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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Spritual abuse, a diaster comes 082918
영적 학대, 재난이 온다
[정신실의 신앙 사춘기] 두 살 목사와 열 살 교인


(서울=뉴스앤조이) 정신실(작가) = 한 후배가 신앙의 위기를 겪은 이야기이다.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가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렸다. 누구보다 아끼던 청년이었고, 그의 부모님을 특별히 존경하고 있었다. 온 교회가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고된 투병 과정에 함께했다. 완치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 살아 계시군요!' 뛸 듯이 기뻤고, 재발 소식을 듣고는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았단다. 교인들 너나없이 간절하게 기도했고, 후배 역시 절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을 제발 살려 주세요.' 성격상 잘 하지 못하는 청원 기도가 절로 나왔다고 한다. 남몰래 혼자 금식도 했다. 이렇게 드렸던 기도는 결국 결재를 얻어 내지 못했다.

제자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작별의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젊은 생명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유치하도록 절실했던 기도로도 지켜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추스르지 못하는 마음에 수요일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 후 기도회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함께 통성기도 하자며 기도 제목을 제시했다. ○○을 살려 달라! "더 크게 기도하라. 최소한 자기 목소리가 자기 귀에 들리도록 기도하라"는 기도회 시간마다 받는 요구였다. 강요당하는 느낌이라 늘 불편했지만, 이 순간에는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목사님 또한 자신이 주문한 내용을 마이크에 대고 크게 외쳤다. "아버지~이, 아버지~이, ○○를 살려 주세요." 어쩐지 그 기도가 민망하게만 들렸다. 기도하는 분의 태도가 멋쩍어서 듣기 민망한 것인지, 민망하여 멋쩍어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고, 돌아보면 교회를 떠나온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이성과 신앙이 분열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마이크를 통해 들리는 "살려 주세요!"는 차라리 불신앙으로 들렸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 앞에서 "하나님 살려 주세요" 기도할 수 없다면 믿음의 위안은 무엇인가. 하지만 그 순간 그 민망한 부르짖음은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이자 어리석음으로 느껴졌단다. 참을 수 없는 종교의 가벼움이었다.

그러는 사이 호스피스에서는 찬송이 울려 퍼졌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 찬송과 함께 제자는 이 땅의 마지막 숨을 내쉬고 고요하게 떠났다. 후원하던 타국의 어린아이를 친구에게 부탁하고 후원금을 맡기는 등 의연하게 마무리하는 모습이었다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 비관도 낙관도 아닌 의연함으로 기도하시던 부모님의 믿음과 가르침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후배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가 떠난 주일예배 봉헌 시간, 이런 내용의 감사 헌금이 있었단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그렇게 고백하며 청년은 본향으로 떠났다.

이 일을 오래 곱씹으며 후배는 교회를 떠났다. 미련 없이 떠났다고 하는데 과연 미련, 끊어 내지 못한 감정과 생각이 없을까. 몇 번이고 새로운 이야기처럼 그날 그 기도회 장면을 얘기하는 후배를 보았다. 어떨 땐 분노에 차서, 어떨 땐 무기력하게, 가끔은 슬픔에 가득 차서 목사의 기도를 되뇌었다. "○○을 살려 주세요!" 언젠가 이 한마디를 흘렸다. "언니, 그런데 나는 살려 달라고 기도하지 못했어. 살려 달라는 기도가 안 나오더라고."

이날 이 순간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후배를 보면서 나는 '영적 학대'라는 말을 떠올린다. 흔히 어린아이나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이 학대의 대상이 된다. 강한 힘에서 비롯한 폭력이 학대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신체적·정서적·영적 학대, 모든 학대는 악한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학대의 흔적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면에서 신체적 학대보다 정서적 학대나 영적 학대의 해악은 더 교묘하고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말씀 선포, 혹은 영적 학대>1) 저자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나님의 뜻이나 명령을 빙자해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영적 학대의 교묘함을 지적한다. '설교자의 마이크'는 거룩한 듯 보여 교묘하고, 그렇기에 치명적인 학대 수단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설교자가 하나님의 대언자라고 배운다.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게 아니라 일단 믿고 이해하는 것이라고도 배운다. 그렇게 배운 이들에게 강단 마이크를 통해 퍼지는 목사의 소리는 어쨌든 하나님의 음성을 연상하게 한다. 제아무리 예리한 판단력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설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강단의 마이크는 소통이 아니라 선언의 도구이다. 그리하여 영적 권력이다.

