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Weekly of Florida   로그인  등록하기

 현재시간: (EST) 2017년 10월 16일, 월 11:48 pm
[종교/문화] 종교
 
Church reformaiton 090617
"교회는 세상 권력의 통치 방식을 무너뜨려야 한다"
[인터뷰] 박득훈 목사가 제시하는 교회 개혁의 길


(서울=오마이뉴스) 김도훈 기자 = 이야기는 '교회 개혁'으로 넘어왔다. 박득훈 목사(새맘교회)는 지난 인터뷰 기사에서 자본주의와 한국교회의 혈맹 관계를 짚었다.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가 한국교회를 잠식했는지 돌아봤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새로워져야 할까. 종교개혁 500주년인 올해에 반드시 던져야 할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교회 개혁 운동에 20여 년 투신해 온 박득훈 목사는 이 지점에 와서 전혀 거침이 없었다. 한국교회와 사회가 맘몬의 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레미야의 심장을 가지고 이야기를 토해 냈다. 박득훈 목사가 이야기하는 '교회 개혁의 길'에 귀를 기울여 보자.


▲ 박득훈 목사에게서 '교회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교회 개혁의 길, '머리'의 명령대로

한국교회가 살아나려면 이제는 정말 종교개혁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슴 아픈 역사로 얼룩진 왜곡된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치유하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지난 정권에서 총리 후보로 지명됐다가 청문회 절차를 통과하지 못한 한 장로가 있다. 그분의 역사관을 보면 한국교회 평균이 어디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주장을 들어 보면 일관성이 있다. 일제강점기가 분명 비극이었지만 당시 근대화 과정을 통해 고질적인 게으름을 극복하고 근면이라는 새로운 덕을 터득했다든지, 한국전쟁이 비극이었지만 전쟁을 통해 하마터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넘어갈 수도 있었던 남한에 자본주의라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물론 그 이후 산업화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이들에게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비극들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적 가치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이용하여 자신들 기득권을 보호하려 한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교회를 특정 이데올로기 비호 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종교개혁가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연구하면 된다. 요한복음 17장과 21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곧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진 목적이다. 바울의 교회론에서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결국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교회다워지는 길은 오직 하나다.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셨는지 보면 된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여러 담론이 있지만 예수님의 삶·십자가·부활과 연결해서 하나님나라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톰 라이트가 <God in Public>(SPCK)에서 잘 정리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그 결과 이 세상 불의한 권력 밑에서 짓밟히고 고통당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로 다시 들어오게 됐다. 예수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임하는 구원은 이렇듯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연결된다.

교회는 이 세상 권력의 통치 방식을 무너뜨리면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실질적으로 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고 구원의 역사였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하나님나라 건설이다. 이 세상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통치가 스며들도록 모든 존재를 바치는 공동체가 교회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가 쓴 <새로운 교회가 온다>(IVP)는 그런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다. 소위 크리스텐덤 교회, 그러니까 교회가 세상 권력의 기반 위에서 존재할 때는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서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 곧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런 교회는 오히려 불의한 세상 권력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는 반성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 내는 것이어야 한다.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 모습을 보면, 역사적으로 저물어 가는 크리스텐덤 교회로서 마지막으로 발버둥 치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교회 공동체는 비유하자면 주차장이 아닌 주유소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 와서 하루 종일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름만 채우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 일상 영역 가운데 하나님나라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어야 한다. 교회에서 이뤄지는 예배·선교·교육 등 모든 활동 초점을 하나님나라 확장에 맞춰야 한다. 그것을 '하나님의 선교'라고 부른다.

프로스트와 허쉬가 쓰는 표현을 빌리면, 교회를 확장하기 위해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활동들의 의미와 양상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누군가를 교회로 데려와 예배하는 것이 전도이자 선교였다. 말하자면 선교는 도구에 불과했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따르면, 선교를 통해서 혹은 선교를 위해 예배하고 교회 내 각종 활동이 이뤄진다. 제자 훈련이나 교제를 비롯해 모든 것이 선교에 초점을 맞춘다. 그 선교는 단순히 믿는 자 숫자가 불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목회자로서 사회 현장에 자주 나간다. 사드 반대, 쌍용차 해고, 용산 참사 등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현장에 나가는 이유는 하나님나라의 임재, 하나님의 통치가 그런 곳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현장을 가야 내가 섬기는 성도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다.

