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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연예/스포츠
 
Anti-government movement in movie 1987
"그때 여성들 고추장으로 '전두환 타도' 쓰며 외쳤다"
[1987, 연희 ①] 유시춘 작가 "유치장에서 하루라도 잔 여성 모으고 싶어"


(서울=오마이뉴스) 신나리 기자

영화 <1987> 김태리(연희 역)는 가공 인물이지만, 1987년 길 곳곳에는 진짜 연희가 있었습니다. 어떤 연희는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삼베를 뒤집어쓰고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외쳤습니다. 어떤 연희는 학교 캠퍼스 안에서 '스크럼을 짜고' 민주주의를 말하며 정문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습니다. 어떤 연희는 카네이션과 박종철 열사의 사진을 들고 길에 나섰습니다. 수많은 연희가 있었지만 제대로 기록된 연희는 없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1987년의 연희를 찾아 그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시위 유시춘 작가는 1987년 6·10항쟁 전, 이화여대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인상적으로 꼽았다. 그는 이 사진을 ‘80년 5월에서 87년 6월로’의 사진집 첫 페이지에 실었다. (저작권자 윤석봉, 눈빛출판사 제공) ⓒ 윤석봉

군복 무늬의 바지를 입고 흰 마스크를 쓴 채 한 손에 돌을 집어 들고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제 자리에서 번쩍 뛰어 그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허리에 양손을 얹고 무언가를 외치는 수십 명의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아마도 '호헌 철폐 독재 타도'였을 것이다. 1987년 6·10 항쟁 전, 이화여대(이하 이대) 학생들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다.

사진을 발견한 유시춘 작가(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눈이 번쩍 뜨였다. 한 번도 기록된 적 없던 여성의 민주화 운동. 이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편집하던 '80년 5월에서 87년 6월로'의 사진집 첫 페이지에 이대 학생들의 사진을 넣었다.

"내가 이 사진의 주인공을 너무 찾고 싶어서 2006년 신문에 광고도 냈잖아요. 결국, 찾았지. 지금 LA에서 주부로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꼭 이걸 6.10항쟁을 기념하는 사진집 맨 앞에 싣고 싶었어요. 여성의 역사는 한 번도 기록된 적이 없으니까. '우리도 있었다, 여성들도 있었다, 우리도 침묵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가 사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록된 적 없는 역사. 유 작가는 기록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 기록하기 위해 보고 듣고 말하며 쓴다. 영화 <1987>에서 연희는 한 명이었지만, 그가 만난 연희는 수백 명이었다. 유 작가 자신도 수많은 연희 중 한 명이었다. 지난 17일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앞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머리채 잡히고 난지도를 걷다


▲ 유시춘 작가가 6.10항쟁 당시 올라갔던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종탑 앞 마당에 30년이 지나 다시 섰다. ⓒ 이희훈


▲ 6.10항쟁 당시 유시춘 작가가 올라갔던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종탑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이희훈

1987년 6월 10일, 유 작가는 바로 이곳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종탑에 올랐다.

"지금 이 시각 진행되고 있는 반민주적 반역사적 사기극을 즉각 중단할 것을 국민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유 작가가 외쳤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상임집행위원 30명 중 한 명으로, 총 다섯 명의 여성위원 중 한 명으로, 민주주의를 바란 시민 중 한 명으로 낸 외침이다.

종탑에서 섰을 때 종소리에 놀라 나무에서 날아간 비둘기를 봤다. 창공으로 자유롭게 날아갔다. 밝은 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품고 사는 기억이다. 그 덕분인지 성명을 발표하기 전 무섭거나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유 작가는 이미 1987년 6월 항쟁이 있기 2년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 총무로 활동하며 법정, 집회, 교도소 앞을 지키며 독재의 엄혹함을 몸소 체험해왔다. 머리채를 잡힌 채 차에 태워 아무것도 없던 들판에 내려진 기억이 수차례다.

"1987 영화에 연희가 삼촌을 찾으러 갔는데, 경찰이 봉고차에 태워 어디 들판에 내버리잖아요. 저도 꼭 그랬어요. 저는 난지도 한가운데 버려졌어요. 그때 자유로 공사 중이었거든요. 일산 신도시도 없고 가양대교도 방화대교도 없던 때죠. 그냥 쓰레기 산이었어요. 거기에서 바람이 불면 먼지가 얼마나 많은지, 온몸에 먼지가 쌓여 눈사람이 된 채로 두 시간을 성산대교까지 걸어왔어요."

교도소와 법정을 쫓아다니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 외침의 첫머리에는 유 작가의 동생이 있다. 알려진 대로 그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국어교사로 지내던 1984년, 동생인 유 전 장관이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감옥으로 끌려갔다. 유 작가는 그 길로 투쟁을 시작했다. '의를 구하는 자는 죄인입니까.' 동생의 구속 소식을 듣고 서울대 총학생회에 찾아가 붙인 대자보의 첫 구절이다.

