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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스페셜리포트
 
"I am the person, who visited NK with two children 022019
"애 둘에 유모차 끌고 북한 갔다온 여자, 접니다"
[파독 간호사 서의옥씨 스토리 ②] 1990년 평양에서 만난 여성들의 삶


(베를린=오마이뉴스) 권은비 기자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일본 국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을 때부터 독일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 중 하나였다. 그후 윤이상, 임수경, 송두율, 그리고 최순실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도 켜켜이 쌓여있다. '권은비의 베를린 오 베를린'에서는 그 평범하고도 비범한 시간들을 전한다. 첫 순서는 파독 간호사 서의옥씨의 이야기다. 이 기사는 그 두번째다.[편집자말]


▲ 1990년 평양 범민족대회에 참석한 서의옥씨(오른편) ⓒ 서의옥

1967년 '동백림 사건'은 중앙정보부 입장에서는 꽤 성공적인 공작이었다. 마치 그 성과의 계보를 이어가기라도 하는 듯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독일교민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조작간첩사건이 발생한다.

1987년 독일 유학생 최혁배씨 간첩사건부터 같은 해 재독교포 김형규씨 간첩사건, 그리고 1994년 이른바 '거물 간첩'으로 당국에 낙인 찍힌 독일 유학생 김용무씨 사건, 한병훈-박소형 독일 유학생 부부 간첩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난다.

특히 1989년에는 남한 대학생 임수경이 베를린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그는 이곳을 거쳐 평양에 당도한다. 그 과정에서 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아래 민협)는 임수경의 방북을 도왔다는 이유로 국내 언론에 '빨갱이 단체'로 보도됐다.

그해 서의옥은 36살이었다. 낮에는 간호사로 병동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피켓을 쓰던 그는, 1990년도에 범민족대회 결성준비위원회모임에 참석한다. 1980년대 말 국제적 긴장관계 완화 속에서 남과 북, 해외동포가 참여한 민간 주도의 통일행사였다. 하지만 남한 정부의 비협조로 행사는 남과 북에서 각각 개최됐다.

1990년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나다... "그들도 보통 사람이구나"


▲ 독일 베를린 시위에서 박종철 고문을 알리는 피켓을 들고 있는 서의옥씨 ⓒ 서의옥

- 그때 범민족대회 결성준비위원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나?
"아마도 3월인가 4월, 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서베를린에서 결성준비위원회 첫 모임을 했다. 북에서는 당시 북한 대사관 사람들과 전금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여연구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참석했었고, 남에서는 황석영 작가와 해외동포들이 모였다. 그때 당시 남쪽도 북쪽도 아닌 제3지대(베를린)에서 준비모임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다. 당시 북한 사람들은 베를린으로 오는 과정에서 비자 문제로 애를 많이 썼다.

-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자리였는데 두렵지 않았나?
"그냥 그 사람들(북측 인사들)도 보통사람들이구나, 생각했다. 두려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그해 5월쯤엔 동베를린으로 소풍도 갔다. 장벽이 무너진 후, 그릴 파티도 하고 북한대사가 직접 나와서 국수를 만들어 다같이 나눠먹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북측 사람을 만난 첫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날 가리키며 농담으로 '여기 공산주의 선생님이 오셨다'고 했다."

- 어떻게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나?
"난 어릴 적부터 반공교육을 받았지만 독일에서 한국의 노동운동 진영과 계속 연대하면서 의식이 열린 상태였다. 한마디로 북에 가보고 싶었다. 그곳은 어떤 사회인지 호기심이 있었다. 범민족대회 결성준비위원회는 미국, 일본, 유럽, 북한, 남한 사람들로 조직됐었다. 그렇게 모두 서베를린에서 만났다.

1990년 범민족대회 출범식 참가를 위해 몇 번씩 만나서 행동지침(북에서 조심해야할 말과 행동)을 정하고 준비모임을 여러 번 가졌다. 노래도 배웠다. 조선민항(현 고려항공)을 타고 북으로 갔다. 범민족대회를 위한 전세기였다. 당시 참가비가 1000~1500마르크 정도였다."

- 직접 북한에 가서는 무슨 활동을 했나?
"그때 유럽에서는 50여 명이 북으로 가는 전세기에 탑승했다. 베를린 쉐네펠트공항에서 모스크바를 거쳐서 갔다. 모두 유럽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었다. 중간에 고려인들도 탔었던 걸로 기억한다. 유럽 참가자들은 대부분 독일 거주자들이었고, 이응노 화백의 조카 이희세 선생(프랑스 거주)도 있었다. 그렇게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평양공항에는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유니폼을 입고 밀집모자를 쓴 북한 사람 7~8명이 앉아 있었다. 농부들이 시내에 가려고 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 이름을 이미 다 알고 있어서 우리를 안내하는 분들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들은 김일성대학 교수, <노동신문> 주필 등이라고 했다. 그러나 권위의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평양도 가고, 개성도 가고, 백두산에도 가고, 천지연 앞에서 집회도 했다. 남, 북, 해외동포가 하나가 되는 집회였다."