우리 교회의 설교와 사역은 그런 현장에 임재하는 하나님나라와 연결된다. 그러니 생명·자본주의·빈곤·인권·노동·평화라는 언어가 교회에서 자주 통용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돕는 것, 하나님 통치 안에 들어오도록 인도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교회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대형 교회는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론적으로야 대형 교회라고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대형 교회가 되는 과정에서 건축비 같은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 순환 구조에 빠진다.

대형 교회는 말하자면 고비용을 충당하려고 대중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미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기 매우 어렵게 된다. 사실상 본질을 추구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운 구조가 됐다. 게다가 고비용 구조를 감당하기 위해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고, 그들 요구에 맞춰 교회가 움직인다. 이러니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셨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5,000명이 넘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자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왕이 되면 새로운 세상이 오겠구나' 생각했다. 예수님은 직감적으로 이들의 요구에 부흥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셨다.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썩은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늘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그렇게 인기가 많으셨던 예수님이 하루아침에 대중의 외면을 받는다.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의 길이다.

한국교회는 대형화 과정에서 요한복음 6장을 거부했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왕이 되길 거부하자 떠나갔던 사람들을 붙잡았다. 계속해서 빵을 주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형화의 길로 갔다. 그것은 예수님의 길이 아니다. 그러니 대형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 모습을 구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나님나라의 진리는 대형화를 추구하는 교회나 공동체에게 걸림돌이다. 지금이라도 대형화의 길에서 돌아서서 진정한 교회의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 개혁의 방향이다.

넘지 말아야 할 선

기득권자들이 교회의 주류가 될 수밖에 없는 대형 교회의 모순은 단순히 비판으로만 끝낼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하나님나라 진리와 너무 멀기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특별히 대한민국에서는 하나님나라 가치를 따라 살아가려 하는 순간,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우리 교인들에게 순결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당부한다. 타협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깊이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다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선은 넘지 말라'는 음성을 들려주신다. 무너뜨릴 수 없는 선을 설정하고 지키라는 것이다. 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은 타자의 강요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직종,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 처한 삶의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일률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어떤 선을 지키라고 할 수 없다. 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실존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홍성사)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실존적 타협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준다. 예수님의 형상을 밟으면 그리스도인에 대한 고문을 멈추겠다는 권력자의 잔인한 요구 앞에 로드리게스 신부는 고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내 얼굴을 밟아라"고 말씀하신다. 그 순간 신부가 하는 고뇌가 얼마나 우리 마음을 울리는가. 나도 사실 매일 그런 결정 앞에 선다. 오늘도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있다.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타협을 해야 하나. 예수님은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고 계시지 않을까. 예수님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밟아라. 네가 받는 그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내가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선은 있다. 각자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가운데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어딘지 분명히 정해야 한다. 그것만은 눈물을 쏟아 기도하면서 처절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을 밟아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너무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예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면 된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바리새인처럼 기도할 수 없는 이유다. 언제나 세리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용서받은 죄인이기에 도덕적 우월감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

이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율법주의자가 될 수 없다. 내가 그 사회 안에서 얼마나 타협하고 있는지 스스로의 처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예수님 얼굴을 밟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 사회를 변혁하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생긴다. 더 이상 예수님의 얼굴을 밟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강력한 사회변혁가로 살아가게 된다.

사회의 기득권을 많이 누리는 사람일수록 더 깊이 기도해야 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것은 더 자주 타협했다는 뜻이고, 예수님의 얼굴을 더 많이 밟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모든 지위를 당장 내려놓으라는 말은 아니다. 때로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도 생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좇아 목숨을 내놓고 순종한다면 큰일도 할 수 있다.

답은 기도밖에 없다. 예수님을 따라 순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윤리적 기준 때문에 사회적 지위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반대로 윤리적 기준을 조금 낮춰서라도 주어진 기회를 취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 결정 기준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위한 순종이다.

성경은 그런 인물들로 가득하다. 성경 자체가 타협과 변혁의 역사다. 애써 무시해 봐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이야기가 성경에 가득하다. 구약성서의 어떤 부분은 지금 봐도 급진적인 인권 사상을 보여 주지만, 한편으로 참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도 있지 않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현장 가운데 타협하신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스스로 당신의 얼굴을 밟으신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렇다. 가령 여성을 폄하하는 발언들을 그런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은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바울의 편지 곳곳에서 그런 신학이 드러난다. 당시 현실에서는 그렇게 주장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성 평등 신학은 초대교회 생존에 치명적일 수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타협을 택했다. 에베소서 5장 "그리스도 안에서 피차 복종하라"는 대헌장을 제시한 바울이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라고 했다. 일종의 타협이다.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도 모순된 주장을 한다. 종은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말한다. 그 시대의 사상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했지만, 동시에 주인들에게도 그와 똑같이 종들을 대하라는 명령을 한다.

