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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My brother who wrote a suicide note the day after his birthday 051618
생일 다음 날 유서 쓴 동생, 저는 유가족이 되었습니다
[30년 전에 쓴 유서①] 어두운 시대 작은 사람의 아들


(서울=오마이뉴스) 박래군 기자(인권재단 사람 소장)

30년 전인 19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에 다니던 박래전 열사는 ‘광주 학살원흉의 처단’을 외치며 분신했고, 6월 6일 사망했습니다. 어느 덧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30주기를 맞아서 박래전 열사의 뜻과 시를 알리려고 합니다. 뒷전에 밀어두었던 유품들을 정리하고 작은 추모관도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 스토리 연재에는 박래군 소장(인권재단 사람)과 김응교 시인(문화평론가, 숙명여대 교수)이 같이 글을 쓰고 <오마이뉴스>가 함께 합니다. 좋은기사원고료를 3만원 이상 후원해주시는 분들께는 박래전 열사를 알리는 책 <1988 박래전>을 드립니다. 주소를 남겨주세요. 7회 동안 연재되는 박래전 열사의 이야기와 그의 시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이름을 추모관에 적어두겠습니다. [편집자말]

박래전, 제 동생입니다. 만 25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그 뒤 30년이 지났으니 우리 나이로는 쉰여섯이겠군요. 그 동생을 30년 동안 사진으로만 만납니다. 30년 전에 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별은 갑자기 찾아왔고, 그만큼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에서 맞아야 했던 이별이었습니다. 이별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30년이 지난 오늘도 어제 일처럼 기억합니다.


▲ 박래전 열사 1988.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 시절 투쟁을 이끄는 박래전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동생을 마지막 만난 건 30년 전의 5월 23일이었습니다.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습니다. 동생은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학생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여러 학내외 시위로 인해서 비공개 수배 상태였습니다. 학교로 나오기만 하면 형사들에게 잡혀갈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학교에 은신해 있었습니다. 동생을 만나기 위해서는 학교로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런 그가 시골집에 내려왔습니다.

산밭에서 부모님과 참외를 심고 있었는데 껑충한 키의 동생이 올라왔습니다. 부모님을 만나서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어머님을 끌어안고 얼굴을 부볐습니다. 평소의 동생 모습이었습니다. 동생은 어쩐 일인지 안산에 사는 형네도 들러서 하루 밤을 지내고 왔다고 했습니다. 형과 형수도 보고, 조카들도 다 보고 왔다고 했습니다. 비공개 수배 상태인지라 걱정이 되었습니다.

동생과 마지막 통화를 한 날은 6월 1일, 동생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날이었습니다. 한 출판사에서 원고를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화를 달라는 요청을 전해 듣고 학교로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이 내 생일이잖아. 잊었어, 형?"

저는 동생의 생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으면서 며칠 있다가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일 다음날 동생은 유서를 썼습니다. "어머님, 아버님께" 남긴 유서에는 "6월 2일 불효자 막내 드림"이라고 썼고,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참 인간이고자 했던 작은 사람의 아들이 이땅의 모든 사람에게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유서와 "사랑하는 한반도의 백만 학도에게"란 제목의 유서에는 "광주민중항쟁 8년 6월 2일"이라고 썼습니다.

생일 뒤에 유서를 쓰다


▲ 박래전 열사 중학교 졸업식. 부모님과 함께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짐작하시겠지만, 제 동생은 1988년 6월 4일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고,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화상병동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가 6월 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핸드폰도 없던 때라서 동생이 마지막으로 출판사에 전화를 했을 때 받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생의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동생이 분신한 줄도 모르고 선배의 영안실을 지키다가 자취방에 들어갔고, 새벽에 형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안양에서 택시를 타고 영등포까지 갔습니다. 택시 안에서 평소 믿지도 않은 신들에게 기도했습니다. 제발 래전이를 살려만 주시라고.

동생은 중환자실에 온몸을 붕대로 칭칭 동여맨 미이라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링거 병들과 각종 기기들이 매달린 병실, 한 눈에 봐도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며칠 전 전화를 했었고,산밭에서도 만났던 그 동생이 형도 알아보지 못하고 의식도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붕대로 감긴 손발은 얼음장이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어서 진물이 흐르고 온몸에 일어난 수포를 긁어내고 소독을 해야 했습니다.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습니다. 병실을 어떻게 나왔는지 계단에 나와 앉아 있는데 과 선배가 옆에 앉아서 담배를 물려주었습니다. "네가 정신 차려야 돼." 머리만 끄덕이는 내게 동생이 쓴 유서를 내밀었습니다. 너무도 익숙한 필체로 쓰인 유서들…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읽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읽어 봐라. 네가 정신 차려야지, 부모님들도 계신데."


▲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오열하는 박래전 열사 아버지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정신 차려야 한다, 내가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통곡하는 어머님, 아버님, 래전이는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데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독하게 마음먹자, 래전이는 일어날 거야. 화상 입었으면 어때, 살기만 해라. 그렇지만 그런 기도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머님은 "장한 내 아들 래전아! 앞으로 일어나 엄마와 같이 싸우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어머님은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하는 걸 막지 말 걸. 래전이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라고 그럴 걸 그랬다"면서 우셨습니다. 아버님은 "래전이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얼굴을 감아쥐고 통곡하셨습니다.

동생은 너무 고통스러워해 했습니다. 밖에서는 숭실대 학생들이 분신한 날부터 달려와서 병원을 지켰습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나가서 가족을 대표해서 고맙다고, 자리를 지켜달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모두의 염원도 뒤로 하고 동생은 분신 이틀 뒤인 6월 6일 낮 12시 23분,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고, 심장의 맥박을 나타내는 기계장치에서는 삑삑 경고음이 울리고 녹색 그래프는 점차 가로 선의 형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심장이 더 이상 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유가족이 되었습니다.

유서를 마음에 새기며


▲ 박래전 열사 추모제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 박래전 열사 추모제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7일 간의 민주국민장 장례를 마치고 나서야 저는 동생의 유서를 제대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몇 번 대충 읽어 봤지만 동생의 유서를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단단히 마음먹고 시골집 방에 들어앉아서 유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눈물이 범벅이 되어 읽어간 유서, 그리고 그 유서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어두운 시대를 열정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한 인간이 여러분의 곁을 떠납니다. 87년 6월 항쟁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개량의 환상, 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의 대오를 굳게 하십시오. 아직은 할 일이 많은 때 먼저 가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죽어간 많은 사람들은 여러분의 투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서를 남기고 동생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를 마지막으로 잡을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5월 23일 산밭에 왔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습니다. 그때 동생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어도 세상 사람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아, 너무 자신만 알어, 형은 (최)덕수 병원에 가 봤어?"


▲ 박래전 열사 초상화 (2018 최강현)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최덕수는 그해 5월 18일 단국대 천안 캠퍼스에서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분신해서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투병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5월 26일 운명했던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조성만 장례식 때는 명동성당에 조문을 가보기는 했지만, 최덕수의 병원에는 가보지 않았습니다.

뭔가 개인의 결단으로 상황을 돌파해보겠다는 게 영 마뜩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동생은 최덕수의 병원을 지키고 장례식 때도 최덕수의 곁을 계속 지켜서 그의 아버지도 기억하고 계실 정도였습니다. 산밭에 왔을 때는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뵈러 온 것이고, 결심을 한 뒤였을 거라고 짐작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짐작은 이미 늦었습니다.

저는 동생의 죽음 뒤에 인권활동가로 사는 유가족이 되었습니다. (계속) (본보 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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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짐: 2018년 5월 18일, 금 6:4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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