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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Jang Il soon biography 021319
서울의 배재중고등학교로 유학
[무위당 장일순평전 4회] 비범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하다



▲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 무위당사람들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장일순은 궁핍한 시대에 여유있는 가정에서, 그것도 비범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한다. 어머니도 보통 여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없이 자애롭고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는 품성이었다.

장일순ㆍ화순 형제가 학교에 갔다와서 배가 고프다고 하면 어머니는 남은 밥을 차려주었는데, 찬밥이었다. 그러나 손님에게는, 그것이 장일순네의 논밭을 부쳐먹는 소작인이더라도 꼭 새로 밥을 지어 드렸다. 그 차이에 하루는 장화순이 심통이 났다.

"어머니, 왜 저분들에게는 더운밥을 주고, 저희에게는 찬밥을 주시는 거에요?"

어머니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툴툴거리지 말고 그냥 먹거라."

그 까닭은 어머니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집안의 생활 속에서 절로 터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테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다.

하루는 거지가 동냥을 얻으러 왔다. 장화순이 돈 주는 일을 맡게 됐는데, 남루한 옷차림의 거지가 더러워보여 돈을 던져주었다. 그 모습을 아버지가 보았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시 두 손으로 공손히 드려야 했다. (주석 1)

어린시절 장일순의 별명이 '애어른'이었다.
진중하면서 아는 것도 많고, 친구들에게 배려심이 깊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매우 의젓하고 남을 잘 도왔다고 한다. 특히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형제 남매들 사이에 우애가 각별하였다.

장일순의 어린 시절은 할아버지ㆍ할머니와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엄격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동정하는 가풍이었다.

할아버지가 앉는 곳 바로 곁에는 문이 있고, 거기 밖이 내다보이는 유리가 붙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곳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밥을 얻으러 온 사람이 있으면 윗목에 앉아 밥을 먹는 며느리를 불렀다.

"얘, 어멈아, 손님 오셨다."

그러면 어머니는 바로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 동냥 그릇을 들고 온 이에게는 밥과 찬을 담아주었고, 빈손으로 온 이에게는 윗방에 따로 상을 차려 대접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일까?
어른이 된 뒤로도 장일순ㆍ화순 형제는 집에 손님이 오면 밥부터 먼저 챙겼다. 결코 끼니를 거르게 하는 일이 없었다. (주석 2)

장일순은 원주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의 친구이고 독립운동가인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차강은 이 집안의 식객으로 한문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장일순의 일가를 이룬 서예와 그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배재학당 배재학당 박물관 ⓒ 김수종

1940년 봄 원주초등학교를 졸업한 장일순은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세례명 요한으로 영세를 받고 평생 천주교 신자로 활동한다. 서울로 유학하여 배재중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배재중고등학교의 모태가 되는 배재학당은 1885년(고종 22) 8월 5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셀러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현대식 중고등 교육기관이었다. 오늘날 배재 중ㆍ고등학교의 전신이다.

배재학당은 기독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해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ㆍ토론회 등을 열어 사상과 체육훈련에 힘을 쏟았다. 배재학당에는 별도로 인쇄시설을 갖췄는데 한국 현대식 인쇄시설의 시초이며 학생들은 협성회를 조직하고 학보를 발간하는 등 민중계몽에도 힘썼다.

장일순이 배재중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원주보통학교 출신 몇 명의 선배들이 있었기도 했지만, 서울을 내왕하던 할아버지의 개명된 교육의식의 소산이었다.

장일순은 서울 명륜동에 있는 집에서 배재중고등학교에 다녔다.
명륜동 집은 할아버지가 첫째 손자인 철순이가 워낙 똑똑해서 경성제국대학에 보내고자 지은 집이었다.

철순이 요절하자 할아버지는 남은 손자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며느리가 장남이 죽어서 원주에 묻혀 있는데, 원주를 떠날 수 없다고 하여 이사는 가지 못하고, 대신 작은 아버지 가족이 옮기고, 장일순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장일순의 초등학교 2년 후배이며 강원도 교육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김홍렬의 증언이다.

일순 형님은 1940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가서 배재중학교를 다녔어요. 여름방학 때 원주에 오면 우리 형님과 정자 뜰 소나무 밭에서 온종일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원주천에서 천렵도 했어요. 나는 주로 형님들 심부름을 했죠. 집에서 풍로와 냄비와 양념을 가져오면 형님들이 어죽탕을 맛있게 끓였어요. 배가 불러 셋이 솔밭에 누워 있으면 일순 형님이 서울 얘기를 들려주고, 만주에 있는 독립투사들의 활약상을 들려주었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우리 시조가 단군이라는 것을 일순 형님에게 처음 들었어요. 을지문덕ㆍ강감찬ㆍ이순신 장군 얘기도 처음 들었어요. 학교에서 일본어만 쓰게 하고 일본 역사만 배웠으니 우리 역사에 대해선 완전 깜깜이었던 거죠. 중학교 2학년 때 해방됐는데 태극기를 이때 처음 봤어요. 부끄러운 얘기죠. (주석 3)


주석
1> 앞의 책, 84~85쪽.
2> 앞의 책, 86쪽.
3> <일순 형님의 어릴적 별명은 '애어른'이었어요>, 김홍렬 선생 인터뷰, 대담진행 김찬수, <무위당 사람들>, 제65호(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제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2월 17일, 일 9:5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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