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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To save a spy grandmom 021418
'간첩' 할머니 구하기, 일본 러브호텔이 단서
[인권을 먹다4] 박순애 할머니와 떡갈비


(서울=오마이뉴스) 변상철 기자 =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을 징역 15년 및 자격정지 15년에 처한다."

2012년 7월 23일 서울고등법원 제10형사부(재판장 판사 조경란) 판사는 주문을 읽고 일어섰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듯 박순애 할머니는 한참 동안 피고인석에 서 있었다. 법원 직원이 다가와 '이제 나가셔도 됩니다'라고 이야기 하자, 그녀는 '끝난 거야? 어떻게 된 거야?'라고 되물으며 직원 손에 이끌려 법정 밖으로 나왔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죄가 선고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재심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너무도 억울하고 분했다.

"준비됐어? 지하실! 전기선 준비됐지?"

사실 나와 할머니와의 인연은 좀 독특했다.

그녀는 2006년 간첩으로 조작됐다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그녀는 1969년 7월 재일교포와의 결혼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일본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1년여 만에 가정불화로 이혼을 하게 되었고, 그녀는 불법체류인 신세가 되어 오사카에서 호텔 종업원 등으로 종사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74년 재일교포와 동거하였으나 체류기간이 연장되지 못해 1977년 7월 입국관리소 직원에게 검거되었다. 이후 같은 해 9월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였다.

"김포공항에 오니까 정보부 사람이 나와서 '불법체류자들은 의례적으로 3일 정도 조사한다'면서 옛날 특무대가 있던 곳으로 데려가더라고요. 내가 간 다음 날 중앙정보부가 남산으로 이사한다면서 남산에 있는 정보부로 날 데려갔어요. 새 건물이라 책상도 다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한 곳이더라고."

그곳에서 그녀는 수사관에게 일본에서의 생활을 모두 이야기 했다. 한 번의 결혼과 한 번의 동거생활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취업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것도 모두 털어놓았다.

"성이 '배'씨인 수사관한테 그랬지. '한번은 요코하마에서 취직을 하려고 한 적이 있는데 그 집이 조총련 집이라서 도망쳐 나왔다'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근데 갑자기 그 수사관 태도가 변하더니 나한테 막 하는거야.

'벽을 보고 서라', '손들고 서 있어라'하더니 나중에는 각목으로 엉덩이를 막 패기도 하더라니까. 내가 몸이 힘들고 아프다고 하니까 의사가 간간이 들어와서 혈압을 재 줬는데 그 의사가 혈압이 낮다고 하니까 좀 덜 때리더라고. 내가 조총련 집 이야기를 괜히 해 버렸당께."

그녀가 구타 당한 이유는 북한에 다녀 왔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가지도 않은 북한을 왕래했다고 인정하라고 했다. 버티고 버텼다. 아니, 하지 않은 것이니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배' 수사관이 이북 갔다 왔다고 인정하라고 해서 어떻게 안 간 것을 인정 하냐고 하니까 어느 날 아침 전화로 '준비 됐어? 지하실! 전기선 준비 됐지?' 하는 거야. 난 속으로 '이 놈들이 전기고문을 하려고 준비하는 구나'하고 생각이 들더라고. 마음이 약해졌지.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하다간 죽겠다 싶어서 감옥에서 몇 년만 살고 나오자 하고 마음 먹었지."

할머니는 그렇게 자신이 간첩이라고 인정했다. 검찰과 법원에서 고문을 당해 허위 자백했다는 것을 말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심지어 국선변호인에게도 구타 사실을 상세히 말했지만 법정에서 고문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죽은 자가 간첩이 되고 산 자는 죄인이 되었다

"일본에 있을 때 기미꼬라는 여성이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줬어. 그 여자가 일본에 있을 때 호텔 취업도 도와주고 했었거든. 그 여자를 만나 보면 내가 간첩 안 했다는 걸 증명해 줄 거야."

나는 기미꼬를 비롯해 당시 그녀가 도망쳐 나왔다는 요코하마의 조총련 집도 찾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를 변론했다는 변호인도 찾아 보았다.