"순둥이, 순둥이, 그런 순둥이가 없었어요. 그런 동생이 잡혀가니까 뭐 눈이 뒤집혔죠. 당시에 동생처럼 잡혀간 학생들의 엄마는 나라가 자식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니까 겁을 먹었죠.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얼른 반성문 쓰고 나오라고 자식들을 설득하던 엄마들을 붙잡고 설득했어요. 당신의 아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참 아들 잘 길렀다고. 정의와 자유, 인권을 추구하는 올바른 학생이니까, 그 아들·딸을 살리려면 반성할 게 아니라 싸워야 한다고 했죠. 그렇게 민가협이 탄생했어요."

고추장으로 쓴 '전두환 타도'


▲ 유시춘 작가가 6.10항쟁 당시 행동대원역할을 했던 유시경 성공회 신부와 숙식을 했던 성공회 성당 사제관을 바라보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 이희훈


▲ 유시춘 작가가 6.10항쟁 당시 올라갔던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과 영국 대사관 사이에서 당시 체포된 장소라며 설명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유 작가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여학생들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86년도 고대 수학과에 다니던 한 여학생의 엄마가 "우리 딸을 찾아달라"며 민가협을 찾았다. 교도소에서 딸의 서신과 접견을 금지했는데, 사정을 알아봐달라는 거였다. 그때는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만 면회가 가능했다. 유 작가는 곧장 변호사 출신 의원을 찾아 나섰다. 그 자신도 해당 학생이 수감된 의정부 교도소에 갔다.

"교도소장을 접견한 의원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놀랐어요. 그 때 교도소는 자해한다고 연필도 허락이 안 됐었거든요. 그런데 여학생 여섯 명이 하얀 러닝을 찢어 앞뒤로 이어붙인 다음에 거기에 고추장으로 '전두환 타도'를 쓴 거예요. 고추장으로요. 그리고 그걸 교도소 창틀 밖에 내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교도소에서 서신, 접견도 안 되는 벌을 받은 거죠. 전혀 쫄지도 않고 당당하게 그렇게 교도소 안에서 싸우고 있었더라고요."

유 작가는 그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교도소 정문 앞 흙 마당에서 밤을 새며 기다리다 들은 내용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도 아니었다. 단지 의분에 차서 화염병과 돌을 집어 들고 나선 이들이었다. 유 작가는 "그 애들 지금 어디서 뭐하는지 모르겠어요, 많이 궁금한데 만날 길이 없네요"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다만, 기록되지 못했을 뿐


▲ 유시춘 작가가 6.10항쟁 당시 올라갔던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종탑 앞 마당에 당시 사진을 들고 섰다. ⓒ 이희훈

어떤 투쟁이든 여성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 남성 할 거 없이 나서서 싸웠다. 외치다 끌려가고 싸우다 죽었던 시절에 여성들도 목소리를 냈다. 다만 그들의 목소리는 남겨지지 않았다.

"제가 68학번인데요, 문과대에 입학했을 때 1700명 중에 여자가 47명 있었어요.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아마 1% 됐을 거예요. 여성들이 대학에 가고 목소리를 내기 힘든 시절이었죠. 그래도 다들 참 열심히 싸웠어요. (19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때 구속된 사람 중 연대 신방과에 다니던 여학생이 있었고, 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학생 민주화 운동을 했을 때도 여학생들이 나섰어요. 그때 1200명이 구속됐는데, 여성이 최소 300명은 됐을 거예요. 다만, 기록되지 못했을 뿐이죠."

유 작가는 "여성들이 민주화 운동을 훈장처럼 달지도 않았고 그 덕으로 출세하지도 않아 남겨지지 않았다"라고 잘라 말했다.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싸우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 멋있게 투쟁한 언니들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출세를 꿈꾸지 않고 원칙만을 주장하며 싸웠던 목소리들을 기억했다.

"국본(1987년 6월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 편집자 주)에서도 그랬어요. 6.26 평화대행진 후에 김영삼 전 대통령 측의 이른바 상도동과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의 동교동에서 몇몇이 파견돼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더라고요. 일부 타협하며 협상해보자 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여성들은 강경했어요. 무슨 타협이 필요하냐며, 타협하면 우리의 적이라고 박아놓은 거죠.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밀고 나갔어요. 단호하고 강고하고 굳건하게 싸우자며 목소리를 낸 여성들이었어요."

유 작가는 다시금 그 목소리들을 모으고 싶었다. 여성들의 민주화 운동은 어땠는지 남기고 싶었다. 유신정권에 대항한 여성들부터 전두환 정권에서 투쟁한 여성들까지. 그 여성들을 찾고 싶었다.

"몇 년 전에 '유치장에서 하루라도 잔 뇬 모여라' 하면서 사람들을 모아봤어요. 독재정권에서 싸웠던 여성들을 모으는 게 목표였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다들 조용히 살고 있으니까요. 국회의원이 됐거나 어디서 한 자리씩 했다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모두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사는 거죠. 아마 자신의 삶 안에서 민주주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을 거예요. 언젠가는 젠더 관점에서 다시 보는 민주주의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해요. 지금이 그때였으면 좋겠어요."

그의 바람이다. 2018년, 연희들의 목소리는 모아질 수 있을까.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1월 26일, 금 6:3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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