- 자녀들도 그때 함께 갔었던 걸로 안다. 아이들은 그때를 기억하나?
"막내딸과 아들을 데려갔었다. 아들은 아마 기억할 것이다. 작은아이는 유모차에 태우고 큰 아이는 손을 잡고 다녔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북측의 사람들이 수십 명이 몰려들어서 요구르트를 줬다. 왜 요구르트를 줬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주니까 덜컥 겁이 나서 울더니 호텔에 들어와서는 '조국통일, 조국은 하나다'라고 구호를 외쳤었다."

의옥이 아이까지 데리고 평양에 갈 수 있었던 건 그가 한국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라는 땅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21살, 무엇 하나 두려울 것 없이 훌쩍 독일로 떠나왔던 것처럼, 그에겐 북한에 가는 것 역시 두려울 것이 하나 없었다. 당시 의옥은 1990년 북한 사회와 사람들을 만난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서 아이들과 함께 행진하는 서의옥씨 ⓒ 서의옥

<1990년 범민족대회에 다녀와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밟아볼 또 하나의 조국, 동강난 조국 북반부를 향하는 나의 심정은 더없이 복잡하기만 했다. 내 앞에 펼쳐진 범민족대회라는 역사적인 현장에 내가 참여한다는 것, 과연 그곳에 가서 내가 무엇을 겪으면서 느낄 것인가, 그리고 범민족대회에 참가한 후 반통일적인 국가보안법은 우리에게 어떤 족쇄를 채워 억압할 것인가 등의 생각이 오고 가는 사이에 비행기는 어느덧 소련 영공을 거쳐 중국 영공을 벗어나 평양에 도착하고 있었다.

섭씨 35도나 되는 더위에 50여 명의 우리 유럽 참가자 일행이 공항에 도착하자 검게 그을린 얼굴들이 그 더위만큼이나 뜨거운 열기로 "조국통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외치면서 환영해주었다. 나는 그들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의 복잡한 생각들이 씻은 듯 사라지고 그들과 부둥켜 안으며, 아프도록 손목을 잡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왜 우리는 이렇게 갈라져 살아야만 하는가, 우리 모두가 이토록 통일을 원하고 있는데!

며칠 평양에 묵으면서 안내인 없이 평양시내를 자유로이 다닐 수 있도록 북측에서 허락해주었음으로 대회 중간에 휴식시간이 주어지면 틈틈이 평양 거리를 혼자서 둘러보았다.

부식가게, 과실채소점, 어류점 등을 특히 관심을 가지고 들어가 살펴보니 품목은 다양하지 않지만 물건들이 깨끗하고 정성 들여 진열 되어 있었다. 부식가게에서 마늘쫑 장아찌가 맛있어 보여 사려했더니 용기를 가져와야만 판매한다고 했다. 우리가 사는 서구에서는 시장을 한번 봐오면 포장지 등 쓰레기가 거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데 비해 실용적이고 친환경적이라고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물자가 부족해서 그럴 거라는 짐작은 있었지만.

여성들은 거의 모두 직장생활을 하고있는데 대개 1일 6시간 근무한다고 했다. 가사는 전적으로 여성들의 부담이며 명백한 가부장제 문화인 것 같았다. 여성들은 겉으로 대하기에 무뚝뚝하고 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활발했다. 내가 지금까지 접했던 여느 사회주의 국가의 여성들로부터 느낀 바와 같이 애교라는 것은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그 "애교"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산물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곳 여성들을 대하면서 색다르게 느낀 점이 있다면, 그들 거의 모두가 갈색으로 그을린 얼굴에 분을 바른 모습이었다. 분을 안 발랐으면 더 이쁘련만 하는 내 아쉬움은 가치관의 차이인지 모르겠다. 여성문제에 있어서 남녀간의 평등과 가사분담 등 개선되었으면 하는 점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 사회구조가 다른 북한 사회를 서구적 시각에서 본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비누 한 장 팔기 위해 여성의 반나체가 광고에 동원되는 등 여성의 육체가 상품화되고 대상화 되는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안내하는 분에게 북한에서도 가정폭력이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그 분은 예를 들어, 어떤 남성이 취중에 아내를 폭행했는데 그 남성은 참회할 때까지 3개월간 강제노동을 했어야 되었다는 일화로 설명했다.

이상 북한에서 보고 듣고 그 중 인상깊었던 점들을 적어보았다. 우리의 또 하나의 조국이 이렇게 건재해 있다는 사실에 민족적인 긍지를 다시 한 번 느끼면서 귀독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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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짐: 2019년 2월 23일, 토 4:3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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