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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Jang Ilsoon biography6 022719
한국 전쟁 발발, 총살 직전에 구사일생
[무위당 장일순평전 6회] 권영국 소령과의 인연으로 기적적으로 귀향하다



▲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 무위당사람들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장일순도 피해가지 않았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학생과 교수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야했다. 장일순은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전쟁이 터지자 장일순 가족은 소작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다. 장일순이 80년대 중반쯤 어느 술자리에서 지인에게 전한 6ㆍ25 때 겪은 피난살이의 실상이다.

피난생활을 하면서 물이 귀해 머리를 자주 감기 어렵게 되자 무위당은 머리를 박박 밀었다. 1950년 가을, 서울을 탈환한 국군이 북으로 진격할 즈음이었다. 소초면에 있는 갯바위골로 피난지를 옮길 때 가족을 먼저 보내고 무위당은 다음날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 검문소에서 국군이 머리를 박박 깎은 무위당을 평복으로 변장하고 도망가는 인민군으로 잘못 알고 체포했다. 한국전쟁 때 머리를 길렀는가 아니면 박박 밀었는가는 국군과 인민군을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적이다 싶으면 절차도 생략하고 바로 총살하는 무서운 시절이었다.

국군에게 체포당한 무위당이 아무리 북한군이 아니라고 해도 증명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머리만 보고 인민군이라고 확신한 국군 장교는 부하들에게 총살을 명했다. 전시 때 총살은 여러 명을 한 줄로 세워 놓고 한 사람씩 쏴 죽이는 방식이었다. 무위당 차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라고 군인이 물었다.

천주교 신자인 무위당은 말없이 눈을 감고 성호를 긋고 죽음을 기다렸다.

갑자기 앞에서 "중지!"라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사형을 지휘하던 장교가 천주교 신자였던 것이다.

그는 무위당이 십자가 성호를 긋는 것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이 공산당일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사형을 중지시킨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일손이 부족한 군인들은 무위당을 풀어주지 않고 고된 일을 시키며 전쟁터로 끌고 다녔다.

횡성을 거쳐 홍천까지 끌려갔다. 홍천에서 무위당은 생명의 은인인 군인 장교를 만났다. 그를 알게 된 사연은 이렇다. 해방이 되고 처음 국군이 창설되었을 때 권영국이라는 국군 소위가 방을 얻으러 무위당 집으로 찾아왔다.

할아버지인 장경호는 "36년간 일본군 지배를 받다가 해방이 되고 드디어 우리 군대가 생겼으니 당연히 방을 내드려야지요." 하면서 선뜻 자신이 쓰던 방을 내주었다.

무위당과 권영국은 나이가 비슷해 서울에서 내려오는 날이면 자주 어울렸는데 그를 전쟁터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소위였던 그의 계급이 중령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 무위당은 군대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주석 1)

장일순은 1ㆍ4후퇴 시기 적령기여서 군속으로 징집되었다. 영어를 잘해서 미군들이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다. 포로로 잡혀온 인민군들을 미군이 심사할 때 영어 통역을 하면서, 새삼 동족상잔의 아픔을 절감할 수 있었다.

국군이나 인민군이나 젊은이들이 시대를 잘못만나 징집되어 동족끼리 전투를 하고, 다수가 사망하거나 부상되고 더러는 포로가 되었다. 장일순은 자기 또래의 인민군 포로들이 겁에 질려 미군 앞에서 진술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시는 어떤 명분, 어떤 이데올로기로서도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뼛속 깊이 각인하였다.

4ㆍ19혁명 후 영세중립화 운동에 참여하고 평생 평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싹이 트였다. 혹독한 전쟁의 체험에서 얻은 소중한 가치였다.


▲ 장일순 유시 ⓒ 박도

전쟁중에 원주의 악질 지주 대부분이 공산군에 붙잡혀 처형되거나 북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장일순 가족은 무사했다. 일제강점기 이래 소작인들에 대해 베푼 넉넉한 인심과 돌봄의 덕택이었다.

각지의 소작인들은 경쟁적으로 마을마다 자기 집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피신하여 무사했으나 평온동 집은 폭격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제대를 한 장일순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원주를 떠나지 않고 '영원한 원주인'이 되었다. 짧은 서울의 학창시절과 거제도의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면 평생을 원주에서 살았다.

주석
1> 김영주, 앞의 증언.
 
 

올려짐: 2019년 3월 02일, 토 10:1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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