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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허리케인
 
Hurricane Column 122717
여성으로 살아가기, 군인이 참전하는 것보다 더 위험?
[허리케인 칼럼] 강간의 기준을 '항거'에서 '동의'로 바꿔야 하는 이유



▲ 사람의 트라우마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 flicker

(필라델피아=오마이뉴스) 강인규 기자 =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당한 폭행을 생생히 기억한다. 인적 드문 강변 공원에서 세 명의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30대쯤 되는 남자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처음에는 그가 길을 묻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가와 우리를 한 줄로 세우더니 다짜고짜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중학생치고는 나와 친구들도 체격이 큰 편이었으나, 씨름선수 같은 그의 몸집에는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왼손에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주먹 곱절쯤 되는 크기였다. 사내는 우리를 때리면서 계속 혼잣말을 했다. 그가 다시 내게 와서 얼굴을 후려칠 때, 그의 입가에서 엷은 술 냄새가 풍겼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두자면, 내가 별로 곱게 자란 소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급우들과 주먹다짐도 여러 차례 했고(주로 얻어맞았다), 교실에서는 선생님들이 몽둥이나 손, 발로 내려 주시던 '사랑의 매'에 주기적으로 멍이 들기도 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탓에, 선생님들이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해 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과거 '구타의 추억' 대부분이 잊히거나 무뎌지지만, 그날 강변에서 당한 폭행은 오늘 아침에 일어난 듯 생생하다. 뇌가 당시의 기억을 끝없이 반추해 온 탓이다. 그때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방송'될 때마다, 그 어이없는 폭력을 피하지 못했다는 자책도 따라붙었다.

"왜 가만히 서서 맞기만 했을까?"

얼굴의 상처가 아물고, 성인이 된 다음에도 이 질문은 계속되었다. 혼자도 아니고 '다 큰'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무기력하게 폭행을 당했다는 수치와 자괴감이 나를 괴롭혔다.

당시 도망칠 생각도 했었다. '내 다음 순서'가 돌아오자마자 사내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얘들아 뛰어!'하고 외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가 거머쥐고 있던 회색 돌이 눈에 들어왔다.

'도망치다 누군가 잡히기라도 하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 이상 맞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얌전히 서서 폭행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온순한 양이 되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최근 내 경험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의 한 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기억력이 좋아서 과거의 사건을 자세히 기억했던 게 아니라, 정신적 충격이 뇌에 영구적 '불도장(burn-in)'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것은 그나마 가벼운 증상이었다. 성폭행 생존자들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겪는다. 2015년 <워싱턴포스트>에 "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저항하거나 소리치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하버드 의과대의 정신의학자인 제임스 하퍼가 쓴 칼럼이었다.

생각해 보자. 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저항하지 않을까? 하퍼 박사가 말한 성폭력 상황은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되는 경우만을 말하지 않는다. 한국 법원 같으면 '반항을 억압하거나 곤란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강간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올 법한 상황이다.

이 질문에 '암묵적으로 동의했으니까'나, 심지어 '싫지 않았으니까' 따위의 답변을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신의학 박사인 하퍼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성폭행 상황에서 피해자는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항거'를 강간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해 온 한국의 법 논리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잘 알려져 있듯, 뇌는 영역마다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예컨대 대뇌의 전두엽은 논리적 사고와 판단을 담당하고, 두정엽은 신체기관에 운동 명령을 내리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공포신경회로가 뇌를 지배하게 되면 전두엽이 마비되어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된다.

고속도로에서 사슴을 만나본 사람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 오는 차 앞에서 사슴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한다. 이때 차가 멈추지 않으면 사슴은 그대로 차에 받히고 만다.

나도 같은 이유로 차를 급정거한 일이 있다. 사슴은 차가 멈춰선 후에도 눈만 크게 뜨고 바라볼 뿐, 달아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헤드라이트를 깜박이고 경적을 서너 번 울린 뒤에야 동물은 겨우 '부동자세'를 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범죄의 생존자들 역시 당시 상황을 흔히 '머리속이 하얘졌다'라거나 '얼어붙었다'고 표현한다. '헤드라이트 앞의 사슴' 현상이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과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동물은 위험에서 벗어나면 곧 두뇌와 신체 기능이 정상으로 되돌아가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의 트라우마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 <하버드 정신의학 리뷰>에 실린 논문. 성폭행 피해자들이 받는 정신적 충격은 전쟁에서 기습공격을 받거나 비행기 추락사고를 겪은 사람들과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피해자는 달아나거나 소리칠 능력조차 상실하게 된다. ⓒ Harvard Review of Psychiatry

사람의 뇌는 위험이 지나간 후에도 과거의 공포와 트라우마를 지속적으로 경험한다. <하버드 정신의학 리뷰> 2015년 논문 "공포와 방어의 연속과정"은 사람이 위협에 놓였을 때 보이는 행동과 이에 따른 뇌의 작용을 체계적으로 조명한다.

'저항이나 도망(fight or flight)'은 위험 상황에 대한 적극적 대응 방식이고, '얼어붙기(freezing)'는 '저항이나 도망'의 잠재태를 말한다. 연구진은 다음 단계로 '긴장성 부동(tonic immobility)'을 들면서, 이를 "피할 수 없는 위협에 맞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설명한다.

