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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시간: (EST) 2017년 12월 14일, 목 12:59 pm
[한국] 사회/경제
 
Civililian massacre 092717
"민간인 학살이 부수적 피해? 전쟁 옹호 궤변에 불과"
[인터뷰]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 펴낸 신기철 선생



▲ 신기철 ⓒ 신기철

(서울=오마이뉴스) 김성수 기자 =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직장 동료'였던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신기철 소장이 여섯 번째 책을 냈다. 지난 2010년 국가차원의 과거사 정리 작업이 막을 내린 후 그는 1년에 한 번 꼴로 자비를 털어 과거사 정리에 관한 연구서를 낸 것이다. 그가 지난 7년간 펴낸 과거사 정리에 관한 저서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 권은 경기도 고양 금정굴 사건으로 본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관한 연구물인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이다. 두 번째 권은 민간인집단학살에 이르게 되는 배경으로 이승만정권의 무능과 이기심을 폭로한 <국민은 적이 아니다>이다. (관련 기사) 셋째 권은 전국에서 벌어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을 종합하여 국가가 저지른 전쟁 범죄의 의도성을 평가한 <전쟁 범죄>이다.

넷째 권은 진실화해위원회의 해산 이후 새롭게 나타난 학살희생자 유족 100명을 인터뷰한 <멈춘시간 1950>이다. 다섯 번째 권은 판결문 등 국가기록물과 개인들의 증언을 통해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을 재구성한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 권은 최근 발간한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으로 이 책에서 신기철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에게 자행된 전쟁범죄 또는 반인륜범죄는 지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반성과 사죄 없이 진행 중"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대학 졸업 후 1980년대에 그는 노동운동을 했다. 그러나 지난 2000년대부터 그는 '과거사' 와 '늦바람'이 나 있다. 과거사정리를 주제로 무려 여섯 권의 방대한 연구서를 펴낸 재야의 '연구자' 이자 '운동가'가 된 신기철. 그러나 그동안 '벌어 논 게 없어서' 정작 지난 몇 년간 세 딸의 아빠이자 가장인 그는 단란하게 가족휴가 한 번 못 갔다. 이런 그를 생각하면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고 찡해진다. 지난 8월 3일부터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신기철 소장과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에 관하여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전투에서 무능했던 군대, 민간인학살에서는 유능했다"


▲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 책표지 ⓒ 인권평화연구소

-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을 두고 아직도 우리 사회, 특히 보수집단에서는, 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의혹과 비난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왜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해 이런 비인도적인 시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보수집단의 지도층이야 가해자의 입장을 자신과 동일시하니 아마 책임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한국전쟁의 진실이 드러나길 바라지 않는 걸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어느 전쟁이나 피하고 싶은 진실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패전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인학살 사실이다. 한국전쟁을 돌이켜 보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투에서는 무능했던 군대가 민간인 학살에서는 아주 효율적이고 유능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 보수 집단의 본색이다.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에 부정 개입한 국정원 댓글사건이나 민간인 사찰 컴퓨터 프로그램 구입 사례를 보라. 부정선거를 위해 온갖 국가예산을 퍼부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나? 반면 대북 관련 정보활동을 보면 도대체 한 것이 뭐가 있나? 식당종업원들 모셔온 것? 자신들끼리는 성공한 작전이라고 평했는지 몰라도 2017년 남북관계 정상화를 가로막고 있다. 일부라도 진실이 드러난 뒤 이들이 하는 변명을 우리는 이미 듣고 있다. 바로 5․18 학살 사건에 대한 전두환의 입장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도 5․18의 피해자'라고 했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나도 피해자다'라는 변명은 박근혜 최순실 관련 재판에서도 단골 메뉴다.

경기도 고양지역에서 직접 확인해 보니 보수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심각한 박탈감을 갖고 있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피해자들이 받는 보상을 보니 자신들이 대한민국에서 받아오던 대접이 폄하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들은 독재정권 아래에서 자신들이 누려온 특권은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궁상맞게 살고 있는 좌파들을 보면서 만족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5․18 희생자들이 받는 보상 뿐 아니라 세월호 희생자들이 받은 보험금까지도 아깝게 여기는 것이다. 무척이나 배 아파했다는 소문이다."

