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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Father of street 080118
박종철의 삶 이어받은 '거리의 아버지', 박정기
[고 박정기 선생 추모] 목욕탕 주인 꿈꾸던 공무원이 민주화 투사가 되기까지



▲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인 박정기씨의 빈소가 마련된 부산시민장례식장. ⓒ 정민규

(서울=오마이뉴스) 정민규 기자 = 28일 향년 89세로 별세한 박정기 선생의 삶은 단순히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로서 그치지 않는다. 평범한 공무원으로 살 수 있었던 그의 삶은 막내아들의 죽음 이후 급격하게 달라졌다. 박정기 선생은 남은 인생을 아들이 꿈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

1928년 부산 정관면 월평리에서 태어난 박정기 선생은 1954년 부산시 수도국에서 36년의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반려자 정차순 선생과의 사이에 차례로 종부, 은숙, 종철을 낳았다. 1986년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던 박정기 선생은 남은 인생을 목욕탕집 주인을 하며 살고자 했다.

하지만 1987년 1월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뀐다. 금쪽같은 막내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던 그에게 경찰은 건강했던 아들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이해 못 할 소리를 했다. 물고문과 구타로 사망한 젊은이의 죽음을 그들은 이렇게 왜곡하려 들었다.

"처절한 심정으로 이 넓고 큰 지구에서 나 혼자 변을 당하는 외로움, 사지가 마비되는 고독감, 당하고 마는구나 하는 마음이 바로 이 날이었다" - 1997년 5월 8일 일기

10년 뒤 박정기 선생은 자신의 일기장에 그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후 그의 삶은 달라졌다. 1987년부터 박정기 선생은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아들의 죽음은 그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6월 항쟁은 내 인생을 변화시켰고, 유가협으로 가는 징검다리였어. 내 삶이 다시 시작되었지" - 책 <유월의 아버지> 중

농성, 구속... 독재와 맞선 거리의 아버지


▲ 울음 삼키며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고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이 열린 2012년 1월 14일 오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고인의 아버지인 박정기씨가 울음을 삼키며 힘겹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 권우성

박정기 선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삶을 이어간다. 1988년에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민사소송을 시작했다. 이 재판은 민사소송에서 사망한 피해자 대신 유가족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신원권'이 인정된 첫 번째 재판이다.

1988년 10월부터 1989년 2월까지는 의문사 진상 규명을 위한 기독교회관 135일 농성에도 들어갔다. <유월의 아버지>를 쓴 송기역 작가는 "박종철 아버지 박정기는 이 시기를 거치며 노투사 박정기로 거듭났다"라고 평가했다.

1990년대로 시대가 바뀌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여전했다. 전국에서 누군가의 아들·딸들이 몸을 던지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며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정부가 유가족을 회유하고 협박해 주검을 빼내 화장하려 들던 시절이었다. 박정기 선생과 유가협 회원들은 영안실을 번갈아 가며 지키면서 온몸으로 그 시도를 막아냈다.

경찰의 폭력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강경대 열사에 대한 가해 당사자 경찰들의 재판이 열린 1991년에는 재판부에 거칠게 항의하다가 99일간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내 자식 죽인 놈들 천벌을 받으리라"

1997년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전두환이 특별 사면으로 출소하자 박정기 선생은 안양교도소를 찾아가 석방을 저지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방패에 찍혀 머리가 찢어졌는데도 그는 피를 흘리며 '전두환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1998년 11월부터는 여의도에서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 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농성에도 들어갔다. 이후 단식 농성으로 이어진 422일간의 농성 끝에 국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거리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이 유가협의 농성 천막으로 몸을 숨기면 뒤를 쫓던 경찰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박정기와 유가협 회원들은 경찰을 가로막으며 "내 자식 죽인 놈들 천벌을 받으리라"라면서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해진 2017년 겨울에도 박정기 선생은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다. 이 모습은 박정기 선생이 대외에 모습을 나타낸 마지막이 됐다. 이후 병원에 입원한 박정기 선생은 쾌유를 바라던 많은 이들의 바람을 뒤로하고 지난 28일 눈을 감았다. 그는 생전 그토록 보고파 하던 막내 박종철의 가묘가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서 영면에 들 예정이다.

"막내야, 다음에도 나는, 이 아버지는 민주화운동을 할 거야. 역사에 없어도 나는 네가 하다간 그것을 할 거야!" - 1994년 4월 26일 일기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8월 03일, 금 8:2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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