벌레나 작은 동물들을 잡았을 때 '죽은 척' 하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뇌의 작용으로 촉발되는 마비 상태다. 뇌가 생존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내리는 최후의 명령인 셈이다.

사람도 비슷한 상태를 겪는다. 하퍼 박사는 성폭행 피해자 가운데 '저항'이나 '도망'은 커녕, '싫다'는 거부조차 못 한 채 '얼어붙은' 생존자의 사례를 든다. 일부는 '졸리기까지 하는' 심각한 긴장성 부동을 경험하기도 한다.

2017년 6월 스웨덴의 안나 묄러 박사가 스톡홀름 강간위기센터를 방문자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70%가 긴장성 부동 상태를 경험했다. 그중 48%는 극심한 상태의 긴장성 부동 상태를 겪었다. 이런 비자발적 마비 상태는 이후 생존자들에게 극심한 트라우마를 남기곤 한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이후 자책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 묄러박사의 2017년 논문. 대부분의 성폭행 피해자들이 마비현성인 ‘긴장성 부동’ 상태를 겪는다고 분석한다. ⓒ Wiley

<2013년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폭력 생존자들은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37.7%가 '무력감과 자아 상실', 30.3%가 '불안과 우울', 41.6%가 '피해 반복에 대한 두려움', 42.3%가 '가해자에 대한 분노 및 적대감', 61.6%가 '혐오와 불신' 39.2%가 '신변 안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한국 경찰은 생존자 배려에 둔하고, 법원은 '항거가 불가능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강간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판결을 내리며, 인터넷에는 '꽃뱀 몰이 언어폭력'의 2차 가해가 기다리고 있다. 그 결과, 한국 성폭력 피해자의 66.6%가 피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화가 트라우마를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한국에 만연한 '피해자 때리기'가 생존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뒤늦게 찾아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묄러 박사는 성폭행 사건 6개월 뒤 생존자의 63%가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PTSD)과 우울증을 겪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긴장성 부동 상태를 겪은 사람일수록 극심한 트라우마와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걸릴 확률은 2.75배 높았고, 심각한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3.42배에 달했다.

법원과 '꽃뱀론자'들은 성폭행 생존자가 사건 후 '문자를 주고 받았다'거나, 심지어 '정상적으로 생활했다'는 이유로 성폭행이 아니었다고 간주하곤 한다. 이는 생존자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을 외적으로 드러내야 하며, 그것도 사건 즉시 현장에 없던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방식으로 드러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성범죄 생존자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참전 군인들이 보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과 유사하다.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듯 보였던 생존자들이 몇 달, 심지어 몇 년 후에 발병하는 경우도 흔하다.

마비 상태가 꼭 흉기로 위협받거나 밀폐된 공간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성추행 생존자들은 버스, 지하철, 거리, 사무실, 식당 등에서도 '얼어붙는' 경험을 한다. 직장에서 상사가 언어희롱을 하거나 원하지 않는 신체접촉을 할 때 피해자들은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 사태 파악과 분노는 뒤늦게 찾아온다.

이 상황이 공감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똥개 훈련' 이야기가 도움이 될 듯하다. 같은 일을 반복해서 시킬 때 우리는 '똥개 훈련 시키는 거냐'고 화를 낸다. 군대의 훈련이 바로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왜 그럴까?

군대 훈련은 전시에 대비한 '습관 만들기'다. 눈앞에서 포탄이 터지고 머리 위로 탄알이 날아오면 '머릿속이 햐얗게' 되기 때문이다. 공포가 뇌를 지배하면 전략적 사고와 운동신경이 마비되는 탓에, 멍하게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상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남는 것은 훈련으로 몸에 익힌 습관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중교통 수단에서 신체접촉을 당하거나 회식에서 성적 발언을 하는 상사에게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훈련을 몇 년씩 받지 않는다. 성폭행 상황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겪는 공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성폭력을 겪는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에 놓이는 것 또한 이해해야 마땅하다.


▲ 성범죄 피해자들이 겪는 긴장성 부동으로 쉽게 항거하지 못한다는 최근 연구를 보도한 영국의 <인디펜던트>. ‘항거’를 강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한국 법원은 정신의학의 연구 성과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 Independent

나를 포함해, 대다수 남성들은 여성들 삶에 가시처럼 박힌 일상의 공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들에게는 삶 자체가 전쟁터다. 성폭행 상황에서 많은 생존자는 인격이 말살되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실제로 죽음을 맞기도 한다. 유엔군을 이끌고 콩고에 주둔했던 패트릭 콤마르트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군인이 현대전에 참전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여성의 인격과 목숨이 중요한가? 그렇다면 '항거'가 아닌 '동의'가 강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거부하면 거부한 것'이었지만, 이제 새로운 규칙은 '동의해야 동의한 것'이다.

법제화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누구나 오늘부터 실천할 수 있다. 상대의 의사를 물어라. 의사를 묻기 위해서는 거절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거절당하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상대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 수치다. 그리고 범죄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8년 1월 05일, 금 3:1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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