"집권과 동시에 진실규명 중단시킨 이명박·박근혜"

- 책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에게 자행된 전쟁 범죄 또는 반인륜 범죄는 지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반성과 사죄 없이 진행 중이라고 진단했는데. 왜 우리 사회는 이런 반인륜범죄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는다고 보는지?
"최근 두 가지 손해배상 소송을 목격했다. 하나는 고양시의회에서 금정굴 학살사건 희생자를 '부역자', '김일성 앞잡이'라고 회의 때마다 주장한 의원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극단 선양회 회장 이아무개씨가 지난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가 태극단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행자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었다. 두 소송 모두 최고 법원까지 갔지만 저들이 패소했다.

아마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관련 명예훼손 소송으로 두 사건 모두 첫 승소 사례로 알고 있다. 같은 시기 벌어진 4․3 관련 소송은 피해자 측이 패소했다. 하여튼 금정굴 희생자 명예훼손 소송은 힘들게 승소하여 중요한 판례를 만들었다.

국가기관의 부정개입 선거결과였겠지만 총체적으로 보아 한국사회는 이명박, 박근혜를 지도자로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집권과 동시에 진실규명을 중단시켰을 뿐 아니라 규명된 진실을 뒤집으려고 시도했다. 반성과 사죄 정도가 아니라 밝혀진 진실을 모두 부인하려고 했고, 천안함이나 백남기 농민 살해, 세월호 은폐 시도처럼 새로운 과거사를 양산했다. 하지만 이들의 반역사적 시도는 실패로 드러났으니 이제 중단된 개혁 의제들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결국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반인륜 범죄, 국가보안법, 분단의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 이번 책이 이전 저술들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부록에 실린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희생자 명단 1만 4343명'이 아닌가 싶다. 이런 작업을 했는지 왜,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의 성과에 대한 평가는 2011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행한 <종합보고서 3>에 근거하고 있다. 3대 이영조 위원장 재직 당시 만들어졌다. 여기 6쪽에는 진실규명 되었거나 진실규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수가 적대세력 관련사건 2666명을 포함하여 모두 1만 2364명이라고 적혀있다. 이승만 정부에 의한 희생자 수는 9698명이었다.

그런데 이 숫자가 사건 수인지 희생자 수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들의 명단을 찾아봤지만 보고서 안에는 없었다. 2010년 전국위령제 자료집 명단이 있었지만 각 사건별 보고서의 진실규명 희생자 명단이었다. 개별보고서는 '전북 보도연맹사건 1' 등으로 정리되어 있으므로 나에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도대체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희생자는 몇 명이었고 진실규명은 몇 명이나 된 걸까? 신청한 사람들은 몇 명이고 조사관들이 찾아낸 희생자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추정이나 불능 결정된 희생자들은 자동으로 재조사한다는데 이들은 또 얼마나 되는 걸까?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야 하니 먼저 각 보고서의 희생자 명단을 종합하기 시작했다. 항목은 희생자 이름, 유족, 거주지, 성별, 나이, 희생지, 희생시기, 유형, 규명여부, 출처보고서, 신청여부였다. 1년 걸렸다.

적대세력사건과 부상자를 제외한 결과를 분석하여 책에 실었다.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대상자는 모두 1만 8518명이었다. 신청 1만 401명, 미신청 8117명이었다. 진실규명 1만 4343명, 추정 2598명, 불능 918명, 판단을 못한 경우도 659명에 달했다. 진실규명 또는 추정된 희생자 수에 대해 앞의 종합보고서가 9698명이었다면 여기선 1만 6941명이었다. 차이가 컸다. 혹시 착오가 있다면 모두 내 잘못이겠지만 누구나 확인해 볼 수 있게 진실 규명된 1만 4343명의 명단을 모두 책에 실었다."

