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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YS Critical Biography 60
서도 익히며 조깅 시작
[김영삼 평전 60] 전두환 일당에 가택연금 당해



▲ 김영삼은 12.12 쿠테타로 전두환 소장이 정권을 잡아 연금이 되자 집안에 틀어박혀 붙글씨로 우울한 심사를 달랬다. ⓒ자료사진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전두환은 9월 29일 정부의 개헌심의위원회가 성안한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선출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했으며, 10월 22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새 헌법안은 우리나라 국민 투표사상 최고인 95.5%의 투표율과 91.6%의 찬성률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10월 27일 공포되었다. 국민투표 과정에서 ‘선거계도’라는 구실로 행정력이 동원되고 심지어 입원 중인 환자들까지도 투표에 동원하는 등 전례 드문 부정이 저질러졌다.

전두환의 목표는 보궐선거를 통한 대통령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선거가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2월 25일 실시되었다. 대통령후보는 민정당의 전두환, 민한당의 유치송, 국민당의 김종철, 민권당의 김의택 총재가 각각 입후보하여 총선거인 5,277명 중 5,271명이 투표에 참가, 전두환 후보가 4,755표를 얻어 90.2%의 다수표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은 3월 3일 임기 7년의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 제5공화국 정부를 출범시켰다. ‘역사상 가장 오랜 쿠데타’로 일컬어지는 12ㆍ12로부터 1년 3개월여 만이고, 5ㆍ17로부터는 10개월여 만에 마침내 대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입법회의는 80년 11월 7일 이른바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을 마련하여 5공정권의 적격 정치인 을 선발하려 했다. 이에 따라 11월 7일 정치쇄신 9인위원회가 정부 내에 발족되어 기성 정치인 가운데 정치활동을 금지시킬 규제대상자 선정작업에 착수했다.

입법회의는 1차로 정치활동 피규제자 811명의 명단을 공고하고 2차로 24명의 명단을 추가로 공고, 재심청구를 접수한다고 발표했다. 재심청구자는 1차 공고대상자 811명 중 569명에 달했고, 재심결과 268명이 정치활동금지 조치에서 해금되었다. 이로써 10대 국회의원을 비롯, 구청구인 567명이 99년 6월 30일까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발이 묶인 정치 피규제자 중에는 공화당의 김종필ㆍ정일권ㆍ구태희ㆍ길전식ㆍ김창근ㆍ김택수ㆍ육인수ㆍ이효상, 구 유정회의 최영희ㆍ태완선ㆍ백두진, 신민당의 김영삼ㆍ이철승ㆍ고흥문ㆍ이민우ㆍ이충환ㆍ신도환ㆍ황낙주 등이 망라되었다.

김영삼은 연금상태에서 가족과 찬송과 성경, 독서로 울연한 심경을 달래고 서도를 익혔다. 그의 서도는 이때에 시작되고 거산(巨山) 이란 아호는 작품을 모아 전시하면서 사용되었다. 건강을 추스르기 위해 비좁은 마당을 몇 바퀴씩 뛰었다. 그의 유명한 조깅도 이때부터였다.

붓글씨는 연금 중 내 마음을 달래 주는 벗이었다. 처음에는 붓 끝에 정신이 집중되지 않아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종이를 펴놓고 붓을 잡으면 잡념이 없어졌다. 단전호흡을 하듯 내 마음이 붓끝에 모였다. 나는 서예(書藝)라는 말보다 서도(書道)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즐겨 썼던 글은 자유(自由), 정의(正義), 대도무문(大道無門), 극세척도(克世拓道), 사필귀정(事必歸正), 민주광복(民主光復), 남북통일(南北統一) 등이었다. (주석 6)

연금 중에 쓴 서예작품은 1차 연금이 풀린 1981년 7월 9일부터 15일까지 부산에서 전시되어 3만여 명이 몰리면서 성황을 이루었다. 수익금은 양로원과 구속학생들의 사식비로 차입했다.

사람들이 자꾸 호(號)를 써 달라고 해서 임시변통으로 부산과 거제에서 한 글자씩을 따 거산(巨山)이라고 써 주었는데, 이것이 그 이후 내 호로 정착되었다. (주석 7)


<나와 내 조국의 진실> 저서 펴내

김영삼은 매일 책을 읽고 지난 정치인생을 돌아보는 글을 썼다. 원고가 한 권 분량이 되자 우연한 경로로 미국으로 반출되어 1982년 5월 17일 <나와 내 조국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국내에서는 2년이 지난 1984년 4월 19일 같은 이름으로 출간했다.

책은 41편의 글을 5장으로 나누어 엮었다. 제1장 평화를 찾아서, 제2장 나와 내 주변, 제3장 민주주의에의 길, 제4장 인간성을 찾아서, 제5장 한국의 발견이다. 서문에서 지은이의 글을 쓰게 된 편편록의 정신이 배인다. 서문의 전반부를 옮긴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누구에게 보여지리라는 전제 위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10ㆍ26사태 이후, 이제야 민주주의가 이 땅에 실현될 수 있으리라 믿던 국민의 갈망과 기대와는 달리, 5ㆍ17사태가 일어나서 민주적 신념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감옥으로 끌려갔고 나는 감옥 대신 상도동의 내 집에 갇혀 지내야 하는 몸이 되었다.