이런 모순은 바울이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이상과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의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진실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초대교회를 보호해야 하는 바울의 고민이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빠지는 모순에서조차 느껴진다.

심지어 예수님도 그러셨다. 예수님이 얼마나 술을 많이 드셨으면 '먹보'와 '술꾼'이라는 비난을 받으셨을까? 복음서 기자가 자세히 기술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살면서 많은 부분 당신의 기준을 타협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협하지 않고는 죄인들의 친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육신 자체가 그런 타협의 결정체다.

잊지 말아야 할 기준

타협은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짐이다. 타협하지 않고, 예수님의 얼굴을 밟지 않고 살아가기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역사가 증명하듯이 점진적으로 우리 가운데 임한다. 성경 시대를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이 타협해야 했던 것들과 우리의 타협은 완전히 다르다. 바울은 노예제도가 틀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으나,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결국에는 노예제도 폐지에 헌신하지 않았나.

각 개인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듯이 각 공동체, 각 시대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주어진다. 어떤 시대에 노예제도 폐지가 소명으로 주어졌듯이, 우리 시대 한국교회에도 주어진 소명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자본주의 극복이라고 본다.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라는 명제가 한국교회 일원들에게 공통으로 인정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해법을 가질 수 있다.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타협할 수도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타협의 수위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는 기독교와 병립할 수 없다는 명제 자체는 함께 공유해야 한다. 전략과 전술이 다를 수는 있어도 전선은 같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급진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고, 또 다른 이들은 포용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기질과 관련이 있다. 서로 다를 수 있는 방법론 차이를 두고 너무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 전선이 같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서로 격려하고 함께 힘을 내야 한다. 나는 태생적으로 급진적이고 날카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포용을 주장하는 동지들 의견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때로 의견이 불일치할 때도 있지만 기본 태도는 '존중'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완벽'을 위해 부름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산상수훈을 읽어 보면, 도무지 현실 속에서 이룰 수 없는 말이 많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방법대로 살면 아마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가난하게 살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초반에 소개된 유무상통 공동체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나님나라 기준은 그만큼 높다. 그리스도인끼리 모여서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세상의 제도가 함께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나라 기준대로 살아가기 어렵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런 차원에서 세상의 제도를 바꾸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까지 추구해야 할 이상이다. 역사가 발전하고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산상수훈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어떤 상황, 어떤 상태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변혁가이자 혁명가로서 사명을 갖는다. 아직도 갈 길은 너무 멀다.

교회마다 주어진 역할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위해 존재한다. 예수님의 얼굴을 밟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각자 처한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군사, 사회변혁가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임이 곧 교회다.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되, 때로는 '내 얼굴을 밟아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겸손하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누군가는 큰 교회에서 목회해야 하고, 누군가는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 주어진 은사를 따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가운데 자기 삶을 결정하되 항상 변혁가의 소명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교회가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 변혁의 현장에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길 간절히 기도한다.
박 목사는 한국교회가 공통적으로 '자본주의의 극복'을 지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진행한 연쇄 인터뷰는 박득훈 목사를 끝으로 매듭지으려 한다. 교회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것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시대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교회야말로 이 시대를 변혁할 수 있는 원천이라는 믿음을 여전히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제대로 세워져야 비로소 하나님나라를 기대할 수 있다.

다들 한국교회 상태가 심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안에서 눈물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 인터뷰가 그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기 위한 작은 이정표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끝)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7년 9월 09일, 토 9:31 pm
평가: 0.00/5.00 [0]

답글이 없습니다.

   

   
   
www.okja.org
www.sharingkorea.net
www.ksm.or.kr
www.koramtour.net
http://www.geo10.com/krus/fl/g/0401/954/orientalmart.htm
www.smiledentalfl.com
www.kinghealthcenter.com
www.koreahouseorlando.com
www.thefountainsalonandspa.com
www.orlandotour.com
www.miju24.com/market_info/12701
www.ohmynews.com
www.saegilchurch.net
www.newsm.com
www.newsnjoy.or.kr
www.protest2002.org
www.biblekorea.org
dabia.net/xe

get FireFox
www.korean.go.kr/front/foreignSpell/foreignSpellList.do?mn_id=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