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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YS critical biography 1010118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
[김영삼 평전 94] 전광석화식의 국정개혁



▲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 눈빛출판사 제공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은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대선과정에서 DJ나 정주영을 지지했던 국민들도 예상보다 훨씬 신속과감한 YS의 개혁에 지지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국민들은 정부수립 이래 모처럼 정부다운 정부를 갖게 되고 문민정부의 소중한 가치에 보람을 느꼈다.

YS의 개혁 순서는 ‘역사 바로 세우기’로 이어졌다. 이 작업은 국무총리로 영입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김준엽 전고려대학 총장을 청와대 조찬에 초청하여 자문을 받은 것이 큰 줄기가 되었다. 그는 중앙청 청사로 쓰고 있는 조선총독부 건물과 해외에 묻혀 있는 애국선열들의 유해봉환 등을 건의했다.

YS는 4ㆍ19혁명 33주년을 맞아 수유리 4ㆍ19묘역을 참배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이승만 독재를 타도한 4ㆍ19혁명은 ‘박정희 헌법’에 의해 ‘의거’로 격하된 이래군부정권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4ㆍ19묘역을 방문한 YS는 관계자들에게 전 묘역을 재단장하고 성역화하도록 지시하고 4월혁명의 역사적 평가와 더불어 초ㆍ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 바르게 기술,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령의 개정을 서둘렀다. 그리고 4ㆍ19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시켰다.

5ㆍ18광주항쟁일을 맞아 ‘5ㆍ18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담화’를 통해 망월동 묘역의 성역화, 사망자ㆍ부상자ㆍ행불자의 재신고 기회부여, 학살책임 진상규명 등을 제시했다. 또 12ㆍ12사태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적 사건’이라고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6월에는 6월항쟁과 부마민주화운동의 재평가 작업을 밝히고 6월항쟁을 ‘명예혁명’이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YS는 8월 13일 광복 48주년을 앞두고 “민족 자존심과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을 조속히 해체하고 문화 민족으로서의 긍지에 합당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 건립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총독부 건물이 폭파 해체되었다.

이와 관련 일부에서는 해체보다는 보존하면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었으나 당시 국민 다수의 여론은 철거에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관광객들이 총독부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등 국민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는 사례가 빈발했다.

YS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독립유공자를 많이 발굴하여 유공자로 서훈을 하고, 8월 5일 그동안 해외에 방치된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 박은식ㆍ노백린ㆍ김인전ㆍ신규식ㆍ안태국 선생의 유해를 발굴봉환하여 국립묘지에 새로 조성된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하였다.

YS는 애국선열 유해 봉환에 즈음한 담화를 발표, “상해 임정 요인의 유해를 우리 땅에 모셔온 것은 우리나라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는 것”이라고 하고 “정부는 유해를 모셔 국민 제전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 것을 참으로 뜻깊게 생각하며, 커다란 자부와 긍지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분들은 망국의 한을 품고 풍찬노숙하면서 나라를 찾으려 하셨고, 그 과정에서 쓰러져 이국의 땅에 묻혔으나 생전의 한결같은 소망은 독립된 본국에 돌아와 영광의 입성식(入城式)을 한 뒤에 죽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이제나마 조국에 유해를 모시게 되었으니 저 세상에서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역설했다.

YS는 또 정부는 아직 봉환되지 못한 애국선열 87위의 유해 봉환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그분들과 그 가족들의 못다한 한을 풀어드리고 항일 독립운동의 민족정기를 계승ㆍ발양시켜 나가고자 한다” 밝혔다.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YS의 개혁과제 중에서 국민생활과 국가경제에 직간접적으로 가장 많이 영향을 미친 것은 금융실명제의 전격 실시였다.

재계와 언론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금융실명제가 실시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으나 그처럼 빨리 전격적으로 실시할 지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하나회 척결 등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전광석화식으로 단행되었다.

김영삼은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특별담화를 통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 경제 명령권’을 발동한다고 발표했다. 5공의 ‘장영자ㆍ이철희사건’ 이래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실명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독재권력과 ‘정경유착’으로 실시가 지연되었다가 YS에 의해 전격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날 오후 8시 이후 은행ㆍ증권ㆍ보험ㆍ농협ㆍ우체국ㆍ새마을금고 등 모든 예ㆍ적금 통장과 주식ㆍ자기앞수표ㆍ양도성예금증서(CD)ㆍ채권의 발행ㆍ이자의 지급과 상환은 반드시 실명으로 하게 되었다.

그동안 비실명 금융거래는 부정축재자금, 부동산투기자금, 부유층의 탈세자금, 범죄조직 자금, 뇌물수수자금 등의 온상이 되었다. 국가가 합법적으로 불법을 용인해 온 것이다. YS는 은밀히 금융실명제를 추진했다. 이경식 부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통상적인 입법절차를 밟아서는 기득권층의 반발과 금융시장의 동요 등으로 제대로 된 실명제가 어려우니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하기로 지침을 주었다. 헌법 제76조의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근거로 삼았다.

가명ㆍ차명거래가 뇌물 수수와 부동산 투기 자금의 도피처로만 이용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 부유층에서 탈세를 목적으로 남의 이름을 이용하여 예금 계좌를 개설하는 일이 빈번했고, 결과적으로 정부도 소득과 부의 주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적절하게 세금을 부과할 수 없었다.

실명제 실시 직전인 1993년 8월 말 현재 가명ㆍ차명 계좌의 자금이 약 33조 원으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금융 자산 3백 30조 원의 10%, 총통화 1백조 원의 약 33%에 이르는 규모였다. 이렇게 막대한 자금이 세무 당국의 그물망을 피해 증식을 계속해 나감에 따라 소득과 세 부담의 불균형 문제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주석 14)

YS는 제2의 경제도약과 깨끗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정부패의 척결과 투명한 금융질서가 중요하다고 판단. 금융실명제를 강행했다. 재계와 정치권에 미친 충격과 파동이 엄청났다. 대놓고 반대하거나 거부하지는 못했으나 기득권층은 앙앙불락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절대다수(87.1%)가 지지한 것으로 갤럽여론조사에서 나타났다. 반대는 3.3%에 불과했다. 경제외적인 효과도 적지않았다.

1993년 말 현재 실명 계좌의 실명 확인율은 87.3%, 가명 계좌의 실명 전환도 97.6%에 이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금융실명제 실시로 인해 우리 사회는 경제정의의 틀을 구축하게 되었다. 실명 거래로 세원(稅源)이 투명해짐에 따라 일반 국민들이 부담하던 이자 소득세는 대폭 낮춰졌다. 기업들의 정치자금 부담도 한결 가벼워졌다. 시행 2년 만인 1995년 노태우ㆍ전두환의 천문학적 부정축재 자금이 드러난 것도 금융실명제가 거둔 성과였다. (주석 15)

<주석>
13> 앞의 책, 158쪽.
14> 앞의 책, 166쪽.
15> 앞의 책, 176쪽.
 
 

올려짐: 2018년 10월 12일, 금 4:5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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