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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시간: (EST) 2018년 9월 23일, 일 3:59 am
[한국] 사회/경제
 
A reunion with the woman who kidnapped me 090518
나를 납치한 여인과의 재회... 40년 만에 받은 참회의 선물
[인권을 먹다4] 정정학과 일본식 소고기덮밥



▲ 정정학과 일본식 소고기덮밥 ⓒ 고정미

(서울=오마이뉴스) 변상철 기자 = 저녁 식사를 한 뒤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전거 페달을 힘겹게 밟으며 여의도에서 마포대교를 거의 건너올 즈음 전화가 울렸다.

"아, 변 선생, 나예요. 태일이. 잘 지냈소?"
"오랜만이시네요? 잘 지내시죠?"
"그럼, 잘 지내지. 근데 뭐 하나 물어보려고."
"뭔데요?"
"나랑 같이 광주(교도소) 있던 사람인데 이 사람도 엄청 억울하다고 했거든. 근데 북한에 다녀와도 억울한 건 풀어지나?"

북한에 다녀왔단다. 그래도 뭔가 억울한 게 있다면 그게 뭘까 궁금하긴 했다.

"어디 사시는 분이죠? 직접 만나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사람이 좀 멀리 살아. 부산 서면에 살거든. 한번 만나봐. 연락처 줄 테니."

그렇게 부산의 정정학이라는 사람과 연락이 되었고, 나는 부산 서면을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 그는 서면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그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멀리 오느라고 고생하셨네. 내가 정정학이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그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사무실로 가자며 앞장섰다. 역 바로 앞에 위치한 빌딩 지하 주차장 작은 골방으로 안내했다.

"내가 원래 다리가 불편하니 이 다리로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그래도 여기 건물주가 날 잘 봐줘서 여기 골방에서 이 빌딩 사무실 사람들 구두를 닦게 해줬어요. 요즘은 경기가 안 좋아서 그마저도 일이 별로 없긴 하지만."

정순자와의 만남

전남 완도가 고향인 그는 선천적으로 다리가 불편했다. 전쟁 직후의 한국은 몸이 불편한 그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벅찬 현실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그는 어머니로부터 일본에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곧바로 일본에 있는 아버지와 연락을 했고, 일본에 가기 위해 선원수첩을 신청해 발급받았다.

"선원수첩만 있으면 외항선을 탈 수 있거든. 외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아버지를 만날 생각이었거든. 부산에서 일본 오사카로 가는 외항선을 타고 오사카 항에 입항하자마자 내려서 그 길로 아버지를 찾아갔어."

그를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아버지는 이미 다른 일본 여인과 재혼을 했고, 몸이 불편한 그는 그곳에서도 차별을 받아야 했다. 한국인에, 장애를 가진 그를 그곳에서도 품어주지 못했다.

"아버지랑 매일 싸웠어. 학교도 안 간다고 하고는 근처 공장에 일하러 다녔지. 여기 저기 교포들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나중에 가와다쇼땡(川田商店)이라는 철물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 거기 주인도 재일교포였지.

1971년도 봄이었는데 하루는 공장 직원들이 영화를 보러 가자는 거야.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갔는데 아 글쎄 북한을 선전하는 선전 영화였어. 영화를 보다가 내가 막 소리 쳤거든. 저거 다 사기라고, 북한이 뭘 잘 사냐고. 독재국가고 김일성이도 가짜라고 막 소리 질렀지.

그랬더니 건장한 청년들이 나를 밖으로 나오라고 해. 나갔더니 나를 때리려고 했지. 그래서 맞붙어 싸우려는 찰나에 웬 젊은 여자가 나와서는 말렸어. 그리고는 연락처 하나를 주고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를 하자고 해. 그래서 그 다음 주에 연락을 해서 만났지."

그곳은 조총련 모임에서 만든 영화모임이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의 체제에 반대했고, 그들과 끊임없이 논쟁했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정순자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가 운영하는 가와다쇼땡이라는 철물공장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정순자라는 여자도 전라도 강진 사람이라고 했어. 전쟁 때 서울 살다가 강진으로 내려왔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그래서 그 여자도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밀항왔다고 하더만. 일본에서 중학교 때부터 살아서 조선고등학교를 다녔나봐. 그 시절이야 민단이고 총련이고 전부 조선학교를 보낼 때니까."

일주일 뒤에 오사카의 후세역(布施驛) 근처 어느 다방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한국의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일본에 굽신거린다고도 했다. 군인이 정치를 하는 한국은 괴뢰정부라고도 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펄쩍 뛰었지. 어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느냐고. 당신 빨갱이냐고 막 뭐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자기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라는 거야."

