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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YS critical biography 111418
한반도위기 상황 간신히 수습
[김영삼 평전 98] 국정수행 성취와 좌절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1월 11일 국민화합 조치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최규하ㆍ전두환ㆍ노태우 전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했다. YS가 전직 대통령들의 국정협조를 요청하자 이들은 대통령의 개혁·경제회복 추진을 지지한다고 답하면서 청와대 초청에 감사했다.

YS는 임기 동안 깨끗하고 당당하게 일할 것임을 밝히고 국민의 ‘의식변화’에 전직 대통령들이 동참해 줄 것과 ‘전ㆍ노 불화설’에 관해 세간에서 말이 많은 데 두 분이 화합할 것을 당부했다.

“이번 회동의 배경에는 불행했던 과거사의 봉합, 나라 안팎으로 처한 어려움 외에 김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계산이 잘려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김 대통령으로서는 지난 10개월간 개혁사정의 과거청산을 통해 자신을 도왔던 두 전직대통령 측과 소원해졌고, 이에 따른 정치적 부담이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야당으로부터 개혁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이번 회동을 추진한 것은 실보다 득이 많다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주석 1)

YS와 전ㆍ노의 관계는 익히 알려진 대로이다. 전두환과는 악연뿐이지만 노태우와는 달랐다. 비록 13대 대선에서는 그에게 패배했으나 1990년 1월 그가 총재로 있던 민정당과 3당합당을 통해 민자당을 창당하고 당대표에 이어 대선후보가 되어 대권을 쥘만큼 은원의 관계였다.

또 1년여 후 전ㆍ노의 천문학적 비자금이 들통나면서 두 사람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1994년 신년초에 청와대에서 전현직 대통령 넷이 모여 화기애애하게 오찬을 나눌 때는 아무도 향후 전개될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인간사(역사)는 흥미롭다.

1994년 6월은 6ㆍ25한국전쟁 이래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하마터면 미국이 북한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고 북한이 보복전으로 나온다면 한반도는 상상하기 어려운 살상ㆍ파괴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IAEA와 북한의 핵협상이 결렬되면서 미 행정부는 물론 미국민의 여론은 북한이 국제사찰을 계속 거부할 경우 북한 핵 시설을 폭격하는 것을 지지한 것으로 유력 언론이 연일 보도했다.

6월 중순에는 주한 미군 가족과 민간인 그리고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킨다는 정보가 YS에게 보고되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대통령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안보 즉 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전쟁을 방지하는 일이다.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었다.

YS는 6월 16일 레이니 주한 미대사를 청와대로 불렀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본국에 대통령의 말을 전달해달라고 일렀다. 레이니의 보고를 받은 클린턴 대통령이 다음날 새벽 핫라인을 통해 전화를 걸어왔다.

"클린턴 대통령. 이게 말이 됩니까.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상 우리 60만 군대는 한 명도 못움직입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남북에서 군인과 민간인이 수없이 죽고 경제는 완전히 파탄나며 외국 자본도 다 빠져나가게 돼요.

당신들이야 비행기로 공습하면 되지만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에서 남한의 주요 도시를 일제히 포격할 겁니다. 우리가 6ㆍ25 때 수없이 죽었는데 지금은 무기도 훨씬 강력해졌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나는 우리 역사와 국민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소."
(주석 2)

카터의 남북정상회담 주선


▲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난 카터 전 미국 대통령

한반도 위기는 카터 전대통령이 비록 개인자격의 신분이지만, 방북으로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나갔다. 카터는 방북에 앞서 서울에 들러 YS와 만난 다음 6월 17일 대동강 요트 선상에서 김일성과 회담했다. 카터는 미국의 대북제재 중단, 3단계 북미회담재개, 경수로 제공 등의 의사를 전하고 김일성은 NPT복귀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밝혔다고 미국 CNN 방송이 전했다.

판문점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 카터는 김일성이 김영삼과 남북정삼회담을 갖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카터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김영삼 대통령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에 김일성이 정상회담을 제안했다고 한다. YS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남북정상회담의 소식은 곧 국내외에 큰 뉴스로 전해지고, 6월 28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예비접촉을 통해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을 갖고 필요하면 체류 일정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데도 뜻을 모았다.

YS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데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준비를 서둘렀다. 회담에서 다룰 의제를 준비하고 김주석에 관한 정보기관의 자료도 챙겼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전 <워싱턴포스트> 기자 돈 오버더퍼의 기록이다.

김대통령은 1국가 2체제를 주장하는 김일성의 ‘연방제 통일방안’ 대신 먼저 이산가족 교환방문, 서신교환, 상대국가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접근 공유 같은 점진적 조치를 통해 화해를 적극 추진하자고 제의할 방침이었다.

그동안 북한의 극단주의적 자세는 남한의 점진주의적인 입장과 자주 충돌을 빚어왔다. 그러나 김영삼은 한반도 내에서 무력 충돌 가능성이 부각됐던 최근의 위기사태 때 김일성이 보여준 적극성을 감안할 때 이 합의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 (주석 3)

김영삼은 정상회담에서 내놓을 ‘선물 보따리’를 준비시켰다. 오버더퍼에 따르면 쌀 50만 톤을 북한에 지원하기로 하고, 이에 김일성은 직접 묘향산의 여름별장을 찾아 YS가 머물 숙소까지 점검했다고 한다.

김영삼은 남북한 간의 역사적이고 오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회담으로 불충분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번 회담을 시초로 삼아 연속적인 정상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안하기로 했다. 또 이를 위해 북한 주민들에게 쌀 50만t을 지원한다는 ‘깜짝 선물’도 준비해놓았다. 그것은 기존 북한이 남한 기업인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요청한 10만 내지 20만t의 두 배를 넘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김일성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7월 6일 오전 경제부장들과의 회의를 마친 김일성은 그날 오후 여름날의 무더위를 피해 평양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묘향산의 여름 별장으로 떠났다. 김일성이 가장 좋아하는 이 별장은 송림 한가운데 깊숙이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져 경비가 철통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가령 일본 국회의원 가네마루 신처럼 김일성이 특별히 환대하고 싶은 귀빈들만 묵게 하는 곳이었는데 그는 김대통령의 대접 장소로도 이곳을 선택했다. (주석 4)

<주석>
1> <전현 대통령들의 한자리>, <동아일보>, 1994년 1월 11일치 사설.
2> 김영삼, 앞의 책, 317쪽.
3> 돈 오버더터, 이종길 역, , 494쪽, 길산, 2002.
4> 앞과 같음.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11월 16일, 금 11:1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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