마이크를 잡는 설교자가 모두 학대자라는 말은 아니다. 목사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교인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나 들으라고 하는 설교냐!"이다. 무슨 말이든 꼬아서 듣고, 목사 트집 잡는 것을 일삼는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피해망상 교인들 때문에 목사님들의 고통이 크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더 겸허해야 할 사람은 마이크, 성능 좋은 마이크를 가진 쪽일 것이다. 설교자 자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설교를 잘하든 못하든 모든 설교에는 영적 위력이 있다. 수백 명의 목소리를 한 방에 제압할 수 있는 것이 마이크 아닌가. "목사가 나를 비난하려고 설교를 동원했다"는 억지조차도 강단 마이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말이다.

기실 모든 설교는 표적 설교이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 설교가 어디 있겠나. 마이크 잡은 목회자의 동기가 순수한지 아닌지, 특정한 누구를 겨냥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단지 마이크를 잡았기 때문에 설교자는 두려워해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설교에 탄 비난 한 스푼으로 한 영혼에게 맹독이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도록 날카롭게 자기를 성찰하며 마이크를 잡아야 하지 않겠나. 그 고독과 고통은 곧 많이 맡은 자의 몫, 부름 받은 자의 십자가가 아닐까.

'새벽 기도 강요'는 하지 않겠노라 결심한 목사님을 보았다. 목사님들 사이에서 오가는 비법. 새벽 기도는 교인들을 통제하는 데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한다. 자기 기도 생활이 충분히 성실하며 깊다고 여기는 신앙인은 거의 없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가 우리 기준이지 않은가) 목사에게 새벽 기도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루 근무의 시작이다. 결코 빠질 수 없는 자리이다. 얼마나 당당한가. 당회에서 큰소리치는 장로에게, 제직회에서 날선 비판을 일삼는 집사에게 "중직인데 일단 새벽 기도나 나오시고요"라고 해 버리면 게임 끝이다. 교인들 제압을 위해 성능 좋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목사님의 선택. 진정한 자기 포기 아닐까.

장로님 한 분과 의기투합하여 교회를 개척한 젊은 목사님을 알고 있다. 자리를 잡아 가며 교인이 늘어 가는 시점, 개척 동지인 장로님과 목사님의 생각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러난 차이는 좁아지기보다 갈수록 넓어지는 법. 함께하기 어렵다고 느껴 목사님이 떠나기로 했다. 갈 곳 없이 교회를 떠나온 목사님에게 얼마나 힘드셨느냐고 위로의 말씀을 건넸다.

가장 힘든 것은 설교를 자기변명의 수단으로 삼고 싶은 유혹이었단다. 기고만장한 장로님 들으라고, 그분의 교만을 일깨우는 설교를 한 번쯤은 하고 싶었단다. 아무것도 모르는 교인들에게 슬쩍 자신의 억울함을 흘리고 싶었단다. 그 유혹은 너무 컸고, 그것이 악마의 유혹인 것을 알았기에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억울한 울음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자기 주먹의 위력을 알기에 함부로 쓰지 않는 선택은 어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주먹 한 방이 나갔을 때 약해 빠진 아이가 입을 치명상을 알기에 더욱 무력해지는 길을 택하는 것은 성숙한 어른의 태도이다. 학대하는 부모는 자기 주먹의 강도와 아이 몸이 지닌 무력함의 간극을 인지하지 못한다. 학대하는 부모는 오직 자신의 욕망, 분노, 두려움만 알 뿐이다. 가진 것은 큰 덩치와 무력뿐, 마음은 어른이 되지 못한 '성인 아이'가 늘 학대의 주범이다. 컴퓨터게임에 빠져 있다가 두 살 아이를 죽이고 만 아빠를 비롯해, 미성숙한 어른이 자신의 아이를 학대한다. 그러니까 학대자는 강한 자가 아니라 미성숙한 자이다.

