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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The prophet, Mun Ik Whan 012418
“문 목사님, 한국 감옥은 그렇게 신나는 곳입니까?"
[문익환 목사 가택 박물관 프로젝트 ①] 무려 11년 3개월, 감옥 속 문익환


(서울=오마이뉴스) 김형수(작가)

사단법인 '통일의 집'은 <문익환 평전>을 쓴 김형수 작가와 함께 문익환 목사가 오랫동안 사셨던 '통일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카카오 스토리펀딩과 더불어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문익환, 그는 누구인가?

한국의 언론들이 문익환에 대한 보도를 마지막으로 쏟아낸 것은 1999년이었다. 그 해가 지나면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된다 하여 세상이 아주 소란하던 참이었다.

한반도에서 20세기를 살았던 인물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때 가장 많이 언급된 이름이 김대중·박정희·문익환이었다. 흔히 김대중은 수난과 시련을 극복한 정치 지도자로, 박정희는 국민을 절대빈곤에서 탈출시킨 사람으로, 문익환은 민족사의 염원인 통일을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곤 했다.


▲ 늦봄과 봄길 한신대학교 사택 앞에서 젊은 늦봄 문익환 목사와 봄길 박용길 장로 ⓒ 사단법인 통일의 집

수난과 박해로 가득 찬 한국의 20세기를 살고 간 인물들 중에서 '문익환'처럼 그 지난한 시간들을 정면으로 관통하되 고통스런 장소들을 환희와 축제의 자리로 뒤바꿔버린 독보적인 생애는 없다. 대다수의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정치적이고, 문학적이며, 종교적인 비약을 한꺼번에 구현한 존재로서 문익환에 대한 추억이 간직돼 있다.

그래서 그는 1994년에 죽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처럼 우리들 일상의 언어 뒤에 숨어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대중미디어가 문익환의 이름을 박제화된 지식과 교양의 영역으로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세월은 덧없는 것이니 문익환은 그새 태어난 지 100년이 되었고, 죽은 지는 24년이 되고 말았다. 그에 대한 기억은 날마다 희미해져가고,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조차 생소해 한다.


▲ 거리에 선 목사 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민주화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는 시인, 신학자, 목사 그리고 민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선지자였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구약성서를 번역하던 신학자, 민주화 운동에 나서다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은 함경북도에서 실학과 동학에 참여했던 유학자 네 가문이 두만강을 건너가서 만든 교육적 '대안 마을'이었다. 일제에 맞서는 학문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아버지 문재린은 3.1독립만세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네 번의 옥고를 치르고, 어머니 김신묵은 이동휘 선생의 딸과 함께 7인의 여자비밀결사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문익환은 송몽규, 윤동주와 어울려 명동학교를 다녔다. 특히 윤동주와는 평양의 숭실학교도 함께 가고, 신사참배 거부로 자퇴도 같이 했으며, 학교를 세 차례나 옮길 때도 늘 동행했다. 그리고 스물한 살 때 진보적인 신학을 접하고자 일본신학교에 유학하는데, 그 시절에 만난 전도사 박용길과 1944년에 결혼한다.

목회 활동을 시작한 것은 도쿄 유학 5년째에 학병을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가서부터이다. 해방 후 서울에서 한국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에 지원해 통역자의 신분으로 정전 회담에 참여한다. 그 후 한국을 대표하는 구약학자로서 한신대, 연세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1968년부터 신·구교 공동 성서번역의 책임을 맡으면서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976년에 '3․1 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하면서 재야활동에 나선다. 이때가 59세였다.

문익환은 행동파 신학자 본회퍼를 좋아했다. 신학적 원리와 진리에 따라 어떤 박해나 오해 앞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독일의 신학자, 교회와 세상의 벽을 무너뜨린 본회퍼처럼 문익환도 재야운동에 몸을 던진 뒤 목숨을 내놓고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까닭에, 신학자이면서 시인이요, 목사이면서 재야운동가로서 그의 생애는 릴케의 <기도시집>을 번역하던 고요한 시절로부터 광야에 홀로 선 제사장처럼 독재자 앞에서도 포효를 멈추지 않던 투사의 시절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다.

그가 이 땅의 역사의 흐름을 '죽임의 역사'에서 '살림의 역사'로 바꾸기 위해 투옥된 기간은 총 6회에 걸쳐 도합 11년 3개월이 넘는다. 그러면서 단 한 번도 징역살이를 하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거나 덜 하려고 석방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


▲ 법정에 들어서는 문익환 그는 행동하는 신학자로 윤동주와 장준하의 뒤를 잇고자 했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미움보다는 사랑, 분열보다는 화해, 원한보다는 믿음과 화합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임을 보여준 평화의 사제(司祭)였다는 점이다. 그는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민중을 위해 산화한 전태일과 통일의 순교자 장준하의 부활이라 명명하면서 전태일과 장준하의 죽음이 가리키는 길을 가고자 했다.

그 기념비의 하나로서 1989년 '방북' 때 남긴 "민주주의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는 말은 한국 통일 운동의 최고 업적이 되어 후에 남북 민중의 마음을 전하는 극적인 공감대로 사용되었다. 통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문익환의 꿈을 그 원점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감옥은 그렇게 신나는 곳입니까?

문익환이 재야운동에 나서기 전까지 가장 권위 있었던 박형규 목사는 "문익환 목사가 재야에 나오자 그 엄숙하고 비장하던 곳이 대번에 즐거운 축제처럼 바뀌고 말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일본의 주부들이 취미활동으로 한국어를 공부하여 번역 대상물로 선정한 '가장 주목되는 한국어 텍스트'가 '문익환과 박용길의 편지'였는데 그들이 <문익환 옥중서신>을 출간한 뒤에 남긴 소감도 그랬다.

"한국의 감옥은 그렇게 신나는 곳입니까?"


▲ 활짝 웃고 있는 문익환. 민주화 투사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사랑과 화해를 전하는 평화의 사제였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이것이 문익환의 삶이다. 사람들은 세상이 너무 삭막하고 사랑의 마음이 식어버릴 때, 또 미래에 대한 꿈이 점점 사라져버릴 때 문익환 이야기를 하면서 생기를 되찾곤 한다. 문익환이라는 이름 속에는 마술 같은 부활의 힘이 숨어 있다.

우리가 희망을 잃었을 때 아무리 어렵고 시련이 닥쳐도 인간으로서의 꿈과 사랑을 잃지 않고 공동체를 지켜내어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고자 노력했던 문익환.

이 연재글을 통해 문익환을 오늘에 되살려 내보고자 한다.(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1월 27일, 토 11:3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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