2009년 12월 일본 고베시로 찾아가 기미꼬를 만났다. 그녀는 할머니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1972년 11월부터 1973년 2월 사이에 북한에 입북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의 이런 질문에 그녀는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그때는 그녀가 플로리다 호텔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인데 어떻게 북한에 다녀올 수 있습니까? 1973년 1월 1일에 우리 집에 와서 함께 밥도 먹었다는 것을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우리는 시즈오카(靜岡)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할머니가 요코하마에 있을때 취직할 뻔 했다고 했던 조총련 집 가족을 만났다. 당시 조총련 집에 살던 딸이 시즈오카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미리 연락을 해 놓았던 덕에 그녀는 시즈오카 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중학교 학생이었다는 그 아이는 이미 50대 초반의 여성이 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정자라고 합니다."

역 구내 커피숍에서 우리는 전후 사정을 이야기 했다. 이정자는 할머니가 12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눈물을 흘렸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며칠 우리 집에 왔던 기억이 있어요. 저하고 같이 목욕탕도 가고 했었거든요. 친절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런데 12년 감옥에 있었다니 도대체 왜 감옥에 가야 했습니까?"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판결문에는 할머니가 그곳에서 부모님의 권유로 아버님과 함께 북한에 다녀 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북한이요? 아버지와 함께? 무슨 소리예요. 아버지는 1972년에 신부전증을 앓고 계셔서 숨이 차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그 해에 결국 돌아가셨어요."
"그럼 1972년 11월에 할머니와 함께 갈 수 없는 몸이었다는 건가요?"

그녀는 반문했다.

"1972년 11월이라면 이미 아버지는 사망한 뒤였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떻게 북한에 갈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부친의 사망진단서를 제출했다. 죽은 자가 간첩이 되고 산 자는 죄인이 되었다.

플로리다 호텔을 찾아서


▲ "내가 북한에 갔다 왔다는 그 기간에 난 틀림없이 플로리다 호텔에 근무하고 있었거든." ⓒ unsplash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그녀의 부탁으로 할머니의 연락처를 전해 주었다.

위원회 조사에서 그녀는 37일간의 불법 감금과 구타가 확인되었다. 북한에 다녀 왔다는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두 명의 재일교포 증언이 있었기에 할머니의 진실을 법정에서 당연히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재심은 실패했다.

나는 크게 실망한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광주광역시 광진구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인근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송정 떡갈비 골목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문득 할머니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북한에 갔다 왔다는 그 기간에 난 틀림없이 플로리다 호텔에 근무하고 있었거든."
"플로리다 호텔을 다 뒤져 봤는데 지금 그런 호텔은 없더라구요. 대신 그 자리에 광성호텔인가가 들어서 있는 것만 확인했어요."
"그럼 광성호텔 사람들한테 물어서 플로리다 호텔에서 일했던 사람 물어 보면 안 될까? 호텔이 바뀌어도 종업원은 계속 일했을 수도 있잖아."

난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플로리다 호텔 사람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르는 일이니까 찾아봐 봐. 있을지도 모르잖아."

할머니는 간절했다. 자식도 가족도 없는 90가까운 노인이 왜 이토록 진실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할머니 이제 그만해요. 힘들지 않아요?'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난 목까지 치밀어 올랐던 그 말을 삼키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 가서 알아 볼 테니 큰 기대는 하지 말아요."

그렇게 나는 다시 2014년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어렵사리 오사카의 광성호텔을 찾았고 그곳의 직원의 도움으로 예전에 플로리다 호텔에서 근무했다는 일본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 일본 사람은 다시 자신의 선배 지배인이었던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선배 지배인의 수첩에는 예전 직원의 이름을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직도 그들은 간간이 연락하며 지내는 듯했다. 그는 고민고민 끝에 어렵사리 요네자와(가명)라는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녀라면 할머니와 함께 근무했던 사람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나도 연락처는 알지 못해요. 다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계속 했다.

"전화번호를 찾아보면 요네자와라는 이름의 사람을 찾을 수는 있을지도 몰라요."

그는 직접 전화번호부를 뒤져 전화번호를 찾아 주었다. 그리고는 몇 개의 전화번호를 찾아 직접 전화를 걸어 주기까지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전화를 걸 때마다 실망하며 전화기를 내려놓는 모습에 불안감이 커져갔다. 몇 번째일까 그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통화하던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찾았네요. 할머니와 함께 근무했던 사람을... 그런데"
"왜요? 무슨 문제라도?"
"아닌 게 아니라 플로리다 호텔이 러브호텔이었어요. 지금 이 여성도 가정을 꾸리고 손자 손녀와 함께 지내는 사람이라 과거의 이야기가 밝혀지는 것을 꺼려하네요."