"해외입양아는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아이들"


▲ 희생자 어수갑씨 ⓒ 신기철

- 책에서 한국전쟁 중 억울하게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 피해 유족들 상당수가 과거 독재 권력을 지지하던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왜 피해자들이 오히려 가해자인 독재 권력을 지지하는 '이변'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나?
"해외입양 문제의 원조격이라고 할 만한 한국전쟁 고아를 생각해 보자. 이들에 대해 단순히 전쟁 중 부모를 잃은 아이들로 생각할 뿐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아이들이었을 경우를 생각하지 못한다. 실제 고양 유족 중에는 어린 동생 셋을 해외입양 보내야 했던 분이 있다. 생이별했고 지금까지 생사여부를 모른다. 나부터 이 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전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왜 부모를 잃었을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온다.

피해자 유족들이 갖는 보수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살사건 후 남겨진 유족들이 어떤 처지였을지 살펴봐야 한다. 정보기관과 경찰서가 남긴 감시대상 명부나 신원조사 자료를 보면 유족들은 2등 국민으로 철저히 고립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일자리라도 얻기 위해서 독재자를 지지하는 흉내라도 내야 했다. 기차역 잡부에 지원하는 경우도 신원조회를 했고 조회가 내려올 때면 미리 경찰서에 찾아가서 먹고 살게 제발 좋게 써서 올려달라는 사정을 해야 했다.

부모 잃고 재산까지 빼앗긴 유족들에게 출세의 기회란 없었고 겨우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감시자들의 눈에서 벗어나는 일을 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왔다. 연좌제가 뭐냐는 유족들도 많았다. 이미 2등 국민으로 전락한 사람들에겐 연좌제를 적용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많은 유족들이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세력을 지지한다."

- 국가인권위원회 조차 출범 당시부터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학살 피해를 인권의 범주에서 조사나 권고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왜 인권침해 문제를 다루는 인권위원회조차 민간인학살 피해문제를 이렇게 소극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보는지?
"내부사정을 모르고 하는 말일 수 있어 조심스럽다. 가장 큰 이유는 지난사건을 소급해 조사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는 핑계로 보인다. 가장 심각한 인권침해 사건들을 조사, 연구하지 않고 어떻게 새로 발생하는 인권침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유족들의 고통에 대해 조금의 고민도 한 흔적이 없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국제사법재판소 등 국제인권기관에서도 보이는 것 같다. 이들도 민간인 학살을 막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는 걸 보면 인권이라는 의제자체가 상대적으로 쉬운 일만 다루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인권국가인 양 장식하는 액세서리에 그치는 것 같다."


▲ 희생자 이관술씨 ⓒ 신기철

- 한국전쟁 중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된 이관술씨와 고양 금정굴에서 희생된 어수갑씨는 어떤 분들이었고 어떻게 희생되게 되었는지?
"두 분 모두 좌익계열의 항일운동가로 해방 후 분단에 반대한 활동을 했으니 이승만에겐 기회만 있으면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1950년 당시 오십 전후였으며 전쟁과 관련된 행위와 무관하게 정치적학살의 희생자였다. 두 분의 희생경위를 간략히 요약해 드린다.

1902년 울산 울릉도 출생인 이관술 선생은 1932년 반제동맹을 결성 1933년 체포되었으며, 1934년 석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준비그룹'에 가담했다. 1941년 1월 체포되었으나 건강악화로 1943년 11월 가석방되었고 이후 도피생활 중 해방을 맞았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총무부장이 되었으며,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직후 발생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수배, 7월 6일 체포되어 194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확정, 대전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헌병대에게 학살되었는데, 저명한 반정부인사를 먼저 학살했으므로 희생 시기는 초기인 7월 3일이었을 것이다.

1896년 김포 하성면 출생인 어수갑 선생은 1919년 강원 원주에서 교육활동 중 3․1 만세운동, 1919년 6월 중국 북경으로 피신하여 독립운동에 투신, 1921년 7월 북경에서 이회영을 만나 그해 말 열리는 '태평양회의'에서 독립을 호소하기로 하고 8월 국내에 잠입했으나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1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4년 화요회에 가입했고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6․10 만세운동을 계기로 시작된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7월 백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1929년 4월 석방되었다. 이후 해방될 때까지 고향인 김포로 돌아와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힘썼다.

