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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The different lives of two historical figures 071118
26년생 김희숙, 26년생 김종필
겨우 연명한 독립운동가 가족, 죽어서도 추켜세워진 쿠데타 주역


(서울=오마이뉴스) 김성수 기자


▲ 고인이 된 김희숙 여사(왼쪽)와 김종필 전 총리(오른쪽). 둘의 삶은 한국사회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 오마이뉴스

그녀와 그는 둘 다 1926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올해 7월 2일 세상을 떠났고, 그는 6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둘은 문자 그대로 똑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삶의 모습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여기서 그녀는 장준하 선생의 반려자 김희숙 여사, 그는 김종필 전 총리다.

두 인물이 걸어온 너무나 달랐던 삶의 모습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들 삶의 궤적을 비교해 되새겨 보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1930•1940년대] 장준하와 혼인 - 탈영했다가 재입대


▲ (왼쪽) 26세 때의 장준하 모습. (오른쪽)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차례로 섰다(왼쪽부터). 이들 셋은 학도병으로 참가한 후 일본군 병영을 탈출, 중경 임시정부까지의 긴 여정에 올랐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김희숙은 12세 때인 1938년, 자신의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녀는 평북 정주가 고향이고 선생은 평북 의주 출신이었다. 그녀 외삼촌이 정주에 신안소학교를 설립했는데 선생이 교사로 부임했다. 그녀는 학생이었고 선생은 그녀 부모집에서 하숙했다. 1943년 11월 그녀는 소학교 시절 자신의 교사이자, 같은 마을에 살던 8년 연상 선생 장준하와 결혼했다. 당시 일본이 여성들을 위안부로 마구 잡아가자 집안 어른들이 서둘러 둘을 결혼시켰던 것이다.

결혼 후 일주일 만에 중국으로 끌려간 남편은 1944년 7월 일본군을 탈출해 2400km를 걸어 충칭에 있는 광복군에 합류했다. 남편은 국내 침투작전을 위해 미 정보기관의 특수군사훈련을 받다가 해방을 맞았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뒤 김구 선생의 수행비서로 일했다. 그녀는 해방 후 서울에 도착한 남편의 편지를 받고 의주에서 서울로 와 1년 반 만에 재회했다.

1946년 4월 남편은 김규식이 만든 한국청년회에 가입, 그해 12월에는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 가입했다. 1949년 남편은 출판사를 설립, 출판활동을 하던 중 1949년 2월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고, 같은 해 6월 졸업했다. 이후 <동아일보> 등에 사설과 칼럼을 발표하다 1950년 3월 남편은 서기관(4급)에 임용돼,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으로 일했다.


▲ 20대 중후반 때인 한국전쟁 당시의 김종필. ⓒ 퍼블릭 도메인

충남 부여에서 출생한 김종필은 1944년 3월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주오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그는 학내 문제와 부친 권유로 곧 자퇴하고 귀국, 대전사범학교에 입학, 1945년 초 졸업했다. 그후 그는 보령군 소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으나 2개월 후 교직생활을 마무리했다.

해방 후 그는 부친이 사준 집을 팔아 자동차 회사를 운영해 재력을 쌓았다. 그리고 1946년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1948년 사범대학 3학년이었던 그는 부친이 작고한 후 집안이 어려워지자 입대해 충남 온양의 육군 13연대에 배속된다. 그러나 1주일 만에 구타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탈영했다.

그리고 친구 집을 전전하던 중 육사 교도대와 만나게 돼 자수하고 재입대했다. 그후 육사 8기로 입학, 1949년 5월 소위로 임관했고 육군정보국에 배치됐다. 그 뒤 참모직을 역임하고 1949년 12월 육군본부 정보국에 중위, 1950년 한국전쟁 중 대위로 진급했다.

[1950•1960년대] 궁핍한 독립운동가 가족 - 초대 중앙정보부장


▲ 1966년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를 향해 '밀수왕초'라고 하며 '국가원수모독죄' 로 구속 될 당시 서대문 전세집 문앞에서 어린 장호준과 작별인사를 하는 장준하 선생 ⓒ 장호준

김희숙의 남편 장준하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 <사상계>는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원고 청탁•교정•제작•배본을 도맡았던 남편은 급할 때는 그녀의 손도 빌렸다.