또 그녀는 북한의 경제가 한국보다 훨씬 우월하다고도 했다. 트랙터 기계로 모내기와 벼베기를 한다고도 했다. 전기가 풍부하다고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녀는 그를 비웃었다.

"아, 그 여자가 딱 부러지게 얘기를 하는데 '아 이 여자는 간첩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안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연락을 끊었거든. 그런데 어떻게 알고 내가 있는 공장으로 왔어."

공장으로 찾아온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왜 찾아왔느냐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의외의 제안을 했다. 자기와 같이 여행을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뜻밖의 제안에 놀랐지만 젊은 남녀의 감정으로만 생각했던 그는 1박2일 여행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몇 주 뒤 그녀와 오사카, 나고야를 거쳐 니가타를 향했다.

"니가타 해안 어딘가에 어두워서 도착했어요. 어디가 어딘지 아나. 처음 갔는데 모르지. 그 여자가 따라가자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자꾸 산길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면 조금만 더 가면 호텔이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갔죠. 그렇게 한 시간이나 걸었나? 앞에서 걸어가던 여자가 사라진 거야. 그래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총을 든 남자들이 나타나잖아. 그 길로 바로 납치된 거야. 완전히 속은 거야."

그랬다. 그는 납치되었다. 그는 선박에 태워져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3개월 감금된 채 지내야 했다. 매일같이 철학교육이니 혁명지 관람, 공장 견학, 예술활동 관람 등을 했다고 한다.

속아서 북한 갔는데... 결과는 '사형'

매일같이 보내 달라고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거나 몸싸움을 했으나 소용 없었다. 그렇게 납치된 지 3개월쯤 되었을까 그를 감시하던 지도원이라는 사람이 '남한에 가게 되면 북조선에서 보았던 것을 사실 그대로 알려 달라'고 하며 그를 다시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

"일본 어느 해안인지 기억도 안 나요. 그 해안에 딱 도착하니 날 보냈던 그 여자가 마중 나와 있더라구요. 죽이고 싶어서 막 달려들었더니 그 여자가 하는 말이 '날 죽여서 분이 풀리면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날 죽여 봐야 당신만 손해 아닌가요?'라고 말하는데 그렇겠더라고요. 일단 오사카까지 무사히 가야 하고, 이 여자 죽이면 나는 살인자가 되는 거니까 분해도 어쩌지 못하겠더라고."

그는 억울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을 안고 오사카에 돌아온 뒤 그녀와 북괴의 마수를 피해야겠다는 마음에 일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동안 모았던 돈을 모두 바꿔서 일본출입국관리국에 귀국 신청을 하고 귀국선을 탔다.

"우리같이 일본출입국관리국에서 보낸 사람들은 부산항에 도착하면 보안검사를 받아요. 나도 부산항에 들어오자마자 부산중부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어요. 처음에는 경찰서 조사를 받고 나서 중앙정보부 부산분실로 갔는데 그곳에서 제가 모든 것을 다 털어놨어요."

중앙정보부 수사관은 그의 자수에 그때까지 그의 손목에 채워졌던 수갑을 풀면서 '이제는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조금도 신변에 대해서 불안감을 가지지 말고 조국을 위해서 힘 자라는 대로 협조해 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그 말에 힘입어 그는 미8군사령부, 검찰 조사에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쥐어짜 기억해내려고 노력했다.

"재판장님, 앞길이 창창한 젊디 젊은 본인의 용솟음치는 뜨거운 피를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값 있게 흘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시기를 엎드려 비옵니다."-1972. 6. 7 반성문)

그는 수사관의 말처럼 힘닿는 데까지 협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조국과 겨레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서울형사지법 1심 판결(1972. 3. 14)의 결과는 '사형'이었다.

"눈 앞이 캄캄했죠. 내가 중앙정보부에 모든 것을 협조했는데 사형이라니. 처음에는 뭔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었어요.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아, 중정 수사관들한테 또 속았구나 하고 알게 되었죠."

그는 항소심에서부터 그가 자수했던 점, 북한에 간 것은 기망에 의해서 납치되었던 점 등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2심 재판(1972. 6. 27)과 대법원 판결(1972. 8. 29)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20년 가까운 징역 생활 중에 그는 모범수로 감형되어 1991년 출소했다.

'가와다쇼땡'을 찾아서

"요는 선생님이 북한에 간 것은 자의에 간 것이 아니라 속아서 간 것이다 그거죠?"
"예, 맞아요. 속아서 간 거예요."

