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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Pastor Choi's column 122017
"살아계신 주"
[호산나 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에 기쁨 늘 충만하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살아계신 주'라는 찬양의 후렴구입니다. 적어도 이 찬양은 수십 년간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부를 때 감동이 있는 좋은 찬양입니다.

가사의 내용도 훌륭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나의 참된 소망이기 때문에 걱정 근심이 전혀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이며, 부활하신 사랑의 주님이 나의 삶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모든 삶에 기쁨이 넘친다는 그야말로 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찬양입니다. 곡도 감동적이어서 누구든 이 찬양을 부를 때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두 손을 들고 몇 번을 반복해서 부르다 반주 없이 목소리로만 이 찬양을 부르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처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처럼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에 기쁨이 늘 충만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찬양을 부를 때 우리는 추호도 의심 없이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그 부활의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고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의 삶을 한 번 흘낏 쳐다보기만 해도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참된 소망이시라는 고백은 입술만의 고백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걱정 근심 전혀 없다는 고백은 단지 우리의 소망을 담은 넉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걱정 근심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랑의 주님이 내 갈 길을 인도하신다는 고백은 허망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갈 바를 모르고 헤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내 삶에 기쁨이 그것도 언제나 충만하다는 고백은 민망한 고백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죽이고 싶은 분노가 이는 자신의 삶을 볼 수 있다면 말입니다.

머리로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인정이 내 삶과 관련을 맺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착각하며 사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분이 내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도 믿습니다. 그렇다면 내 삶은 걱정 근심도 없어야 하고 기쁨이 늘 충만할 것이라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와 정 반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알짬은 우리가 예수님의 비전을 함께 공유하고 그 비전에 따라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부활하시고, 그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만일 그 믿음이 진실이라면 예수님의 비전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 비전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는 것이 자신의 부활을 확신한다는 것으로 치환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들이 없었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물으면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예수님의 비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영혼 구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아무리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신칭의'를 논리로 내세워 예수님의 비전대로 사는 것을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화를 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비전을 따라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의 비전을 모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알짬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전한 복음의 알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천국 복음(마24:14),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1:1), 하나님의 복음(막1:14), 하나님의 나라 복음(눅4:43)은 모두 같은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비전이 잘 드러나 있는 곳이 '마그니피캇'으로 알려진 마리아의 노래, 혹은 마리아의 기도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눅1:51-53)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나라입니다. 교만한 사람들과 그들의 계획은 예수님에 의해 부서집니다. 배고픈 사람들은 배불리 먹이시고, 부자는 배고프게 하십니다. 우리가 잘 보아야 할 것은 높은 자는 낮아지고 낮은 자는 높아져 모두가 평등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의 자리를 빼앗고, 부자가 가난한 자가 되는 역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전은 이처럼 평등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몸소 그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환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단순히 그 일의 연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계급이나 사회적 차별을 허무셨습니다. 사회적인 계급과 차별은 물론 종교적인 계급과 차별 역시 허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 죄인은 이스라엘의 성전제도와 정결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 제도와 정결 규칙은 사람들을 구별하였습니다. 선인과 악인, 정결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여 사람들을 나누었고, 차별하였고, 멸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구별과 차별과 멸시를 무시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평등한 사회를 지향해야 할 하나님의 율법이 실제로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차별과 소외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중대한 도발이었고 그 때문에 예수님은 마침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비전을 가지고 살고자 한다면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삶의 평등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이 단순히 '사후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인식의 전환은 우리의 신앙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현실의 불합리한 상황을 보는 관점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아이를 확인하라고 해서 (안치실에) 들어갔는데 머리카락이 피로 떡이 져 있고 얼굴이 퉁퉁 부어 있고 뒷머리가 날아간 시체가 누워있었다. 20년을 키운 어미가 그 아들을 알아볼 수가 없다. 저 처참한 모습이 우리 아들이 아니다. 길을 가다가 뒤통수만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아이인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다. 뒤통수가 날아가 있는 시체가 절대 우리가 아이가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짙은 눈썹과 옷가지가 있는데. 그날 입고 나간 옷이 맞다. 어느 부모가 아이를 잃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아이가 죽는 날 나도 죽었다. (울음)

얼마 전 있었던 구의역 사건에서 희생당한 젊은이의 어머니의 말입니다. 만일 예수의 비전이 우리의 비전이 된다면 이런 일들이 단순히 일어난 사고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고들 하나, 하나가 오늘 나의 구원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우선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느끼는 이 처절한 고통을 보며 함께 아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젊은이가 그토록 살기 위해 몸부림쳐도 극복할 수 없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불평등한 현실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아들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이 어머니의 아픔 때문에 예수님의 비전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더욱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전은 이 아름다운 세상과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나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평등하게 나누고, 모두가 이 이름다운 세상이라는 선물을 함께 가꾸고 보살피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불평등을 조장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듦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을 망가뜨리고, 희생자들을 양산하고, 차별과 소외를 심화시켜 결국엔 모두가 불행한 사회를 만드는 이 너무도 분명한 현실을 거부하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핵심임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삶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삶을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삶은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주님을 오직 유일한 참된 소망으로 믿기 때문에, 그분이 내 안에 살아계시고, 내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정말 믿는다면 바꾸기 힘든 익숙한 삶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초기 교회 성도들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비전에 따라 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런 변화된 삶이 더욱 그리운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너무도 크게 망가지고, 차별과 소외가 너무도 많은 희생자들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치가들의 선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을 모두가 깨달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처럼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십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셔서 당신의 비전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인도에 우리의 삶을 의탁한다면 우리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는 삶, 모든 삶에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삶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올려짐: 2017년 12월 22일, 금 6:0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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