사무실 임대료와 인쇄할 종이값이 없을 때에는 그녀는 자신의 외투를 팔아서 운영비를 댔다. 그후 사무실도 없어 그녀는 부산 영도다리 밑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무실의 망가진 책상을 빌려 쓰고 다방이나 공원에 앉아서도 원고 교정을 봤다. 그렇게 나온 잡지를 리어카에 실었다. 남편은 끌고 그녀는 밀면서 부산 책방에 도매로 넘겼다. 1958년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이 필화사건에 휘말렸고 남편은 감옥에 구금됐다.

김종필은 1951년 2월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장녀와 결혼한 뒤 한국전쟁 중 미 육군 보병학교로 연수를 갔다.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수색중대장으로 참전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계속 정보장교로 복무했다. 1960년 그는 하극상 사건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됐고, 그 후 <사상계>를 방문했지만 사장인 장준하가 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1960년대 김희숙의 남편 장준하는 <사상계>를 통해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특별히 한일수교협상, 베트남 국군 파병을 통렬히 비판했다. 1965년 '조국 수호 협의회'에 참여해, 남편은 거리에서 한일 조약 반대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5•16 쿠데타 직후 <사상계> 사무실에 박정희가 군인을 보냈다. 박정희가 수하를 통해 수표를 전달하고자 함이었다. 남편은 그 수표를 눈앞에서 찢어버리고는 군인의 뺨을 후려쳤다.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 출신인 것을 남편은 경멸했다. 박정희는 김대중•김영삼을 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남편은 정통성과 사상까지 박정희의 가장 아픈 치부를 꿰뚫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중에 박정희는 남편의 뿌리(자손)까지 없애버리고 싶어했다.

그녀는 <사상계>가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절에도, 1967년 남편이 국회의원이 됐던 시절에도 궁핍하게 생활했다. 1962년 8월, 남편이 필리핀정부로부터 막사이사이상 언론 문학상을 받고 서울 신촌에 집을 지어 석 달간 살아본 게 그녀에게 '내 집'의 전부였다. 박정희 정권이 <사상계>에 세금을 퍼부으면서 빚을 지고 그 집에서 쫓겨난 뒤로 3남 2녀를 둔 그녀와 남편은 월셋방을 전전했다.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녀는 봉투붙이는 일과 삯바느질 등으로 연명했다.

한번은 그녀가 가계부라는 것을 써보고 싶다고 하니, 얼마 후 남편이 생활비라며 봉투를 줬다. 너무 좋아서 그녀가 가계부를 만들었는데 이튿날 남편이 돈을 꿔달라는 거였다. 남편은 그 돈을 친구 아들의 등록금으로 줬다. 결혼식 주례를 서고 받은 양복지도 어느 날 찾아보면 사라지고 없었다. 남편이 그녀 모르게 형무소에서 나온 제자나 어려운 이웃에게 준 것이다. 그녀가 바느질집에 가서 일하고 외상도 하면서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터라 서운해 하면, 남편은 '내가 밥은 굶기지 않을게, 미안해요'라고 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국가원수 모독죄 등 혐의를 씌워 1966년과 1967년 남편을 구속시켰다. 그러나 남편은 굴하지 않고 1967년 6월 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구에서 출마해 압도적 지지로 옥중 당선됐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결국 부정부패를 폭로한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은 것을 빌미로 1970년 <사상계>를 폐간시켰다.


▲ 중앙정보부장 시절.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1961년 박정희를 도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김종필은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월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특별히 1961년 7월에는 <사상계>의 필진 함석헌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하자 <사상계> 사장인 그녀 남편을 불러 취조했다. 남편을 취조하면서 그는 함석헌의 5•16을 비판한 글을 문제 삼았다.

김종필 :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 따위 글을 도대체 무슨 저의로 여기에 실었소? 성스러운 혁명 과업 수행에서 당신은 우리 군사혁명을 모독하자는 거요? 이걸 싣게 된 경위와 목적을 말하시오."
장준하 : "이 글은 내가 직접 함 선생께 부탁해서 내손으로 받아다 내가 읽어 보고 실은 것이오..."

