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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The road to God 102418
하나님께로 가는 길
[호산나 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구원의 이야기는 사람이 고향을 떠날 때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서의 믿음의 영웅들의 중심에 서있다. 그리고 순종의 두 행동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다. 그는 무수히 많은 후손의 약속을 받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할 때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문화의 중심지인, 세상의 중심을 떠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는 그가 가고 있는 곳을, 혹은 왜 그런지에 대한 어떤 자세한 설명도, 모른 채 단지 그것이 명령이라는 사실에 의해 떠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가 알았던 유일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에게 후손을 약속하셨고, 그가 늙었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이상한 약속이었다."
-하워드 요더, 진정한 성도의 교제-

이 글에서 보듯이 성서는 믿음을 여정으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성서는 하나님의 벗(약2:23) 혹은 예수님의 친구(요15:15)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의 이삭의 사건을 통해 그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준 후에 예수님의 친구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에는 방해꾼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가 그들을 장사꾼으로 묘사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좋은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장사꾼들에게 정신을 빼앗겨 목적지에 대한 의식 자체를 잃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을 유영모 선생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무슨 신비(神秘), 무슨 신학(神學), 무슨 철학 이라면서 떠들지만 거기에 홀리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 쉬었으면 툭툭 털고 나서는 것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내가 서 있는 위치는 태양의 발바닥 같은 곳이라 여기를 뚫고 세차게 올라가야 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적인 체험이나 신비, 혹은 신학이나 철학과 같은 사변이 이 여정에서 장사꾼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영적인 체험이나, 은사, 능력, 그리고 신비주의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수준이 낮은 도덕적인 함정에 빠지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로렌스 수사, 아빌라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권정생과 같은 학식이 많지 않은 소박하고 단순한 분들에게서 깊은 영성을 보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분들은 유영모 선생의 말처럼 태양의 발바닥 같은 곳을 뚫고 세차게 올라가서 목적지에 다다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 하나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얼을 아는 것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10:27-28)

하나님의 벗이 되는 것과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의 알짬은 아는 것입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알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는 단순히 지적인 앎이 아니라 체험과 행함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동사는 부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믿음의 여정의 목적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할 것은 이 사람도 아무도 못 만나고 갔구나, 나도 누구 하난 못 만나고 갈 건가? 하는 생각입니다. 서로의 속알(얼)을 내놓는 것같이 좋은 일이 없습니다. 同志라는 것은 서로의 속알을 내놓는 것입니다. 얼골(굴)은 얼의 골짜기라는 뜻인데 얼굴 속의 얼을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남의 얼은 못 보고 그저 가긴가요. 알아주는 사람을 하나도 못 만나고 그저 왔다 간단 말입니까? 남의 속알(얼)을 알아주려면 먼저 제 속의 속알을 알아야 합니다. 제 속알을 알아야 남의 속알도 알 수 있습니다."

유영모 선생의 말입니다. 그의 말에서 우리는 안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서로의 속알을 알아야 비로소 상대방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을 알아야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얼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이 일은 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속알(얼)을 알려면 먼저 제 속의 속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걷는 것은 바로 제 속의 속알을 알고 하나님의 얼을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의미 있는 것은 이 과정이 바로 진리를 향한 여정이며 진리를 알아 자유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치 이미 말고 있는 것처럼 가볍게 취급합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이처럼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최소 40년 이상 10번의 시험에 실패해야 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3년 기간이지만 그들은 그 기간 동안 수도 없이 넘어져야 했고 쓰라린 절망의 나락을 거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과 예수님의 얼을 알기 위해 그들은 그토록 혹독한 믿음의 여정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벧후1:4 참조) 그러나 그것은 비단 그들만의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좇고자 하는 사람들, 진리의 여정을 지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혹독하게 경험해야 하는 앎의 과정입니다.

외로움

그 길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바로 외로움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자기가 된 정도 이상으로 남을 알아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못하여도 서운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논어 학이편)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알아듣기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 중 하나가 "군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군자가 아니면 군자를 알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따라서 군자는 곧 부처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과 같이 절대 고독의 체험이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유영모 선생과 같이 스스로 정통을 주장하는 이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정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학이라는 태양의 발바닥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벗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벗이라는 주장은 아니지만, 기독교 역사 속에서 기인이나 신비가로 알려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통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군자는 군자가 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부처는 부처가 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노자를 알아준 이는 장자입니다. 그 장자가 "만세(萬世) 뒤에라도 대성인을 만나 내 말을 알아준다면 이것은 아침저녁으로 만난 것과 같다."(장자 '제물론)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시공을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리의 길인 믿음의 여정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 고독의 자리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절규는 바로 이 고독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절대 고독에 이를 때까지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을 지나야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벗, 그리스도의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보았듯이 기독교 정당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주님을 부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모습은 오히려 바알의 제사장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만일 믿음의 여정에서 외로운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에게 사도 바울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마지막 죽음을 기다리며 했던 사도 바울의 이 말 역시 외로움이 주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의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 믿음을 지키는 하나님의 벗, 예수의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올려짐: 2018년 11월 02일, 금 11:0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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