안개정국이 갑자기 칠흑같은 어둠의 정국으로 바뀐 것이다. 그 어둠 속에서 이 글들은 쓰여진 것이다.

나는 왜 애국적 민주인사들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왜 내 집을 감옥으로 하여 수인(囚人)의 생활을 강요당하는 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적어도 나로서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사실 나는 정치에 입문한 이래 언제나 주어진 상황에 쫓기는 몸이었을 뿐, 자신을 돌아보거나 정리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필묵으로 세상 일과 밑도 끝도 없는 상념(想念)들을 아무런 목적이나 의도 없이 정돈해 보는 것이 일과의 전부가 되었다.

나를 찾는 작업이라고나 할 이런 일들을 나는 반복했다. 이렇게 정처 없이 쓰여진 글들이 바로 이 책에 수록되었다. 이 책이 처음 외국에서 발간되게 된 것도 전혀 우연이었으며, 내 뜻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연금 중에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엄청난 분노나 갇힌 자의 악에 받힌 포효가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는 잔잔한 내 생각들이 표백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들에는 미숙하나마 나의 진실이, 그리고 찬찬하게 되돌아 본 내 조국의 진실이 나름대로 담겨져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내 조국의 진실을 흥분하거나 걱정어린 표정으로서 보다가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내 감정의 한 흐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바라는 어떤 기대를 갖고 이 책을 보기 보다는, 우리 조국이 서 있는 위치와, 그 시간대(時間帶)는 어디인가 하는 조용한 질문과 더불어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가 보다 은은하나 굳건한 공감대를 같이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주석 8)


5ㆍ17 쿠데타의 싹쓸이 이후 신군부 세력으로부터 정치활동을 허용 받은 기성 정치인들은 10대 국회의원이 101명(공화 25명, 유정 57명, 신민 17명, 무소속 2명)이며 구 정당간부가 162명, 기타 5명이었다.

5공세력과 허가받은 정치인들은 신군부 중심의 민주정의당, 구 신민당 계열의 민주한국당, 구 공화당 계열이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전두환의 들러리 겪인 대통령 선거에 이어 1981년 3월 25일 제11대 총선을 치렀다.

전국 92개 선거구에서 184명을 뽑는 3ㆍ25총선의 결과 민정당이 90명, 민한당이 57명, 국민당이 18명, 민권, 사회, 신정당이 각각 2명, 민농과 안민당이 각 1명, 무소속 11명이 당선됐다. 이에 따라 민정당은 전국구 의석 92석 가운데 3분의 2인 61석을, 민한당은 24석을, 국민당은 7석을 배정받아 제11대 국회의 원내 판도는 민정 151석, 민한 81석, 국민 25석 등 3당으로 가름지어졌다.

3ㆍ25총선 결과 두드러진 사실은 집권당인 민정당이 전국 92개 지역 가운데 제주와 전남의 해남ㆍ진도를 제외한 90개 지역에서 완승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민정당후보들이 금메달을 차지했다. 역시 정치사회적인 분위기와 야권의 인재부족, 후보 난립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5ㆍ17쿠데타 이후 약 1년여 만에 헌정이 정상화되었지만 다수의 정치인들이 규제된 상황에서 관제 여야당은 1, 2, 3중대 라는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5공정권의 들러리 역할에 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은 연금상태에서 측근 일부가 여야당에 들어가 전두환 체제를 합리화해 주는 11대 국회의원이 되는 모습을 참담한 심경으로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1980년 9월 9일 조작된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기소된 김대중은 7월 12일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어 9월 17일 육본계엄보통군법회의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3일 육본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도 사형, 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같은 날 특별사면으로 무기로 감형되어 1월 31일 청주교도소로 이감되었으며, 82년 3월 3일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또 그와 함께 기소된 문익환ㆍ이문영ㆍ예춘호ㆍ고은태(고은)ㆍ김상현ㆍ이신범ㆍ이해찬 등도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국내외의 세찬 여론에 밀리고, 5공체제가 어느 정도 굳혀지자 82년 12월 16일 김대중을 청주교도소에서 서울대 병원으로 이감하여 연금하고, 12월 23일 형집행 정지로 부인 이희호, 차남 홍업, 3남 홍걸 등 가족 3명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케 했다. 미국무성은 김대중의 석방에 노먼 번즈 동아시아국 대변인을 통해 환영논평을 발표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수상은 인도적 견지에서 지극히 바람직스러운 일 이라고 논평했으며, 아베 신타로 일본외상은 한국정부의 조치를 평가한다 고 환영했다.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5ㆍ17쿠데타를 감행하면서 자신들의 정권유지에 걸림돌이 된다고 믿은 김영삼은 가택연금, 김대중은 조작된 내란음모로 몰아 처형할 계획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까지 선고했지만,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일본 등 우방국들의 세찬 비판과 구명운동에 굴복하여 해외추방 조치로 일을 마무리지었다.

<주석>
6> 김영삼, 앞의 책, 209쪽.
7> 앞의 책, 211쪽.
8> 김영삼, <나와 내 조국의 진실>, 일월서각, 1984.
 
 

올려짐: 2018년 1월 26일, 금 6:1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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