그럼 속아서 북한에 갔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법은 정정학씨를 속인 사람을 찾아 자백을 받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여성을 어디 가서 찾지?

"그거야 시간 많으니 천천히 고민하고, 일단 저녁 먹읍시다. 점심 때 만나서 벌써 6시가 넘었네요. 뭐 좋아해요?"

난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여기 서면에 돼지국밥집 많잖아요. 그 문재인씨가 갔다던 돼지국밥집 있잖아요."
"좋은 거 먹지. 돼지국밥은 아무나 다 먹는 건데."
"아무나 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좋은 거예요. 가시죠."

서면역 근처의 명가돼지국밥에서 국밥 두 그릇을 시켰다. 그리고 잔술로 파는 소주도 시켰다. 술을 못하는 나로서는 잔소주가 너무도 좋았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이랑 문재인씨가 변호사일 때 몇 번 내 사정을 말해본 적이 있었는데, 어렵다고 하더라고. 속아서 북한에 갔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안타깝지만 지금은 안 되니 나중에 시절이 좋아지면 해 보자고 해서 몇 번 돌아선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럴까봐 좀 걱정이 되더라고."

이럴 때는 솔직히 말해 두어야 한다.

"맞아요. 쉽지 않아요. 그 사람을 어디가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고, 살아 있다는 보장도 없고, 설령 만난다고 해도 내가 저 사람 속여서 데려갔다 이런 말을 해줄 리도 만무할 거고... 그래도 해 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아쉽지는 않잖아요."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며 웃어 보였다.

그날 밤 부산의 호텔로 돌아온 나는 인터넷 구글지도를 검색해 보았다.

'가와다쇼땡(川田商店)', '후세역(布施 驛)'

역시 그런 검색어는 통하지 않았다. 그럼 혹시 옛 주소로 검색해 볼까? 나는 판결문과 수사기록에 나와 있는 가와다쇼땡 상점의 예전 주소를 검색창에 적어 넣었다. 다행히 예전 주소는 검색이 되어 결과를 보여주었다. 앗? 지도상에 '川田商店' 상호가 나오는 것이었다. 아직도 있는 건가? 나는 확실히 확인해 보기 위해 로드뷰로 전환했다. 간판이 보였다.

'川田商店'


▲ 정정학을 포섭했다는 여성이 근무했던 가와다상점. 구글의 도움으로 천신만고끝에 이곳을 찾았다. ⓒ 변상철

그리고 전화번호도 선명히 보였다. 소름이 끼쳤다. 나는 정정학씨에게 상점을 찾았다고 알려준 뒤 곧바로 일정을 확인하고 비행기를 예약했다. 정정학씨와 함께 가기로 하여, 그와는 오사카 공항에서 만났다.

"일단 후세역으로 가서 川田商店 가게를 찾아보죠. 그리고 나서 그곳에 예전 사람이 근무하면 정정학씨 속여서 납치했다는 정순자씨도 찾아 봐요. 그런데 못 찾을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요."

우리는 후세역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후세역에 도착하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작은 기회라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리라. 후세역에 도착한 우리는 구글지도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다리가 불편한 정정학씨의 걸음걸이에 맞추려니 보통 사람은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20여 분이나 걸어야 했다.

'설마' 하는 마음이 '기대'로

구글 지도가 '목적지'라고 멈춘 곳은 가정집만 가득한 곳이었다. 지난번 내가 구글 지도로 봤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다시 검색을 해도 같은 장소였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 봤더니 잘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 골목을 걸어 나와 역으로 걸어나오는데 왼편에 낯익은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마음에 그 골목으로 들어가자 지난번 로드뷰로 봤던 골목이 펼쳐졌다. 이런! 몇 미터 들어가자 川田商店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정정학씨, 일단 들어가서 여기서 일했던 정순자를 아는지 물어 봐요. 그런데 절대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여성이 나와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우리는 일단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한국 사람이라는 확실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에 그 여성은 어눌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됐다.' 한국어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무슨 일로 오셨죠?"
"네, 혹시 예전에 여기서 일하시던 정순자씨라고 아시나요?"
"정순자? 잠시만요."

그녀는 어디론가 가더니 잠시 뒤 비슷한 나이의 중년 남성이 나왔다.

