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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Beyond hatred and idolization for pastors 092618
목사 혐오와 우상화를 넘어
[정신실의 신앙 사춘기] 종교 중독, 영적 학대에서 벗어나려면


(서울=뉴스앤조이) 정신실(작가) = 누구나 마음에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쯤 품고 있다, 신앙의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 고개만 들면 보이는 등대 같은 목사님 한 분 정도는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정반대인 것 같다. 자기감정에 솔직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혐오하는 목사 한 명쯤을 품고 있다. 뉴스를 통해, 지인의 경험을 통해 어느 목사의 범죄나 범죄에 가까운 행적을 알게 된다. 목사가 그럴 수 있나, 분노한다.

단 한 번 들어 본 설교에서 삯군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 목사의 얼굴을 한 사기꾼은 한 번의 만남으로도 불결한 여운을 오래 남긴다. 직접 관계를 맺는 경우는 더욱 어렵고 슬프다. 지난 주일에도 설교를 들었고, 당장 이번 주일에도 설교를 들어야 하는데 그 목사를 향한 감정이 불신뿐이라면 얼마나 슬픈가. 더욱이 한때 존경했고, 최선을 다해 도왔던 한 목사가 성폭력범이거나 헌금을 횡령한 범죄자임이 드러났다면 또 어떤가. 목사의 범죄나 치명적 인격 결함은 한 사람의 신앙인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직접 겪었든, 한 발 떨어져 간접 경험을 했든, 크든 작든 목사 혐오는 시대의 문제인 것 같다. 교회에 실망하여 떠난 사람에게 '교회'란 대부분 구체적인 '목회자' 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두세 사람이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늘 함께 씹어 줄 목사가 있다. 심지어 목사 두세 사람의 대화에서도 목사 혐오거리는 풍성하다. 이렇듯 너도 나도 자질이 부족한 목사로 상처받았고, 교회를 떠나왔는데 과연 여기가 끝일까. 목사다운 목사는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소망 없는 목사들은 죄 혐오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가던 길 계속 가면 되는 것일까. 계속 갈 수는 있을까.

'목사들'의 문제를 쓰레기통이든 골목 으슥한 곳이든, 어디든 갖다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손 탁탁 털고 내 갈 길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냄새나고 역겨운 이 보따리를 내려놓지 못하고 오래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목사, 남편 목사, 동생 목사를 둔 목사의 가족이라서 그럴까. 그럴 수도 있다. 신나게 돌 던져 봐야 결국 그 돌 맞는 목사들은 내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보따리 속에서 내게 좋은 목사들만 깔끔하게 골라낸다면 이 보따리를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을까. 아니 그것만도 아니다.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악취가 어쩐지 익숙하여 찜찜하다. 그러니까 이 보따리를 풀어헤쳐 보아야 한다. 익숙한 냄새의 근원을 찾아내서 털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분노에 겨운 목사 혐오를 끌어안고 끝없는 비난의 돌무더기를 쌓고 앉아서 신앙의 여정을 계속 갈 수가 없었다.

심리학에 '투사(projection)'라는 개념이 있다. 노트북에 저장된 이미지나 영상을 프로젝터(projector)를 통해서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 심리학에서 투사란 스크린에 뜬 이미지가 컴퓨터 아닌 스크린에 있다고 믿는 심리 현상이다. 즉, 부정적인 것은 자기 마음(컴퓨터)에 있는데 자기 속에 있는 줄 모르고 밖의 타인(스크린)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미워도 너무 미운 사람, 견딜 수 없는 지속적 분노와 같이 강렬한 감정은 투사이다. '뭐 눈에 뭐만 보인다'는 말이 딱이다. 내가 사로잡힌 그것만 눈에 보이는데, 자기 내면의 작용을 알아채지 못하고 문제의 핵심이 외부에 있다고 치부하는 것이다. 리처드 로어의 <내 안에 접힌 날개>에는 투사의 개념을 잘 설명하는 이야기 하나가 나온다. 폴 와츠라이크(Paul Watzlawick)의 '망치 이야기'인데, 살짝 각색해 보면 이렇다.

어떤 여자가 그림 한 점을 벽에 걸려고 하는데 망치가 없다. 망치를 빌리러 이웃집에 가야지 싶다. 어쩌면 이웃집 사람이 망치를 빌려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저녁 아파트 앞에서 만났을 때 급히 인사만 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내게 안 좋은 감정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함께 커피 마시며 얘기 나누던 중 불편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여자에 대한 반감이 커진다. '그래, 나한테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내가 잘못한 게 있어?' 점점 분노가 커진다. 결국 그녀는 뛰어가서 이웃집 초인종을 누르고 여자가 나오자 외친다. "나, 네 망치 필요 없거든!"

