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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Pastor Choi Column 071217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호산나 칼럼] 레비나스의 '타자' 이해를 떠올리며


(LA=코리아위클리) 최태선(어지닌교회 목사)

실제로 경험했던 이야기입니다.

밖에서 놀던 일곱 살 아이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습니다.
"큰 일 났어. 하나님이 오셔."
한동안 어리둥절했지만 그 말은 곧 해석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오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날은 할아버지 추모예배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친척들은 기다리며 준비한 음식으로 술도 한 잔씩 마시면서 고스톱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는 목사님이 오고 계시니 얼른 술도 치우고 화투도 치워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바탕 웃고 난 후 사람들은 조카가 말하는 하나님을 맞았습니다.

작은 해프닝이었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의 거룩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은 거룩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분이 나타나면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어른들의 이해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을 뿐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거룩에 대한 이해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일을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연관된 일들만을 거룩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옷을 입고 경건한 마음과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고 교회로 갑니다. 방금 전 집에서 지지리 박박 싸움을 하고 왔을지언정 교회에 다다른 순간 엄숙하고 진지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그렇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거룩한 일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거룩이 무엇인지 거룩함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거룩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해에 따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많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

성서에서 거룩함은 하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넘쳐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코데쉬'인데 이는 '자르다', '떼어놓다', '분리하다' 등등의 의미입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세상과 다른 분으로서 거룩하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셔서 성과 속을 구분 지어야 하는 인간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는 절대 다른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절대 타자’라는 신학적인 용어로 담아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까 두려워 자기의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출3:6) 그분은 인간과 절대적으로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은 대등한 위치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례로 우리나라에서는 어른 앞에서는 눈을 내리깔아야 합니다. 거룩함의 현현은 다른 것의 나타남입니다. 거룩함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도록 실재 안에 자신을 나타내 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와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 안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편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고 모든 것은 거룩함이 나타나는 장소로서 신현의 장소입니다.

모든 것은 자기와는 다른 것을 드러냅니다. 거룩함의 현현 앞에 인간은 두려움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모세가 불이 꺼지지 않는 가시덤불에 접근하려 했을 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출3:5)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은 하나님이 완전히 다른 분이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다름의 현현 앞에서 인간은 성속을 구분 짓는 일상의 먼지가 묻은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발을 벗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신발을 벗는다는 것의 의미를 매우 특별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력서(履歷書)라는 말을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履라는 한자는 신발 이입니다. 이력서라는 말은 곧 신발이 다닌 모든 곳이라는 의미로 그 사람의 과거의 모든 경험을 기록한 서류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신발을 벗는다는 의미는 인간의 그때까지의 모든 경험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대로 다른 하나님의 현현, 다시 말해 거룩한 분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타자성과 거룩

그런데 레비나스의 타자의 개념은 이러한 거룩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가 생각한 형이상학은 무한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무한자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나에게로 도무지 환원될 수 없는 타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타자를 무한자로 일컫는 것은 타자의 수가 많다거나 타자는 도무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타자를 나의 인식과 능력의 테두리 안에 가둘 수 없기 때문에 무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자는 전체화의 틀을 벗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타자는 나의 자율적 의식보다 더 깊이 나의 존재와 닿아 있습니다. 타자는 나의 거주와 안락을 문제시합니다. 끝없이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자의 자유를 타자는 문제 삼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이런 사실을 깨달은 레비나스는 은혜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그의 타자 이해는 얼굴로 이어집니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사진:나무위키)

타자의 '얼굴'과 만날 때 비로소 형이상학적 욕망이 심겨지고 초월에 대한 갈망이 일어납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사유를 통해 타자와의 윤리적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형이상학'이라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율법이 신의 계시로 주어져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자의 입장이 주어지고, 그것이 '얼굴'로 다가오면 나는 단지 해석할 뿐이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를 신으로부터 오는 계시와 마찬가지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성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이 신의 계시처럼 주어져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자의 입장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다가오면 그저 해석할 뿐이지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구철학에서는 개인이 타자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굴면서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타자는 신으로부터 오는 계시와 마찬가지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어느날 제게 문득 떠오른 생각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레비나스의 타자 이해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으로 무언가 큰 그림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온 세상의 구원이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세계에게서 거룩함을 느낄 때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에 등장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을 설명하시면서, 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당신의 형제와 자매로 여기면서 그들에게 한 것이 내게 대하여 한 것이라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마지막 심판의 요점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입니다. 여하히 우리가 그들을 주님으로 생각하고 섬겼느냐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 역시 레비나스의 타자 이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레비나스는 타자가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나에게는 타자를 어떻게 대할 수 있느냐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내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인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보고 그것이 주인의 얼굴이며 그 얼굴을 보고 내가 그들을 주님을 대하듯이 한다면 그것이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를 구원하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타자의 얼굴에서 거룩함을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할수록 정말 그렇다는 확신이 강해집니다. 예수님은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하냐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 역시 타자의 얼굴에서 거룩함을 보아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존엄성, 하나님의 샬롬, 인간다운 삶 등등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자의 얼굴에서 거룩함을 보게 되는 것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방편이라는 확신이 굳어집니다. 우리가 타자의 얼굴에서 거룩함을 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곳은 성속이 없는 나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눈을 뜬 자들은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전과는 다르게 살고, 다르게 행동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눈뜬 자'는 반드시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 되어 그들과 함께하는 삶으로 초청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자비를 베푸는 자로서가 아니라 타자의 얼굴에서 거룩함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기 때문에 그들의 겸손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야말로 창조 때 하나님이 바라보시던 참된 인간관계의 모습이 아닐까요?

저의 이런 생각이 조금은 감상적인 비약이거나 지나친 억측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타자의 얼굴에서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함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모든 피조세계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특별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올려짐: 2017년 7월 14일, 금 10:5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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