미 군정 하인 1945년 10월 김포군 초대 하성면장,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 김포군 대표로 참석했다. 1946년 2월 25일 면장직을 사임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 경기지부 서기부장이 되었다. 유족증언에 따르면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에서 확인되지는 않는다. 전쟁 직전 석방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194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민군 점령기 특별한 활동은 없었으나 수복 후 학살을 피해 서울에 살던 아들 집으로 갔고 하루 만에 다시 체포를 피해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 어씨 집성촌으로 왔다. 다시 피신하던 중 고양경찰서에 체포되어 금정굴에서 학살되었다. 금정굴 사건 관련 형사사건기록으로 보아 전임 지역이 김포였던 고양경찰서장 이무영이 직접 권총으로 사살했다. 총살당한 날짜는 10월 23일 또는 25일 밤이었다."

"한국전쟁은 전투가 아니라 민간인학살"

- 한국전쟁 첫해인 1950년 국군의 사망 실종자 수는 8만 명이었다. 반면 비전투원인 민간인 사망 실종자 수는 100만 명에 달했다. 왜 이렇게 전투요원 보다 비전투원인 민간인들 피해가 열 배 이상 컸다고 보는지?
"먼저 몇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국방부 연구자료에 따르면 대략 1950년 8만 명, 1951년 7만 명, 1952년 5만 명, 1953년 7만 명의 국군이 '손실' 즉,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 모두 27만 명이다.

<한국전쟁사>는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부터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 7월 말까지 '지연 전투'라고 불렀다. 전략상 후퇴하는 전투였으니 상대적으로 격렬한 전투는 없었고 인명피해도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복 전투에서도 서울 탈환 전투 외에 큰 전투는 없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1950년 한 해 동안 국군의 피해는 6월 전쟁 발발 초기와 8월 낙동강 전선기, 12월 북한지역에서 후퇴기 등 세 번에 걸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위 연구 자료에 따르면 약 8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국방부자료에서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피해를 당했는지를 조사한 결과는 없다. 단지 확인되는 것은 부상자와의 비교이다.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민간인 약 22만 명이 부상당했다. 나머지가 부상 없는 죽음이었다. 따라서 대부분 조준사격을 의심할 수 있다. 방어 장비를 갖춘 국군이 전투 중 부상당하는 것에 비한다면 무방비 민간인이 공격을 당한다면 그 자리에서 사망당할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3년 전쟁 동안 부상당한 국군의 수는 약 72만 명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민간인들이 공격을 당한 이유에 있다. 전투가 없던 시기에 당한 민간인들의 사망자 수 1백만 명은 조준사격, 의도적인 공격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한국전쟁이 전투가 아니라 민간인학살이었음을 보여주며 이것이 전쟁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승만 정권, 헌법과 법률 위반하며 민간인 백만 명 학살"

- 책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사건은 우연이나 합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고의와 불법, 위헌 행위였다고 평가했는데, 그 이유와 근거는?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면, 전쟁 시 민간인학살은 독재정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다.

6월 25일 전쟁발발 즉시 이승만 정권은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아래 비상조치령)'과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공포했다. 그 직후 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점검 및 소집, 학살이 시작되었으니 이 법령들은 모두 이승만 정권에 충성하지 않아 보이는 국민에 대한 공격을 합법화한 것이었다. 공격의 신호탄과 같은 성격이었다. 따라서 6월 25일 그날의 전쟁은 우연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날의 대응방안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비상조치령'은 1949년 개악하려던 '국가보안법'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1심만으로 증거설명 없이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내용을 담으려 해서 중단되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을 빌미로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 부활했다. 1950년과 1951년 최소 2만 명이 1심 재판으로 처벌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1952년 9월 9일 헌법위원회는 '최고 법원에 의한 재판 받을 국민 기본권을 침해했으므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승만 정권은 인민군점령 전 5만 정치범, 30만 국민보도연맹원을 적으로 봤고, 수복 후에는 55만 명의 국민을 인민군부역자로 봤다. 영토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정권, 누가 부역했는지도 구별할 능력이 없던 정권이 1백만 명의 민간인을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며 학살했던 것이다."