후배의 목사님은 자신이 가진 힘에 걸맞게 성숙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에게 나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무한 절망의 실존 앞에 믿음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질문하는 사람인가, 회피하는 사람인가. 고통을 마주한 채 정직한 절망으로 입을 닫아 버린 후배인가, 현실을 바라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천박한 신앙으로 승화하려는 목사님인가. 죽음을 짊어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천국의 날을 준비하는 청년과 그 가족들인가, 끝까지 살려 달라고 떼를 쓰는 목사님인가.

문제는 후배가 마이크 잡은 목사님의 신앙관에 비추어 자기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마이크의 위력, 영적 권력에 압도되어 죄책감과 자기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수요 예배에 있던 교인들과 같이 절규하지 못한 자신이 밉다고 했다. 왜 내게는 은혜로 수용하는 미덕이 없는지, 왜 그리하여 결국 목사를 미워하며 교회를 떠나오게 되었는지. 그런 자신이 밉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론 무엇이 잘못됐는지 명확하게 알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자기 비난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학대가 남기는 상처, 수치심이다. 이것이 참을 수 없는 종교의 가벼움으로 영적 학대를 당한 교인에게 남겨진 상처이다.

마태오 린은 '두 살 아이에게 열 살 아이처럼 행동하도록 기대하거나, 열 살 아이에게 두 살 아이처럼 계속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 정서적 학대라고 했다.2) 이 시대 교회의 문제는 두 살 목회자가 열 살 교인들 앞에서 성찰 없이 마이크의 위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겁고 복잡한 인생의 문제를 영적으로 쉽게 치환하며 가르치려 드는 두 살짜리 설교를 열 살 된 교인들은 얼마나 더 참아야 하나.

후배는 자신이 열 살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두 살 목사 앞에서 열 살 아이로 고통받았음을 스스로 알아 줘야 한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두 살의 유치함을 들어 줘야 했었던 것이 고통의 핵심이었다고 인정할 때, 영적 상처로 남은 수치심 또한 있는 그대로 보일 것이다. 목사를 향한 터무니없는 분노 또한 거두어지리라.

목사가 두 살이어서는 안 될까. 태어날 때부터 목사이거나 타고난 영적 지도자가 따로 있단 말인가. 두 살, 세 살 나이를 먹으며 더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것이 인간의 길 아니겠나. 두 살일 수도, 일곱 살일 수도 있는데, 열 살인 척해야 하는 것이 목회자들의 슬픈 딜레마인지 모르겠다. 인생 모든 질문에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삶의 모든 문제를, 심지어 죽음까지도 (기도로든 무엇으로든) 통제할 수 있는 척하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마이크는 마이크일 뿐, 목회자는 마이크가 아니다. 가르침을 위해 설교가 필요하고 설교를 위해 마이크가 필요하지만, 목사 자신은 마이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지닌 한 존재일 뿐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를.

목회자가 마이크와 자신을 동일화하여 자기 인식의 감각을 잃어 가는 동안 교인들은 광야로 내몰린다. 하지만 그들 중 어떤 이는 메마른 광야에 서서 때때로 수치심과 두려움에 떨고 분노에 차 울며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성장하고 있다. 예배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을 서성거리며, 추위에 떨고 있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리하여 모호함과 역설을 받아들이는 어른 신앙인이 되어 가고 있다.

멈춰 버린 발육 상태로 정체되어 있는 사람은 마이크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목회자, 당신이다. 마이크가 과대 포장해 준 웅장한 목소리가 진정한 자기인 줄 착각하는 자아도취에서 깨어나시길. 아니 마이크 뒤에 숨어 두려움과 의심 없는 척, 모든 것을 통달한 척 연기하는 힘겨운 삶에서 나오시길. 두렵다 말하고 믿어지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영적 능력임을 아셨으면 좋겠다.

가나안, 또는 광야로 내몰린 교인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일상의 찬바람을 맞으며 정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하여 성장하고 있다. 영적 학대의 피해자는 생존자가 되고, 영적 깊이를 더하는 구도자가 되어 가고 있다. 영적 학대로 인한 가장 큰 재난은 지금 어쩌다 가해자가 된 목회자 자신들을 덮치고 있는지 모른다.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8월 30일, 목 6:2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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