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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Jang Ilsoon biography3 020619
부농의 아들, 비범한 선대
[무위당 장일순평전 3회] 지주가족이었음에도 전쟁통에 무사했던 이유



▲ 장일순의 가족 사진 1940년대에 찍은 가족사진, 장일순은 서울에 유학 가 있어 이 사진에는 없다. ⓒ 무위당 사람들 제공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지 18년째 되던 1928년 9월 3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406번지에서 한 생명이 태어났다. 인간에게 출생의 시기와 장소는 타의의 산물이지만 감당은 순전히 자신의 몫이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잔혹한 세월만큼이나 효박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불운한 세대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체제가 완벽하게 굳혀지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탄압과 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일제가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부터 조선 천지는 거대한 인육시장이 되었다.

징용ㆍ징병ㆍ위안부 등 각종 명목을 붙여 이땅의 청장년들을 침략전선으로 끌어가고, 자원이라고 이름붙은 모든 쇠붙이를 일본으로 반출했다. 그리고 해방과 분단, 6ㆍ25 동족상잔과 이승만ㆍ박정희 독재시대를 거쳤다. 광기의 시대에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신산한 삶을 살아야 했다.

장일순은 아버지 장복흥(張福興)과 어머니 김복희(金福姬) 사이에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 철순이 열다섯 나이에 사망하여 일순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아버지는 원주초등학교와 원주농업고등학교 설립에 토지를 기증하는 등 교육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열의를 보였다. 큰 사찰의 시주(侍主)였다가 천주교로 개종하고 충실한 신자가 되었다.

장일순의 부모는 원주에서 3번째로 부유한, 시골에서는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이었다. 집은 500평 정도의 부지에 안채는 기와집이고 사랑채는 초가집이었다.


▲ 장일순 선생 내외 1991년 자택에서 ⓒ 무위당 사람들 제공

장일순의 둘째 동생 장화순의 증언이다.

사랑채는 큰 방이 2개 있었고 가운데 마루가 길게 있었고 방 하나는 할아버지가 쓰셨고 하나는 외지에서 온 손님, 말하자면 식객들이 오시면 묵어가는 방이었어요. 식객들이 묵어가는 방은 내 기억으로 거의 비는 날이 없었어요. 어떤 분들은 이틀 사흘 묵어가기도 했어요. 손님이 주무시는 방이 굉장히 컸어요. 벽장도 있었고, 방 두 배 크기의 마루가 있었고 마루 반대편에 할아버지방이 있었지요. 어머니가 부엌일을 하셨지만 어머니 밑에 밥을 하시는 분이 두 분 계셨어요. 이 분들이 밥을 해서 손님 대접을 했어요. 사랑채로 들어오는 문은 늘 열려있었어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사랑손님이 끊이지 않았어요. (주석 1)

장일순의 할아버지 여운(旅雲) 장경호(張慶浩)는 포목상을 하면서 집안 살림을 크게 일궜다. 본점은 원주에 두고 서울까지 다니면서 장사를 하였다. 남은 돈으로 원주시내 곳곳에 농지를 샀다. 그리고 지주가 되었다. 장일순이 첫째가는 스승으로 여긴 할아버지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찍부터 서울을 내왕하면서 문물을 익히고 독립운동가들과도 교우하였다.

잊혀지지 않는 일은 형이 한분 있었는데 열다섯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어. 형의 상여가 나가는데 할아버지가 상여를 향해 큰절을 하시더란 말이여. 부모를 두고 먼저 가는 사람은 불효막심이라 하는데도 말야!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에게 "왜 나이 어린 손자에게 큰절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네 형이 내 손자였지만 저승에는 먼저 갔으니 거기서는 내 어른이다"라는 거여. 그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것은 인격. 물격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을 어려서부터 심어주려는 그분의 뜻이었어. (주석 2)

장일순과 같은 특별한 인격체가 형성되기에는 가정이라는 거푸집의 '가격(家格)'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약간 긴 내용이지만 소개한다.

둘째 아들 장화순의 회고이다.

할아버지 땅과 가게를 경영하셨어요. 할아버지가 가게를 그만 두신 뒤로는 소작인들에게 준 토지를 경영하셨어요. 아버지는 착하신 분이셨어요. 돈을 꿔주고 이자를 받기도 하셨는데 돈을 갚지 못하면 절대 독촉을 하지 않으시고, 형편상 갚지 못하면 그냥 내버려두셨다고 해요. 소작인들이 도지 가져오는 것도 독촉하지 않으셨어요. 가져오는 대로 받고, 옛날에는 지주가 소작인들이 벼 심고, 밭을 부칠 때 자주 가서 봤거든요. 벼가 여물 때 가서 낱을 세보고 이 논에서 얼마가 수확되겠다고 짐작을 하는 거죠. 내가 어려서 보니까 소작인들이 아버지에게 농사짓기 전이나 추수하기 전에 땅을 보수해서 가져오는 대로 도지를 받으셨어요. 그저 지적도를 보고 우리 땅이 어디어디 있다는 정도만 알고 계셨어요.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셨다고 해요. 논에 모를 심고 추수할 때 절대 가보지 않으셨어요. 소작인들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엄청 존경했어요. 그러니까 6ㆍ25 때 평원동이 폭격을 당했는데 우리 집이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어요. 다행히 가족들 피해는 없었지만 우리 가족들은 피란을 못 갔어요. 인공치하에 있을 때 소작인들이 서로 자기 집에 와서 숨어 있으라고 해서 우리는 피난생활을 소작인들 집을 옮겨 다니면서 했어요.

귀래, 만종, 소포면의 소작인 집에 가족들이 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 때거리로 가서 신세를 졌어요. 한 달씩 소작인 집을 옮겨 다니면서 피란생활을 했어요. 공산치하에서도 지주 가족이 무사한 집은 우리 집 뿐이었어요.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일순 형님은 죽을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요.
(주석 3)

주석
1> <무위당선생 둘째 동생 장화순선생 인터뷰>, '무위당 사람들' 제공.
2> 최성현, <좁쌀 한 알, 장일순>, 92~93쪽, 도솔, 2009.
3> 앞의 책, 102쪽.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2월 08일, 금 10:3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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