"누굴 찾으십니까?"
"정순자씨라고 여기 1970년대에 근무했던 여성인데요."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저희 고모를 찾으시는 것 같은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알고 계실지 모르니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한국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설마'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던 우리는 이제 당사자를 만날 수 있는 '기대'로 바뀌는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딘가로 몇 번의 전화를 하던 그 남자는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고모님이 지금 일을 하고 계시는 시간이라 연락이 안 되나 봅니다. 혹시 숙소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연락이 닿는 대로 전화를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일단 로밍해 온 휴대전화번호를 남겼다. 그리고 꼭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몇 번이나 말을 남겼다. 후세역으로 걸어 나오던 우리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꼭 무죄를 받으려 했던 이유

"어디 잠깐 앉았다가 갈까요?"
"그럽시다. 나도 다리가 아파서 좀 쉬어갈 참이었는데 그럽시다."

아침 먹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터라 역 앞의 덮밥 집에 들어갔다. '스키야'라는 간판의 서민 덮밥 가게였다. 들어가서는 소고기덮밥(규동)을 시켰다.

"니가타 바닷가에 도착하기 전에 어떤 작은 마을에 들렀는데 거기 마을에서 엄마와 딸이 구걸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 여자와 아이를 데리고 가서 밥을 먹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나와 같이 갔던 여자가 이상한 눈으로 보더라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 가족을 데리고 가서 덮밥 집에 데리고 가서 덮밥을 같이 먹었어요.

그랬더니 그 가족이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해요. 나오는 길에 날 데리고 갔던 여자가 '왜 모르는 사람하고 밥을 먹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배고픈 사람을 어떻게 그냥 보고 가느냐고, 그랬더니 그 여자가 웃어요. 별스럽다고. 오늘도 덮밥을 먹고 왔다고 하면 또 별스럽다고 할지 모르겠네. 허허"

그렇게 대화를 하며 덮밥을 거의 다 비워갈 즈음 전화기의 진동이 울렸다.

"아, 변상철씨? 저는 고모님의 올케가 되는 사람입니다. 저희 고모님을 찾고 계신다고 했지요?"
"네, 그렇습니다. 혹시 연락이 되셨나요?"
"네, 고모님은 오늘 7시쯤 일이 끝난다고 하니 일을 마치고 저희가 있는 곳으로 오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와 만나서 기다리고 있으면 고모님이 오실 겁니다."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자 20여 분 뒤 자동차가 가게 앞으로 왔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의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자 70대의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정학씨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 보았다.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정정학씨는 힘차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오랜만이라며 반가이 인사했다. 그녀도 인사를 했다.

여기에 온 이유, 그동안 정정학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눈물을 보였다.

"사실 한국에서 날 찾아왔다고 했을 때 너무 놀랐어요. 왜 수십 년이 지나서 날 찾아왔을까.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하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나왔어요."

그녀는 연신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 시절의 잘못된 행동으로 그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그를 속였다는 것, 그를 납치했다는 것을 사죄했다. 그녀는 정정학씨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정정학씨 사건으로 그녀 역시 일본경찰청의 조사를 받고 그녀의 가족 모두 수십 년간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고 했다.

그녀의 증언으로 2018년 5월 10일 서울고등법원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부산에서 다시 만난 그와 국밥을 다시 나눴다.

"변 선생, 내가 왜 재심에서 무죄를 받으려고 노력하는지 알아?"
"죽기 전에 억울한 누명 벗으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거야 당연한 거고. 난 지금까지 쓰레기 동굴 같은 곳에서만 살았어. 더럽고 냄새나는 지하방 같은 데서만 살았거든. 내 소원이 볕이 잘 드는 깨끗한 방에서 살아 보는 것이 소원이야. 재심에서 무죄 받으면 국가가 보상을 해준다잖아. 그럼 나도 깨끗한 방에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꼬리기사>

정정학은 1946년 전남 완도군 청산면에서 태어났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던 그는 4살 때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고 어머니와 지냈다. 하지만 가난한 살림에 어머니가 다른 섬 임씨 댁의 '씨받이'로 들어가고 자신은 그 해(10살) 같은 마을에 사는 지씨 댁에 소먹이 머슴으로 살기도 했다.

그는 세상이 비참하고 불공평하다고 믿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불편했던 다리는 사회생활에 제약이 되었고, 가난한 그의 살림은 일본에서조차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와 그가 할 수 있는 일 역시 목욕탕 세신사나 구두를 닦는 일이었다. 지금도 역시 그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가 살고 있는 집 역시 재건축 결정이 나 언제 헐릴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골방 같은 곳이다.

그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아야 하는 이유가 생존이라고 했다. 깨끗한 방과 침실이 있는 방에서 단 며칠이라도 생활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2018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리는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기다리는 그는 이제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기뻐했다.

그는 부산광역시 서면에서 조금은 부푼 기대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9월 05일, 수 9:4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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