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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스페셜리포트
 
"In 1974, I left Korea because I didn't like" 020619
"한국이 싫어 1974년에 '탈조선'... 내 선택은 옳았다"
[파독 간호사 서의옥씨 스토리 ①] 평범했던 그를 액티비스트로 만든 사건들


(베를린=오마이뉴스) = 권은비 기자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일본 국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을 때부터 독일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 중 하나였다. 그후 윤이상, 임수경, 송두율, 그리고 최순실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도 켜켜이 쌓여있다. '권은비의 베를린 오 베를린'에서는 그 평범하고도 비범한 시간들을 전한다. 첫 순서는 파독 간호사 서의옥씨의 이야기다.[편집자말]


▲ 독일 베를린 자택에서 만난 서의옥씨. ⓒ 권은비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매 순간순간 한숨만 나오는 대한민국의 일상 속에서.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다른 나라에서 새 삶을 산다면!"

여기 스무살 의옥이 그러했다. 어릴 적부터 속으로 자기만의 소설을 쓰곤 했던 아이였다. 늘 남들과는 달랐고, 그래서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익숙했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지긋지긋했던 청년이었다. 그러던 그는 딱 스물한살이던 해에 독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때가 1974년 겨울이었다.

서의옥. 1953년생. 그는 파독간호사로 독일에 왔다. 이제는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독일에서 산 시간이 많은 나이가 되었다. 그를 그저 파독간호사로만 소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독일사람들은 그를 마음까지 치료해주는 마음치료사, 요리사, 그리고 액티비스트(activist)로 소개하곤 한다. 1990년에는 범민족대회에 참석하여 북한 곳곳을 누비기도 했다. 필자는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보낸 그의 비범한 시간들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박정희 괴로도당" 전단에 벌벌 떨었던 청년


▲ 19살의 간호학생이었을 때의 서의옥씨. ⓒ 서의옥

- 1974년 이른 나이에 독일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 생각에 불만이 많았다.(웃음) 독일에 왔을 때가 21살이었는데 염세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고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나이었다. 나에게는 한국이 너무 답답했다. 어른들의 억압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남녀차별이 너무 심했다. 당시에 '첫 손님으로 가게에 여자가 오면 재수없다, 거기에 안경 쓴 여자는 더 재수없다'고 했다.

어릴 때 친언니들 삶을 보면 완전히 노예였다. 저렇게 고생하려고 시집가나 싶었다. 시부모 노예, 남편 노예, 자식들 노예. 나는 지금도 그런 가족주의에 거부감이 있다. 그런데 그때 간호학교에 가면 독일로 일하러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다. 그저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늘 가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당시에 내가 외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파독간호사가 되는 것뿐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헬조선을 탈출하고 싶다고 하는 것처럼 그때의 나도 그랬다. 단순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외국에 나가서 좀 더 봉급수준이 높은 곳에서 일하고자 했다."

- 독일 베를린에 오기 전 '1967년 동백림 사건(박정희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간첩단 사건으로, 윤이상, 이응노 등 194명의 독일 유학생과 교민이 연루됨)'에 대해 알고 있었나?
"그때는 정치의식이 생길 때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그저 간호사 생활만 열심히 했다. 독일로 떠나기 전에 독일어 수업과 소양교육을 받았다. 1973년 서울 해외개발공사에서 3개월 정도 교육을 받았는데 말이 소양교육이지 내용은 반공교육이었다.

그곳에서 교육하는 사람이 독일에 가면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했었다. 한국 유학생들 중에서도 좌익 성향의 사람들은 피하라고, 그런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했었다. 그때 반공교육은 철저히 받고 왔다.(웃음) 그뿐만 아니라 1970년대 초반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계엄령선포 등이 진행되었고, 그때마다 우리는 글짓기를 했었다. 내용은 '왜 대통령 각하는 계엄령선포를 하셔야만 했나', 뭐 이런 것이었다.

어느 날 독일에 와서 간호사 기숙사에서 생활을 할 때였는데 기숙사 문 앞에 누군가가 몇 번 전단을 놓고 갔었다. 거기에 '박정희 괴로도당'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때 그걸 보고 너무 무서웠다. 출처가 어딘지도 안 쓰여 있었다. 몇 자 읽다가 무서워서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태워버렸다. 그런 것을 손에 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시대였다."

신문 몇 부가 바꿔놓은 삶


▲ 독일 베를린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던 21살의 모습 ⓒ 서의옥

- 원래 정치에 관심 없던 청년이 독일에서 한국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계기가 궁금하다.
"독일에 오니 귀도 트이고 눈도 뜨이더라. 그때 당시에 독일 언론은 한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하곤 했었다. 아무래도 동백림 사건 이후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걷다가 베를린의 카이저빌헬름교회 쪽 독일 '제3세계 가게(Dritte Welt Laden: 공정거래, 공정무역가게)'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 <해외한인보>라는 뉴욕에서 발행되는 신문이 있었다.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하다가 해직 기자가 돼 미국에 건너간 서정균 선생님이 만든 신문이었다. 한글 활자로 된 신문이 반가워서 몇 부 사와 정독했다. 그 신문에는 국내 상황에 대한, 한국에는 보도되지 않는 내용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 신문을 보니 독일 지사가 있더라. 그래서 독일 지사에 좀 더 알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다. 한국 민주화 현장도 더 알고 싶었다. 그러자 그쪽에서 '재독한국여성모임'을 소개해주었다. 그래서 그 모임 회원 중 한 명의 연락처를 받았고 그 모임에 가게 되었다."