아...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아쉬움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혹시 제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다시 연락을 해볼게요."

그는 다시 연락을 취했고, 한참 동안 그녀를 설득한 끝에 그날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어렵사리 기적처럼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옛 동료의 용기

커피숍에서 만난 그녀는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었다.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는 할머니와 다름없는 평범한 할머니였다. 그녀는 우리를 보자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도와드려야 하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죄송하긴요. 갑자기 연락 드려서 얼마나 놀라셨어요. 그래도 이렇게 나와 주신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제가 지금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들추고 싶지 않습니다. 자식이나 손자들이 알게 되면 제가 너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또 죄송하다고 한다. 죄송한 것은 우리 쪽인데도 말이다.

용기를 내서 말을 떼었다.

"할머니가 너무도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전화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도와 주신다면 할머니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꼭 말씀을 해 주십시오."

그녀는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돕고 싶다는 생각과 과거의 기억이 그녀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말을 했다.

"시간을 주십시오. 고민해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급하게 주소가 적힌 메모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 드립니다. 할머니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1개월 쯤 뒤에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플로리다 호텔에서 근무했던 요네자와씨의 편지였다. 그 편지는 그녀가 할머니와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함께 호텔에서 근무했고, 2일 이상 휴가를 내서 쉰 적이 없다는 확인서였다. 나는 그녀의 용기에 너무나도 크게 감사했다. 쉽지 않은 결정에 대해 뭐라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몰랐다.

그 확인서는 곧바로 대법원에 제출되었고, 거짓말처럼 대법원은 할머니의 재판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 보냈다. 결국 서울고등법원은 2015년 11월 6일 무죄를 선고(재판장 판사 서태환)하였고, 그 판결은 2016년 봄 최종 확정되었다.


▲ 떡갈비 ⓒ pixabay

무죄가 된 그 해 5월 할머니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도 또 송정 떡갈비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떡갈비 좋아하시네요. 할머니"
"그럼, 맛있잖아. 그리고 이가 안 좋아서 고기를 먹고 싶어도 질긴 고기는 못 먹어. 떡갈비는 잘 씹히잖아."

"할머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언제 일본 다녀오려고요. 할머니 도와준 사람들 얼굴 보고 인사하려고요."
"그려? 잘 생각했네. 내가 다리가 좀 안 아프면 같이 가고 싶은데, 대신 내가 고마워한다더라고 전해 줘. 나도 몸만 건강하면 일본에 가고 싶어. 한국 놈들은 날 괴롭히기만 해서 징글징글 해. 친구들이 있는 일본에 가서 친구들과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할머니를 도운 여자들


▲ 할머니의 재심에는 일본에 사는 여성들의 노력이 컸다. 그 중 한 명인 시즈오카의 이정자 씨. ⓒ 변상철

그리고 1년이 지난 2017년 12월 나는 다시 일본을 찾았다. 그동안 할머니를 도왔던 일본의 여성들을 찾아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미꼬와 요네자와 등은 몸이 불편하여 만나지 못했다. 다행히 시즈오카의 이정자씨는 만날 수 있었다. 이정자씨를 만나 할머니를 대신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녀는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누구의 잘못을 떠나서 저희 가족과 관련된 일로 할머니가 억울한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래도 다시 무죄가 되었다고 하니 정말 기쁩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녀는 깊이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감사는 저희가 드려야 하는데요. 어려운 말씀을 해주셔서 오히려 고맙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했거든요."

그녀는 할머니에 대한 마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가정상황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극단적인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절 많이 위로해 주었어요. 그 친구가 지금의 남편입니다. 저는 그 남편과 딸 3명을 낳고 잘 살고 있었죠. 그런데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할머니를 도왔던 것은 결국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여성들이었어요. 아픔과 차별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할머니를 도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네, 그렇습니다. 조사관을 만나고 나서 할머니에게 곧바로 연락을 했어요. 할머니도 굉장히 반가워했습니다. 한참을 울었어요. 그 뒤로 할머니는 계절마다 김치며, 고춧가루며, 김 같은 것을 보내줍니다. 엄마 같기도 하고 할머니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그런 말을 하며 조금씩 밝아졌다. 그녀가 밝아지는 만큼 할머니도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차별과 역차별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은 스스로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2월 17일, 토 5:0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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