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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YS critical biography 112818
평시작전권 회수 국군의 숙원풀어
[김영삼 평전 100] 국정수행 성취와 좌절



▲ 평시작전권 회수를 주장하는 시위대.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지나친 언론홍보정책, 세무조사 덮어

정치인치고 언론보도에 관심이 없을 수 없지만 YS처럼 관심이 많은 사람도 흔치 않았다.

그는 항상 언론의 중심에 서고자 했고 언론(인)을 잘 관리했다. 언론계에 ‘YS장학생’ 그룹이 존재할만큼 우호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만큼 ‘촌지’도 많이 뿌리고 액수도 적지 않았다. 유럽을 순방한 어느 때는 140여 명의 한국기자가 따라붙었다고 한다.

김영삼의 유럽 순방 중 프랑스에서 취재한 한국 기자는 1백40여명이었는데, 이는 프랑스 기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경우,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따라붙는 기자는 20명 안팎이라고 하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국 취재진의 엄청난 규모는 코펜하겐의 ‘유엔 사회개발 정상회의’에서도 다른 나라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 취재진 1백40여 명은 미국 30여 명, 일본 20여 명, 프랑스 10여 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규모였거니와, 주최국인 덴마크의 취재기자보다 많은 수였다. (주석 8)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 대통령의 해외순방시에 현지 언론은 거의 외면하는 데 반해 국내에서만 요란법석을 떠는 것은 요즘은 더하지만, YS의 경우도 심했다. 1995년 봄 YS가 프랑스 방문 때 한 취재기자의 증언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현지 언론의 이런 무관심이나 냉대를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필자의 이런 분석에 대해 “정통성이 없던 정권이나 현지 언론의 보도에 신경 쓰고 안달하지 우리 문민정권은 그런데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장관·청와대비서진·현지 대사관원·정보기관원 등 순방 업무에 관련돼 있는 모든 사람들은 국내 언론, 특히 TV보도에는 지나칠 만큼 신경을 쓰고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그들은 김대통령의 방불을 국내 TV들이 오랫동안 화려하게 보도했다는 사실에 고무, 도취돼 있을 뿐 프랑스 방송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국내 행사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들 정도였다. (주석 9)

YS와 국내언론과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특히 <조선일보>와는 우호적 관계를 넘어 ‘유착관계’라는 평이 언론계에 나돌았다. 이 신문의 편집국장 출신 논설위원을 청와대 정무ㆍ공보수석에 이어 정무장관에 앉히고, 퇴임 후에는 이 신문사에서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YS는 재임기에 언론사 세무조사를 하고도 덮어두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30년 동안 누구보다 언론을 몸으로 느껴 왔기 때문에 언론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데다 언론계와의 인간 관계 또한 두터워서 물리적으로 손을 대는 데는 그 한계가 미리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문민 정부 시대의 언론은 한 번의 세무 조사 이외엔 수난이라 할 만한 수난은 겪은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행정ㆍ입법ㆍ사법의 3부에 이어 제4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주석 10)

평시작전권 회수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적인 현안의 하나이고 자존심이며, 국군의 오랜 숙원이던 평시작전통제권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1994년 12월 1일이다. 하지만 전시작전통제권은 여전히 회수하지 못한 상태이고, 민주정부에 의해 환수 일정까지 잡혀 있던 것을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가 무기연기함으로써 YS가 평작권을 회수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작권은 미군에 속해 있다.

1980년대에 주한 미군의 감축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한·미 양국은 이에 대비해 1992년부터 미군 장성이 맡아 오던 지상구성군 사령관을 한국군 대장이 맡고, 신설된 한·미 연합 해병대사령부의 평시 사령관에 한국군 사령관을 임명하는 등 단계적인 기초 작업을 해왔다. 이어 1992년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때 1994년 말까지 평시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환수키로 합의, 1993년 SCM에서 환수 일자를 1994년 12월 1일로 확정했으며, 1994년 10월 제26차 SCM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환수 조치를 최종 확인했다. (주석 11)

이승만은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대한민국 육해공군 지휘권 이양에 관한 공한>을 통해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이양했다. 아무리 전시라지만 기한도 명시하지 않은 채 군지휘권을 외국군사령관에게 이양한 것이다. 다음은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낸 공한이다.

대한민국을 위한 국제연합의 공동 군사노력에 있어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작전 중인 국제연합의 육ㆍ해ㆍ공군의 모든 부대는 귀하의 통솔하에 있으며 또한 귀하는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음에 감하여 본인은 현 작전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오며, 여사한 지휘권은 귀하 자신 또는 귀하가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행사하도록 위임한 기타 사령관이 행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또한 한국 국민과 정부도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으로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국토의 독립과 보전에 대한 비열한 공산 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합친 국제연합의 모든 군사권을 받고 있는 귀하의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또한 격려되는 바입니다.

귀하에게 심후하고도 따뜻한 개인적인 경의를 표하나이다.

1950년 7월 15일 이승만
(주석 12)

YS는 평시작전통제권의 환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냉전체제 이후 국지적 분쟁에서 보듯 국가 안보의 궁극적 책임은 당사국에 있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우리의 작전권은 우리가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작전권이 미국측으로부터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넘어온다는 것은 우리 군이 자주적 국방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군에 대한 최고 통수권자의 입지를 확실히 회수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중요했다. (주석 13)

<주석>
8> 강준만, <김영삼이데올로기>, 237쪽, 인물과사상사, 1995.
9> 김기만, , <신동아>, 1995년 4월호.
10> 주돈식, 앞의 책, 162쪽.
11> 김영삼, 앞의 책, 369쪽.
12> 김삼웅, <독부 이승만평전>, 259쪽, 책보세, 2012.
13> 김영삼, 앞의 책, 370쪽.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11월 30일, 금 7:1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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