟁에 진력하느라 미국 밖에 대한 침략전쟁을 벌일 수 없었다. 그래서 동아시아 사람들의 눈에는 괜찮은 나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고종도 <조선책략>의 권고대로 미국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 1948. 8. 15. 서울, 대한민국 정부수립기념 식장에서 담소하는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 ⓒ 맥아더기념관 / 박도

미국만큼은 꼭 도와줄 거라고 믿은 고종은 1882년 미국과 수교한 이래, 청나라나 일본의 위협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이 매번 거절하는데도, 고종은 미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 같은 군주의 태도가 많은 조선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친일파로 알려진 이완용이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전만 해도 친미파 진영을 주도한 것은 임금이 친미파였기 때문이다. 을사늑약으로 고종이 힘을 잃기 전까지는 친미파가 되는 게 조선 정계에서 유리했다. 이완용도 그에 맞춰 처신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청년 이승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4세 때인 1895년, 그는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1894년에 과거시험이 폐지되자 서양 학문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승만의 배재학당 입학은 평생 신앙해온 기독교에 접하게 되고 미국(인)과의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독부 이승만 평전>은 말한다. 고종의 친미정책으로 정치권이 미국 사랑에 빠지는 분위기 속에서, 과거시험 폐지라는 충격을 당한 이승만이 미국으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미국 선교사들을 만난 뒤 싹트기 시작한 이승만의 미국 사랑은 상당히 견고하게 이어졌다. 이 사랑은 미국이 아직 2류 국가일 때 시작됐다. 그가 이주한 뒤로 미국은 1918년 및 1945년에 국격을 높이면서 세계적인 국가로 성장했다. 미국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킨 게 힘이 돼, 그는 미국이 세계 최강이 된 직후 미국의 힘으로 대통령까지 됐다.

1925년에 탄핵 당한 이승만은 1960년에는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그런 뒤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제2의 조국' 미국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미국 품에서 생을 마감했다. 1965년, 하와이에서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제2의 조국 품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억센 행운을 안겨준 미국에 대한 일편단심을 죽는 순간까지 지켜낸 것이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3월 07일, 목 11:1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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