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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YS critical biography 080118
14대 총선 부진 대선체제 전환
[김영삼 평전 85] 민자당 총재 이어 제14대 대통령 당선



1990년 1월 22일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은 3당 합당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으로 야합으로 지역주의를 견고했다. 민주주의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1992년 3월 24일 제14대 총선이 예정되었다. 14대 총선의 돌연변수는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 정주영이 통일국민당(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선에 나선 것이다. 국민당은 민자당과 민주당 등 기존정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인사들을 마구 영입하여 세력을 늘렸다.

투표결과 민자당 전국구 포함 146석, 민주당 97석, 국민당 31석, 무소속 21석, 기타 1석으로 민자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김영삼은 선거기간 안정과반수 확보를 위해 전국을 다니며 지원유세를 했으나 성과는 좋지 않았다. YS는 부산서구에서 당선되어 9선 의원이 되었다. 헌정사상 초유의 기록이다.

3당 합당 후 노태우 정권은 공안통치로 강경대군 치사사건을 비록하여 노조탄압, 국회날치기 등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었다. 3당합당 후인 7월 14일 민자당은 야당의 반대에도 방송관계법안, 국군조직법개정안, 광주보상법 등 26개 법안을 25초 만에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과거 독재정당의 구태를 되풀이했다.

YS는 당대표의 위치에서도 당내 수구세력의 끈질긴 방해와 견제를 받았다. 노태우는 여전히 내각제를 선호하고, 마땅한 차기 대선후보가 없는 구민정계가 여기에 동조하면서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민자당은 14대 총선에서 서울 25석을 고스란히 민주당에 넘겨주고 득표율에서도 서울에서 민주당에 한참 뒤졌다. 김영삼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기에 대선후보를 선정하여 리더십을 발휘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대선체제 전환은 자신의 위상확보와 민정계를 끌어모을 수 있는 양날의 칼이었다.

YS는 민정계 중진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설득하거나 측근들이 동원되었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힘을 모아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신사고’의 가치를 내세웠다.

1992년 4월 28일, 국회 의원회관 별관에서는 민자당의 14대 대통령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나를 추대하는 모임의 결성식이 열렸다. 민정·민주·공화계의 다수 현역의원을 포함, 240여 명이 참석했다. 이 날 나를 지지한 사람들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3당통합 정신을 계승한 김영삼 대표를 민자당의 차기 대통령후보로 추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후보 추대위원회.’
나를 집권여당의 대통령후보로 추대한 이 모임은 3당통합 당시의 지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 결성한 위원회로서, 민자당의 지구당위원장 170명이 참여했다.

추대위의 면면은 계파의 벽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 명예위원장 : 김종필 △ 공동위원장 : 권익현, 김재광, 이병희 △ 부위원장 : 고명승, 구자춘, 김광수, 김수한, 김식, 박세직, 박용만, 서정화, 신상우, 오세응, 이종근, 정재철, 최형우, 지연태 △ 대표간사 : 김윤환 △ 총괄간사 : 김종호, 김용채, 김덕룡 △ 고문단 : 김재순, 민관식, 김명윤, 이만섭, 유학성, 최재구, 김정례, 권오태, 황인성, 임방현 등이었다.

추대위는 그후 여의도 뉴서울빌딩에 캠프를 차려 대의원 득표활동에 나섰다.
(주석 1)

노태우의 낙점, 대세장악 계기

민정계 핵심들이 YS를 지지하게 되기까지는 권력 내부의 치열한 암투과정이 있었다. 민정계에서는 이종찬과 박태준이 자천타천 형식으로 후보경선을 준비중이었다. 여러가지 곡절 끝에 노태우는 YS에 방점을 찍었다. 구민정계 핵심들이 YS추대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배경이다.

항간에 노대통령이 YS를 후계자로 최종 결정하도록 하는 데는 민정계 요인 5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들 하고 있다. 김윤환, 서동권, 금진호, 이원조, 이병기가 그들이다. 그들 5인 모두가 노태우 대통령과 가장 가까이 있었다. 김윤환은 고등학교 동창생으로 킹메이커를 자처하면서 정치권의 대세론으로 끊임없이 분위기를 몰아갔다. 서동권은 안기부장으로서 노 대통령과 YS양 측에 각종 정보(나를 이미지 다운시키는 부정적 정보를 포함)를 적절히 생산ㆍ배포함으로써 YS 대안부재론으로 만들어 나가면서 자신과 YS유대를 불가분의 것으로 심화시켜 나갔다.

금진호 내외는 노대통령 내외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서의 생활을 함께하면서, 그리고 이원조는 절친하고 편안한 오랜 친구로서 YS 불가피론으로 유도하며 자신들도 YS와의 정치적 장래를 굳게 다져나갔다.

노대통령의 모든 동정을 시시각각 알고 있는 이병기는 YS의 차남 김현철의 경복고등학교 13년 선배로서 3당통합 후 처음부터 김현철과 깊이 연대하였고, 대통령에 보고되는 민감한 사항들이 어느 정도 YS측에 전달 되었는지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YS가 집권한 후, 이른바 ‘YS문민정부’에서 김윤환은 정무장관, 당사무총장, 대표위원을 지냈고, 서동권은 대통령 통일고문을 지냈다. 이병기는 노태우 대통령을 구속시킨 YS대통령 아래서도 안기부장 2특보와 안기부 2차장을 누렸다. 이른바 YS 대통령 만들기 민정계 ‘5인방’ 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것은 역사와 국민의 몫이다. (주석 2)

아무리 노태우의 명시적인 지지가 있었다해도 한 나라의 대권을 장악하는 길인 집권당의 대선후보가 그리 손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YS는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너무 낙관했다가 DJ에게 역전패 당한 전력이 있었다.

YS는 자신을 반대하거나 비우호적인 민정계 중진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ㆍ설득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박철언이었다.

4월 21일 YS의 요청에 의해 오후 1시 30분부터 2시 40분까지 YS가 전용 안가로 쓰는 하얏트호텔 1916호실에서 YS와 단둘이 만났다. YS는 “박장관, 도와주시오. 대통령의 뜻을 알았으면 받들어야 하지 않겠소. 나와 박장관은 가장 가까워야 할 관계인데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박장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박장관을 키워주겠소. 5년 후엔 다른 사람을 내세울 일이 없지 않겠소. 박장관은 우수하고 자격이 있으니, 내가 되는 것이 박장관에게도 절대적으로 유리한 겁니다. 선택을 잘 하기 바라오. 정치는 선택입니다. 이종찬을 밀어 박장관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소. 앞으로도 계속 만납시다. 그리고 최형우 장관과도 자주 만나기 바라오” 라고 했다.

나는 “대표님, 이미 너무 늦은 이야기입니다. 내 입장이 변할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경선만은 공명정대하게 자유 경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합동연설회를 통해 자유로이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기회까지 박탈한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의 특사(정해창 비서실장을 통해)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청와대에도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라고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주석 3)

<주석>
1> 김영삼, 앞의 책, 307~308쪽.
2> 박철언, 앞의 책, 293~294쪽.
3> 앞의 책, 307쪽.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8월 03일, 금 7:5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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