- 그 모임에선 어떤 활동을 하게 되었나?
"이 여성모임에서 한국정세를 파악하게 됐다. 거부감 같은 것은 없었다. 당시 1970년대 한국의 탄압 구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 뒤로 정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일들이 터졌다. 당시 '인천 동일방직 똥물 사건'(1978년· 사측에서 사주한 남성이 노조 대의원 선거에 참여 중인 여성 노동자들에게 오물을 퍼부은 일)이 일어났다. 여성노동자들이 노조를 꾸리려다 구타당하고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그때 우리가 한국의 여성노동운동과 연대해서 기부금을 보내기도 하고 한국 여성노동의 실태에 대한 유인물을 만들기도 했다."

-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게다가 외국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면서 활동을 이어가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내 성격이 그렇다. 생각이 들면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린다.(웃음) 일이 끝나고 활동을 하더라도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고 재미있었다. 한국과 연대한다는 것, 외국에서 한국에 대해 자꾸 떠들어줘야 한국이 바뀐다고 생각했고 힘이 된다고 생각했다. 외국에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탄압을 받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당시 소문에 의하면 당시 베를린에 4명당 1명꼴로 프락치가 있었다고 했다. 나도 그 당시 활동을 하면서 감시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정보원들이 내게 접촉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들이 정보부 영사와 자리를 만들어서 만나자는 제의를 늘 했었다.

이 뒤에 유럽민협(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이라는 단체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러다 2000년에 재독여성모임은 그만두고 한민족유럽연대라는 단체에서 활동했다. 이 모임들은 독일에 있는 교민들이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만든 조직들이었다. 그렇게 독일에서 한국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해보니까 너무 좋더라. 1970년대 후반 한국이었다면 마음대로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없던 시절이었는데도 여성, 농민, 노동자 문제에 대해 속시원히 토론할 수 있었다."

독일 기자가 전달한 '80년 광주'... "교민들은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 힌츠페터가 기록한 광주의 진실은, 곧바로 독일 제1공영방송을 통해 전세계로 전해졌다. 그의 보도를 접한 여러 외신 기자들도 광주로 향해 진실을 기록했다. 이 소식을 접한 독일 교민들은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소식을 알렸다. ⓒ KBS

-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을 때, 외신에 이 소식을 최초로 전달한 게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였다. 당시 독일뉴스에서 광주에 대한 보도를 보았나?
"한국 안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여기 베를린 교포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그때 사람들이 베를린자유대학에 모여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당시 유학생들은 베를린 카이저빌헬름 교회 앞에서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광주의 상황을 알려야 하니까 자발적으로 유인물을 제작해서 배포했다. 그때는 복사 비용도 비싸고 복사를 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는데 제3세계와 연대하는 독일 NGO단체에 등사기가 있었다. 그걸로 쉬지 않고 등사를 해서 배포했다."

- 당시 독일 한인들의 분투는 한국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말 미친듯이 운동했다. 곳곳에 유인물을 붙였다. 그런데 한국식품점이나 음식점들이 광주에 대한 유인물을 못 붙이게 하더라. 한국인 사장들은 자신들이 언제 공관의 타깃이 될지 몰라 불안해했다. 그때 한국의 명동 격인 베를린 쿠담거리에서 600여 명이 나와서 집회를 했다. 당시 독일에서 있었던 한인시위 중 최대 규모였던 것 같다. 우리는 행진하면서 '독재 타도', '물러나라 전두환', '카터, 카터, 지미 카터! 지원말라! 군사독재!'라고 외쳤다. 나 역시 아이들을 둘러업고 시위에 참가했다."

독일은 그런 곳이었다. 한국의 독재정권으로 국민들이 입과 눈을 닫아야 했던 때 사회에 관심 없던 21살의 청년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한 곳.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서슬 퍼런 탄압에 대해 한국의 국민들은 그저 폭동으로만 알고 있었을 때 머나먼 타지 베를린에서는 '독재 타도', '물러나라 전두환'이 울려 퍼질 수 있었다.

그러다 1989년, 독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세계는 냉전의 종말을 선언했고 독일은 격변의 시기를 맞이했다. 베를린 사람들이 통일의 열기에 흠뻑 취해 있을 때, 한국 교민들은 자국의 분단이 더욱 더 아프게 느껴졌다. 21살에 독일로 떠나온 의옥은 어느덧 36살의,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교민들과 통일운동을 벌인 그는 결국 '평양'에 도착한다. [*2화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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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짐: 2019년 2월 08일, 금 10:5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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