중앙정보부장 시절 모든 민간 정치인들을 정치규제로 묶어놓은 상태에서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사전에 조직하면서 정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4대 의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서 그는 중앙정보부장을 물러나고 외유의 길에 올랐다.

그러다가 그는 군사정권의 민정 이양이 결정되자 귀국해서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절 공화당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박정희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친위세력의 견제로 장기간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그는 1964년 일본 오히라 외상과의 막후교섭으로 한일협정 성립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일제강점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자금을 임의로 전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국민들이 일본에게 직접 배상을 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일본에서 이미 다 배상했다며 큰소리칠 수 있게 만든 구실을 김종필이 제공했다는 역사적 책임에서 그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70년대 이후 김희숙] 남편, 의문의 죽음 그리고 가혹한 괴롭힘


▲ 생전의 장준하 선생 ⓒ 장호준

1973년 그녀의 남편 장준하는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최고위원에 뽑혔다. 1973년 12월 24일 남편은 전격적으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켜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서 1974년 4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혐의로 구속됐으며, "헌법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출감 후 감회를 남편은 이렇게 밝혔다.

"죽어서야 나올 줄 알았는데 학생들을 놔두고 혼자 나오니 가슴이 아프다."

출감 직후 김옥길 등이 방문했고, 입원 후에는 함석헌의 방문을 받았다.

퇴원 후 재야세력 결집에 힘쓰던 중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남편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경찰은 실족사로 처리했고,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언론도 입을 다물었다. 남편을 잃은 후 그녀 김희숙은 매일 기도했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신께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련은 길고 모질었다. 남편의 의문사 이후 중앙정보부를 통해 내내 가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일체 어떠한 생계 수단도 가질 수 없도록 괴롭혔다. 정부의 감시를 받으며 삯바느질과 성당에서 주검을 씻기고 수의를 챙겨 입히는 입관 봉사를 하면 주위에서 이것저것 챙겨줬다. 그렇게 그녀는 3남 2녀를 남편 없이 키우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아버지 죽음의 의혹을 밝히겠다고 동분서주하던 장남은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턱뼈가 조각나 석 달간 병원 신세를 졌다. 집 주변에는 박정희의 기관원들이 깔려 있었다. 8년간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집주인이 '제발 나가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아이들이 해코지 당할까봐 늘 조마조마하면서 산 탓에 그녀는 심장병까지 생겼다.

그녀 자녀들은 취직도 원천봉쇄됐다. 자녀들이 지인들을 찾아가서 취직을 부탁한 다음날이면 정보기관에서 그 회사에 압력을 가했다. 아는 사람이 보다 못해 자신의 서점에서 장남을 일하도록 해줬지만 장남은 석 달 만에 스스로 나왔다. 기관원들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주인에게 '세금은 잘 내느냐'는 식으로 괴롭히는데 도저히 미안해서 더 이상 일할 수 가 없었다.

수입이 없으니 연탄 살 돈이 없어 그녀와 자녀들은 겨울에는 냉방에서 떨었다. 끼니 해결조차 어려운 날이 많았다. 힘들었던 시절, 그래도 몰래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야밤에 누군가 몰래 담장 너머로 던져놓고 간 쌀이나 고기 한 덩어리가 있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와 아이들을 감시하던 형사가 보기 딱했던지 김치 한 포기를 놓고 간 적도 있었다.

그녀에게 쌀 한 가마니를 보내준 김옥길 당시 이화여대 총장은 이튿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중정요원들은 김 총장에게 '그 집에 쌀을 준 것은 곧 유신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폈다.


▲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에서 열린 '장준하 공원 제막식 및 제37주기 추도식'에서 장남 장호권씨가 부친의 '정치적 암살' 의혹에 대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권우성