내게는 착착 감기는 은혜로운 설교인데 누군가는 어렵고 지루하다고 한다. 내 귀에는 화려한 수사만 가득한 공허한 말잔치일 뿐인데 다른 누군가는 은혜 받았다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설교뿐 아니다. 누구에겐 감동을 주는 어떤 글이,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에겐 자기 정당화를 위한 변명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한편에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다른 쪽에선 감옥에 보내도 시원치 않을 범죄자 취급당하기도 한다. 내 마음에 비춘 것만 보고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같은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일까. 나와 내 옆에 앉은 교우는 같은 목사님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

내 마음속 투사의 드라마를 성찰해 보는 것은 분노와 혐오에 갇힌 우리를 다른 지점으로 안내한다. 목사라 부를 수도 없고, 불러서도 안 될 것 같은 사람을 누군가는 여전히 존경한다. 그것이 더 견딜 수 없다. 그 거짓의 늪에서 사람들을 구출해 내야 할 것 같다. 내가 경험한, 나만 아는 저 목사의 불의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할 것 같다. 악한 지도자에 여전히 속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연민과 분노가 교차한다.

가장 괴로운 사람은 분열 속에 빠진 바로 나다. 망치를 빌리려던 여자 안에서 일어난 비합리적인 분노의 증폭이 내게는 없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 목사의 문제는 다를 수 있다. 명백한 잘못이 있고, 치명적인 인간적 결함이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해야 하고, 진실 규명과 구조 개혁을 위해 싸워야 한다. 동시에 가장 치열한 전쟁터인 자기 내면을 돌아보는 일 또한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냉소와 분노, 혐오에 나를 가둘 수 없기 때문이다.

성추행, 공금횡령, 거짓말. 흔한 목회자 범죄를 골고루 범한 목회자와의 오랜 싸움을 끝낸 한 형제와 대화를 나누었다. 오랜 싸움을 함께한 동지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었단다. 한마음으로 싸웠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누구는 목사의 성범죄에 꽂히고, 누구는 돈, 누구는 거짓말을 견딜 수 없어서 투쟁에 함께했다는 것이다. 그 지점이 각 사람의 투사였고, 다른 동기의 투사가 하나의 에너지로 결집되었을 터. 지루한 싸움이 지났거나, 교회를 떠나와 고요하여 무기력해진 상태라면 더더욱 내면의 전쟁터를 돌아볼 때이다.

유난히 감정이 들끓었던 지점에서 내가 보인다. 오직 목사와 목사를 비호하던 세력들만의 문제라 여겼으나 '네 망치 필요 없거든!' 하는 나만의 드라마 시나리오가 보일 수도 있다. 그렇게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을 볼 때, 100%의 정의이거나 100%의 불의, 절대악과 절대선이 만들어 내는 혐오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 너무나 아픈 과정이겠지만 말이다. 정말 나는 피해자이기만 할까, 새로운 질문은 늘 전에 가 보지 않았던 길로 이끈다.

한편 우리는 부정적인 것만 투사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진 좋은 것들도 투사를 통해 드러난다. 유독 끌리는 사람, 닮고 싶고,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좋은 것'은 다름 아닌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황금'과 같은 것이라고 융 분석가 로버트 존슨은 말한다. 어느 목사의 설교가 내게 구원의 빛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내 안의 황금을 투사하는 순간일 것이다.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내가 선망하는 바로 그것이 내게 있다는 뜻이다. 내 안에 있는 것만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금과 같이 소중한 것을 발견한 눈과, 그것을 담은 내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외부에, 어떤 목사의 능력에만 있다고 하는 것 역시 황금 투사이다. 그 무의식적 투사가 빚어낸 비극은 크다. 고귀한 존재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살 수 있는 자신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지 않고 목사에게 투사하여 스스로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것이다.

이 투사는 목회자의 부정적인 면을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과도한 존경으로 이어진다.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세상에 우리 목사님처럼 훌륭한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 같은 분입니다", "주의종이 말씀하시면 순종해야지요" 하면서 자기 안의 황금을 양도하고 만다. 황금 투사를 넙죽넙죽 받아 내면화한 목사는 그것이 자기 것인 양 착각하여 자아 팽창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무소불위의 목사, 하나님 위의 하나님인 목사, '김하나님'이 만들어졌다.

하나님 위의 하나님, 괴물이 된 목사는 신도들이 포기하고 양도한 내면의 황금을 포식한 자들이다. 백소영 교수는 라틴어의 'augere'에서 파생한 권위(authority)를 말한다. augere는 '성장하는 데 필요한 동력이 되는 힘'을 의미하는데, 조직신학자 카터 헤이워드의 표현을 빌려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 하나님을 우리 모두 받았기에 우리 각자에게 바로 그 권위가 있는 것이다. 그 권위를 지레 포기하고 내던진 신도들이 괴물 목사를 만들어 낸 토양 아니겠는가. 왜 우리는 우리의 권위를, 황금을 포기했을까. 그것을 포기하고 얻는 대가가 무엇일까.