- 한국전쟁 전에도 이미 민간인학살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지?
"이미 대구 10월 항쟁이나 제주 4․3사건이나 여순사건이 잘 알려져 있으므로 민간인학살이 자행된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대구, 제주나 여수, 순천은 일부에 불과하다. 형태나 강도로 보아 이에 비교될 만한 탄압이 곳곳에서 있었다.

먼저, 미군과 이승만세력의 분단정부 수립시도가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당시 분단은 대부분 민중들의 염원과 반대였다. 점령자 미군에 대한 저항은 1946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의도가 폭로된 뒤 강화되었고(대구 10월 항쟁) 다시 경찰을 비롯하여 군대까지 정비를 마친 미 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1948년 물리력을 총동원하여 국민들을 억압하자 저항이 있었다.(제주 4․3 항쟁)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부 군조차 등을 돌렸다.(여수 14연대, 대구 6연대 등 봉기)

악순환이 본격화되었다. 영호남 지역은 군부대의 토벌작전 학살이 시작되었고, 서울, 경기, 충청 등 중부지역은 체포와 전향이 시작되었다. 10만 9천 명이 학살되었고, 11만 명에 이르는 정치범이 생겼으며, 30만 명이 넘는 국민보도연맹 조직이 생겼다. 이것이 전쟁 전 한국사회의 모습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미 국민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다."

"부수적 피해라는 논리는 책임회피 위한 것"


▲ "1951년 4월 대구형무소 인근에서 벌어진 총살. 감독하던 미군이 촬영했는데 희생자들은 재판에 의해 1심만으로 사형 확정된 민간인들로 보인다. 이 사진은 집행 방식의 반인륜성도 명확히 보여 주는데, 이러한 방식의 처형은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 신기철

-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은 재직 시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에 대해 미군의 심각한 잘못은 없으며, 작전지역에서 민간인학살은 부수적인 피해로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민간인들에 대한 미군폭격학살은 과연 전쟁의 부수적 피해, 즉 어쩔 수 없는 재앙이었다고 보는지?
"'부수적 피해'라는 논리는 책임회피를 위한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전쟁 중 발생하는 민간인 학살피해는 모두 '부수적'이다. 무장군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전쟁이므로 모든 민간인 피해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 세계 어느 곳의 전쟁도 이런 사례는 없다. 이는 단지 전쟁을 옹호하는 궤변에 불과하다.

공중폭격은 피해지역이 넓어 처음부터 부수적 피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처럼 보이는 공격방식이다. 요즘 정밀폭격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도 거짓에 가깝다. 잘 아시겠지만 폭격기는 정찰기나 지상군의 정보에 따라 공격한다. 누군가 인민군이나 빨치산이라는 정보를 주는 것이다. 폭격기 조종사가 민간인임을 식별하고 고민하지만 대부분 명령이라며 결국 폭탄을 투하하고 만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명령을 이행하는 행위다. 민간인에게 총을 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를 두고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변명이 될 수 없다. 군대는 명령을 내리는 자가 있다. 폭격의 경우 정보를 제공하는 자가 있다. 피해가 가장 컸던 1950년 7월~9월과 1951년 1월~2월, 군 작전에 방해가 되는 피난민을 제거하라고 해석되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는 전형적인 전쟁범죄이다. 그 수단이 공중폭격이어도 결론은 같다. 단양 곡계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개는 지상군의 공격과 병행된다.

전선이 형성되고 전투가 시작되면 적군에 대한 공중공격이 시작된다. 하지만 많은 정찰보고에는 적군을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민간인피해 사례만 보아선지 근접지원 공격의 경우 미군의 공중공격이 인민군에게 큰 피해를 준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니 사실 한 번도 사례를 접하지 못했다. 적군의 공격이 아니라 적군의 은신처가 될 만한 민가, 적군이 될지도 모르는 민간인들이 공격대상이 아니었나 의심된다. 기회가 된다면 전체 폭격데이터를 모아 인민군, 민간인, 아군의 피해정도를 비교하려 한다."