박정희 정권의 치밀한 탄압에 셋집을 구하기가 어려워 나중에 그녀와 아이들은 흉가를 찾아 세 들어 살기도 했다. 사람들이 기피하니 월세도 싸고 주인 타박도 적었다. 자주 쫓겨나는 바람에 남편의 의문사 후 그녀와 아이들은 이사만 서른 번 넘게 다녔다. 나중엔 그도 여의치 않아 며느리는 친정집으로 돌아갔고, 그녀와 3남 2녀 자녀들은 여관의 방 한 칸에서 6개월간 살았다. 돈이 없어 라면만 먹었다. 그러다가 살기 위해 그녀는 사랑하는 자녀들과도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중정요원들에게 테러를 당한 장남은 1979년 홀로 말레이시아로 도주했다. 한국에 있으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아버지의 죽음도 언젠가 파헤칠 생각이었다. 막노동을 하며 버티다 1982년 정권이 바뀌어 '이젠 괜찮겠지' 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그를 체포한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는 재야인사와 운동권 학생들의 은신처를 대라고 장남에게 추궁했다. 그래서 장남은 감시가 느슨해진 틈에 다시 싱가포르로 도주했다. 그렇게 24년을 해외에서 떠돈 뒤, 장남은 2003년이 돼서야 모국땅을 다시 밟았다.

차남은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가 쫓겨난 후 여러 직장을 전전했고, 삼녀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불법체류자로 살아왔다. 사녀는 결혼 후 제주도에서 살았다. 고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던 막내는 뒤늦게 신학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스쿨버스 운전사 일을 하며 목회를 하고 있다. 남편을 앗아간 박정희 정권의 핍박은 끈질기게 잔인했다.

[1970년대 이후 김종필] 최장수 총리, 정계은퇴, DJP연합

김종필은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 후 5년 6개월간 최장수 총리를 지냈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그는 여당인 민주공화당 총재에 선출됐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당시 부정축재자로 발표되며 강제로 일부 재산을 헌납하고 정계은퇴 선언을 한 뒤 미국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그는 정치에 복귀해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4위에 올랐다.

1989년 그는 노태우, 김영삼과 의원내각제 개헌을 합의하고 3당 합당에 참여했다. 1998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연합했고, 결국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그는 국무총리가 됐다. 그는 골프광이기도 했는데, 1999년 외환위기 상황에도 골프를 중지하지 않고 친 실세 총리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집권 후 2년 이내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시작했던 그와 김대중의 연합은 199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각제 개헌 이행 유무와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2000년 그는 김대중 대통령과 갈라서게 된다.

[2000년대 이후 김희숙] 남편의 타살 정황... 임종 못 지킨 막내


▲ 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12년 12월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도리 장준하 공원에서 고인의 사인 규명을 위한 유골 정밀감식을 위해 개묘작업을 해 고인의 두개골을 수습하고 있는 모습. ⓒ 권우성

김희숙은 2001년 서울시와 국가보훈처의 배려로 국가유공자 영구 임대아파트에 입주, 독립유공자 연금을 받아 근근이 생활해왔다.

2012년 8월 1일 파주 통일동산으로 이장하며 검안한 남편 유골에서 지름 6~7cm의 원형 상흔이 발견됐다. 그동안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진 남편 장준하의 유골에서 타살 정황이 공개된 것이다. 그녀는 한 많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 평생 가장 미안하고 마음 아픈 건 우리 애들이에요. 배 많이 곯게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게 하고 고생만 시켰으니까요. 남편에게 몹쓸짓 했던 군사정부의 핍박이 아이들에게까지 오랜 기간 계속된 것이지요. 어린 막내가 배고프고 힘들다고 할 때 아버지가 큰 유산을 남겼다고 하면 그 유산 지금 먹으면 안되냐고 했어요. 저는 그 유산은 대대손손 쓰는 거라고 말해줬지요..."(2012년 <경향신문> 인터뷰 중)

그녀는 지난 2014년부터 췌장암, 심장병, 신부전증으로 온몸이 성하지 않았다.


▲ 박근혜 정권 시절 장호준 목사가 국내외 신문에 한 광고 ⓒ 장호준

2016년 미국에 살고 있는 그녀의 막내아들 장호준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해외에서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 광고를 게재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2016년 3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그녀의 막내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막내는 2015년 말부터 해외언론에 '불의한 정권을 투표로 심판합시다'라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했다. 중앙선관위는 막내가 선거를 앞두고 충분히 유추할 수 있도록 특정 정당을 비판했고, 이것이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고발했다. 중앙선관위의 요청을 받은 외교부 역시 2021년 4월 13일까지 막내의 여권 효력을 무효로 하는 조처를 했다. 해외에서 선거법을 위반해 여권 무효화된 사례는 2012년 재외선거가 도입된 이후 장호준이 처음인 것이다.

