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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YS Critical Biography 52
박정희, 부하 총탄에 암살
[김영삼 평전 52] 국회제명과 부마항쟁



▲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1980 보도사진연감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권력이 타락하면 주색잡기가 일상화된다.

유신정권 말기, 박정희의 비밀요정 행사는 지나치게 잦았다. 대통령이 혼자서 하는 소행사나 측근 권력자 서너 명이 함께하는 대행사가 한 달이면 열 차례씩이나 열렸다. 그러니까 사흘에 한 벌 꼴로 주연을 벌였다는 예기다. 그때마다 외부에서 술시중 드는 여자들을 불러왔다. 대통령의 주연 담당이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휴일도 없을 만큼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주석 5)

박정희의 술자리 행사는 부인 사망 후 부쩍 늘었던 것 같다. 중앙정보부에는 여성을 불러오는 '채홍사'가 따로 있었다.

술자리 여자를 최종 심사했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요정에 소속돼 있는 여자들을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고위층과 함께 하는 술자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연예계 지망생이 가장 무난한 대상이었다. 그 중엔 유순한 대학의 연예 관련 학과 재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칙으로 같은 여자를 두 번 이상 들여보내지 않았다. 단골을 만들면 보안상이나 기타 부담스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반강제 차출도 있었다. 박 대통령이 국산 영화를 시사관람하거나 TV연예프로 등을 보다가 마음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 고 하면 큰 물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대개 불려왔다. 다만 유부녀로서 본인이 거절하면 강제하지는 않았다. (주석 6)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2분.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다. 박대통령 절대통치 18년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 날도 박정희는 두 명의 여성으로부터 술시중을 들으며 만찬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절명했다.

부마항쟁과 관련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00만 ~ 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 고 호언할만큼 청와대는 광기에 가득 차 있었다.

김재규는 1980년 1월 24일 오전,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대통령 각하는 나에게 동향 출신으로, 은인이며 상관이다. 친형제간도 그럴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관계다. 그러나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날 저녁 6시 5분경 만찬이 시작되었고 식사 중 박정희가 부마사태를 중앙정보부의 정보부재 탓으로 돌려 김재규를 힐난한 데 이어 차지철이 과격한 어조로 그를 공박하자 흥분한 김재규는 밖으로 나와 2층 집무실에서 권총을 갖고 만찬회장에 돌아오는 길에 직속부하 박홍주와 박선호에게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을 사살할 것 을 지시, 7시 35분경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각각 2발씩 쏘아 두 사람을 절명시킴으로써 18년간의 1인독재정권과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사건 직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김재규를 대통령 살해범으로 체포하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취임하여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김재규ㆍ김계원ㆍ박홍주ㆍ박선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김계원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은 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와중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박정희 장례식은 11월 3일 국장으로 거행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김재규는 10ㆍ26거사에 대해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민주혁명이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면서, 자신이 유신의 심장부를 쏜 때문에 수많은 국민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재판과정에서 나 한 목숨 바쳐 독재의 아성 무너뜨렸네 라고 읊은 자작시 <나의 자유>를 변호인을 통해 공개, 자신의 거사가 민주의거 였음을 밝혔다.

김영삼은 10월 27일 새벽 4시반 경, 미국에 사는 한 교포로부터 박정희 암살 소식을 들었다. 국회에서 제명당한지 22일 만이었다.

급하게 전하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 나는 항상 박정희가 그의 권력욕 때문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말해 왔지만, 그가 설마 그런 방식으로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박정희는 나를 제명한 지 22일 만에, 그리고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한 지 10일 만에, 그것도 자신의 심복이었던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당한 것이다.

10ㆍ26 직후 모 목사를 비롯해 박정희에게 고통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독재자에게 조의를 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미 죽은 다음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박정희를 싫어했고, 가장 선두에서 박정희의 독재에 항거했으며, 마침내 정권타도를 외쳐 온 사람이었지만, 야당의 총재로서 박정희의 빈소를 찾았고 11월 3일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주석 7)

<주석>
5> 김재홍,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71쪽, 책보세, 2012.
6> 앞의 책, 71쪽.
7> 김영삼, 앞의 책, 172쪽.
 
 

올려짐: 2017년 11월 25일, 토 4:1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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