황금과 함께 '거룩함'까지 목사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적당히 부동산 투기를 하고, 아이들 닦달하여 좋은 학교 보내고 연봉 높은 직장 보내는 일만 소명으로 여기며 제국의 삶에 올인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영적 성장을 위해 짊어져야 할 책임이 무거우니 중요한 판단은 목사에게 맡기고 대충 묻어가는 편한 삶을 살고자 함이었을까. 아니 그 이상일지 모른다. 개척한 교회를 대형 교회로 키운 목사의 자수성가형 성공 스토리를 롤모델 삼아 나도 한 번 화끈하게 일어나 보자는 숨겨진 야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자니 좁은 길, 가난한 길, 낮은 길이라 부담스러운데. 목사님을 영적 권위자로 모셔 시키는 대로 십일조를 하고, 봉사하고, 섬기면 목사님처럼 부와 명예를 다 얻을 수도 있겠다는 야망의 투사는 아니었을까.

한때 존경했으나 이제는 혐오하게 된 목사와 나 사이에 철벽을 치고 분리하여 좋은 나라, 나쁜 나라에 놓는 것은 쉽다.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언젠가 목사를 하나님처럼 받들며 추앙만 하던 것만큼 단순한 대응이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이제 목사라 불리는 모든 존재를 의심하고 사기꾼 취급하는 것도 당장은 속 시원한 일이다. 그러면 나의 황금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내 권위를 그 발아래 놓아 더욱 높아지는 발판을 제공했던 '이전의 나'는 어떤 나라인가. 좋은 나라인가, 나쁜 나라인가. 지고지순한 피해자일 뿐인가. 권리를 포기하고 책임을 방기하여 괴물 만들기에 가담했던 것은 아닐까.

피해자임이 분명하지만 피해자이며 동시에 공범임을 인정하는, 어렵고 아픈 자리에 서야 할 때인 것 같다. 저 가증스러운 괴물 목사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거나 용서하라는 지고의 명령에 즉각 순종해야 한다는 강박도 아니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의 화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인 나와 공범인 내가, 눈뜬 나와 눈멀었던 내가,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화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목사를 향해 타오르는 분노는 실은 어리석었던 과거의 나를 향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이다.

자발적으로 내주었던 황금을 돌려받아야 한다. 내게 주어진 권위, 성장하게 하는 힘, 하나님 그분을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자발적으로 내주었던 황금을 되돌려 받는 일이 순조롭게만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툼과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로버트 존슨은 맡겼던 황금을 돌려받을 때를 두고 "방을 나설 때는 우리가 이제 떠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방문을 소리 나게 닫아야 할지 모른다"고 한다. 한때 존경했던 목사에게 실망하고, 때로 그와 맞서 싸우던 시간은 방문을 소리 나게 쾅 닫는 의식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쾅 소리를 내며 닫지 않고는 쉽게 탈출하기 어려웠던 방이다. 종교 중독자로 사는 의존적인 삶, 영적 학대를 사랑과 돌봄으로 착각하던 세계에서의 탈출 아니던가.

내게도 존경했고 닮고 싶었던 목회자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바닥을 보게 되었다. 실망감과 배신감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간을 지나왔다. 젊은 날 감동하며 배웠던, 그리하여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일조한 모든 것을 무화하고 싶었다. 그것은 오늘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니 지금의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캄캄한 나날이었다. 여러 번 쾅쾅 소리 나게 문을 닫으며 방을 나왔다. 등 뒤에서는 문이 닫혔는데 앞으로 나아갈 곳은 없었다. 황금을 돌려받는 일은 막막하고 무거운 일이다.

그러나 내 황금의 무게를 스스로 견디겠노라 했을 때 제대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목사였던 존경하는 아버지를 사춘기에 잃었다. 그 자리를 대신할 대리자를 찾아 '목회자'의 인정과 칭찬에 목을 맸다. 목회자의 좋은 면을 과장하여 받아들였고, 그때마다 나의 황금을 기꺼이 가져다 바쳤다. '사랑'이란 이름의 영적 학대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의 나'와 그때 그 목회자를 싸잡아 미워하는 혐오 놀이를 이젠 멈추려고 한다. 영적 위력을 가했던 사실, 그래서 내 몸과 영혼에 남긴 상흔을 잊겠다는 뜻은 아니다. 잊히지도 않는다. 당장 용서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시편의 적나라한 기도를 빌어 기도한다.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시 109:29)." 그들의 보이지 않는 악이 만천하에 드러나 수치를 당했으면 좋겠다. 그 바람을 담은 기도와 함께 처분은 심판자의 손에 맡긴다. 그리고 나는 나의 걸음을 내딛겠다. 내 몫의 황금을 지고 나만의 길을 가겠다.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패포 금지)
 
 

올려짐: 2018년 9월 30일, 일 10:2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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