- 왜 이승만 정권은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을 한국전쟁 전후 학살했을까?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980년 5월 전두환 등 신군부는 발포명령을 내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몇 명이 죽을지 모르겠지만 본보기를 보여서 저항을 싹을 자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전쟁 상황을 맞은 이승만은 이 기회에 반대세력을 모두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에겐 두 종류의 국민밖에 없었을 것이니 자신을 따르지 않는 국민은 버리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블랙리스트 작성은 저들의 본성이다. 물론 몇 명이나 죽이겠다는 계획은 없었겠지만 다 죽이면 몇 명이나 될까 생각은 했을 것 같다.

국민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았던 독재정권이 치르는 전쟁은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되느냐 아니냐만 고민했다고 본다.

박근혜 재판에서도 드러나지만 최고 권력자는 명시적 명령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 사람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나요?'라는 발언은 곧 해고명령이 된다. 레이저 눈빛을 쏘는 것도 명령이다. 그러니 전쟁 중 '공산당이라면 부모형제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하라'는 명시적 발언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1950년 9월 22일 부산에서 이승만이 서울수복작전을 앞두고 한 말이었다. 이는 학살명령에 다름없이 결과를 낳았다. 죽이고 나서 '공산당'이었다고 보고하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학살자들은 '피사리하다보면 나락이 뽑히기도 하는 것 아니야?'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논을 통째 빼앗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의 눈에야 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권력유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부수적 피해'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명을 연장한 이승만 정권은 다시 1960년 4․19 학살을 저지른 뒤 소멸했다."

"역사전시관, 교육시설이 만들어지는 모습 보고 싶다"

- 문재인 정부가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문제해결'을 채택함에 따라 내년 상반기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노무현 정부시절 과거사정리 활동에 조사팀장으로 참여한 입장에서 내년에 출범되는 진실화해위원회는 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와 비교해 어떤 점을 보완할 것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보는지?
"전 조사관 입장에서 특별하게 고민할 수준이 못 된다. 새로 나타난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를 제외한다면, 기본 입장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의해 중단된 조사의 계속이라고 본다. 그런데 실제 2년 연장하지 못하고 중단된 활동 때문에 졸속 처리된 사건들이 제법 있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시작된다면 조사가 보완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미군 폭격 사건의 부수적 피해 논리를 극복해야 한다. 폭격의 야만성이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고 본다.

형무소사건의 경우도 심각하다. 희생자들 대부분이 위헌 결정된 1심 재판의 피해자들이었다. 과거사정리 기본법은 재판을 받아 사형이 집행된 사건의 경우 조사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기각 처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심 재판이 위헌임이 확인된 이상 모두 다시 판단해야 한다.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인 경우, 반국가 조직으로 가공 조작된 경우도 확인된다. 이들 사건 역시 기각시키지 말고 조사 또는 재조사해야 한다.

지난 조사는 개별사건들을 넘어서 지휘책임자들에 대한 조사에 이르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중단된 사이 개별사건들을 종합해서 전체를 판단해 보려 시도했지만 퍼즐의 빈 공간들이 너무 많다. 위원회가 새로 시작된다면 많은 부분이 채워져 최고위층의 지휘책임이 규명될 것으로 기대한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시작된다면 후속조치 등 권고이행이 함께 점검되어야 한다고 본다. 말에 그치는 국가의 사죄를 넘어 사건 지역 곳곳 가능한 곳에 작으나마 역사전시관, 교육시설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 신기철 선생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다녔으며 금속노동자로 구로 영등포 등 서울남부지역 노동운동에, 1997년 지역공동체운동으로서 고양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지금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사건의 진실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 사건의 재발방지, 인권과 민주주의의 확대, 평화사업을 추진 중이다. 저서로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전쟁범죄> <멈춘시간 1950>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등이 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7년 10월 01일, 일 10:3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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