올해 4월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판사는 막내에게 벌금 200만 원을 선고했다. 막내는 "검사가 벌금 70만 원을 구형했는데 판사가 벌금 200만 원을 내라고 판결한 것"이라며 "정치적인 사건에서 판사가 검사의 구형보다 더 높은 징계를 내리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평했다. 막내는 재판부의 1심 판결에 대해 현재 항소를 제기한 상태다.


▲ 김희숙 여사의 막내아들 장호준 목사. ⓒ 장호준

막내는 그녀의 임종을 보기 위해 입국하려면 항소심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막내는 당장 입국하지 못하더라도 항소심은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막내는 지난 6월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제는 어머님이 말씀조차 못 하실 만큼 위독하시지만, 저는 제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자식이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 위해, 정의로운 일을 위해, 항소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모습 보시기를 더 원하시리라 믿는다"라면서 "동지 여러분들의 염려와 걱정 진심으로 고맙습니다만 저는 아버지의 삶과 제가 믿는 어머님의 뜻을 따라 항소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막내는 어머니를 뵙고 싶지만, 항소를 포기하는 것은 불의에 대한 타협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이를 원하지 않으실 것이란 입장"이라고 밝혔다.

지난 6월 의식을 잃기 전까지 김희숙은 자신의 임종을 보고 싶어하지만 입국하지 못하는 막내를 많이 그리워했다. 지난 6월 27일 그녀와 막내는 마지막으로 국제 전화통화를 했다. 그녀는 통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막내가 목소리를 크게 높여 수화기 너머로 이런저런 말을 했고 그녀가 조금 반응을 했다. 그후 그녀는 의식을 잃고 지난 7월 2일 고난에 찬 삶을 마쳤다.

[2000년대 이후 김종필] 줄어든 영향력, 사망 뒤엔 훈장을...

매번 대선 때마다 영향력을 과시하던 그였지만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는 김종필은 이미 고령이 됐다. 게다가 2000년 총선 참패 등 세가 크게 위축된 상태였기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2004년에 제17대 총선에서 낙마하고 그는 정계를 은퇴했다. 사상 첫 10선 국회의원을 노리던 그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2007년 대선에서 그는 이명박을 지지했고 부족하나마 소원을 이뤘다. 2016년 들어서 대권을 준비 중인 반기문이 외교행낭을 통해 편지를 보냈고, 그는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반기문을) 돕겠다"라고 화답했다.

그리고 2017년 19대 대선 당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그를 방문했다. 당시 그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당시 홍준표와 만난 자리에서 "문재인이 같은 그런 얼굴은 대통령이 될 수가 없는데 세상이 우스워졌다"라면서 "대통령이 앞섰다고 그러는데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말했다.

그는 "난 뭘 봐도 문재인이가 돼서는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라며 "문재인이 얼마 전 한창 으스대고 있을 때 한 소리가 있다, 당선되면 김정은을 만나러 간다고, 이런 놈을 뭘 보고 지지를 하느냐는 말이냐, 김정은이가 지 할아버지라도 되나.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했다.

지난 6월 23일 아침. 그는 신당동 자택에서 호흡곤란으로 순천향병원으로 이송 중 심장이 정지했다. 응급실 도착 후에도 심폐소생술을 지속했으나 사망했다. 그런 그에게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을 둔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역사의 역설, 역설의 역사


▲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 반대투쟁에 앞장서다 숨진 채 발견된 고(故)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가 지난 2일 별세했다.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고인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 오마이뉴스 기사화면


▲ 김종필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27일 오전 서울 송파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 영결식에 영정사진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김종필은 5.16 군사쿠데타의 주동자이자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2인자였다. 항일독립군이자 민주화 운동가의 자손인 김희숙의 막내는 "불의한 정권을 심판하자"라는 광고를 냈다가 박근혜 정권 하에서 여권을 취소당해 어머니의 임종도 못 지켰다.

그러나 군사독재 쿠데타의 주역인 김종필의 죽음 앞에 놓여진 것은 훈장이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아! 지금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두 인생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기쁨보다는 슬픔과 비애가 눈앞을 가린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7월 13일, 금 9:4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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