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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허리케인
 
Rare book found in florida
미국땅 쓰레기통에서 횡재한 한권의 책
'꼴통' 기독교인의 '구원' 이야기...공범자 마음으로 망월동을 찾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선생님, 우리 옆집 000네 아버지가 별 둘 짜리 소장인데요, 그 아저씨가 요즘 텔레비전에 맨날 나와요. 친구들이 그러는데 그 아저씨가 박 대통령 원수를 갚으려고 그런데요."

"덱끼! 쪼꼬만 놈이 어디서 그런 요상한 소리나 줏어듣고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내가 출석하던 교회는 연희동 전두환씨와 노태우씨 집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느날 가르치던 교회 장로의 초등학생 아들이 별 둘을 단 친구 아버지가 뜨고 있는 것을 자랑 삼아 얘기했다. 그 녀석은 어느날 갑자기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선생님,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는데, 이제 누가 박정희 대통령 하는 거예요?" 라고 묻던 맹랑한 녀석이다. 대통령은 박정희만 하는 줄 알았던 시절이었으니 그리 틀린 질문은 아니었다.

어느날부터인지 머리 벗겨진 군인 아저씨가 텔레비전에 등장하여 무표정한 얼굴로 '수사 중간보고'니 뭐니 하는 것을 읽어내려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고는 있었으나, 때는 싱숭생숭 상춘가절이었다. 나는 고약한 고참의 고문에 가까운 매질에 밤마다 곡소리를 질러대던 군대생활에서 막 해방되어 복학생의 여유로움으로 조는듯 꿈꾸는듯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랬다. 제대한지 6개월이 막 지난 어느날 벌어진 군사 쿠데타로 더렵혀진 서울 하늘은 그 봄 내내 시민들의 마음한켠에 잿빛 그늘을 드리우기는 했으나, 계절만은 그 푸르름의 빛깔을 더욱 짙게 뿜어내고 있었다. 교문밖에서 흘러 들어온 최루탄 냄새를 잊어버리게 할 만큼 5월은 그때에도 여전히 푸르렀고, 깡촌 출신인 나는 그 푸르름에 흠뻑 취해 있었다. 어차피 썩어 없어질 세상에서 그들은 그들대로 아웅다웅 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고, 나는 나의 할 일이 있을 터이니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연희동 길거리에서

그러던 어느날 저녁무렵, 교회 청년부 모임을 끝내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신촌의 '데모 대학' 운동권 멤버중 2인자이며 같은 교회 청년부원이기도 했던 동년배 친구를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다소 상기된 표정의 그가 잰걸음으로 다가서더니 다짜고짜 "큰일났다"는 것이었다. 경찰의 수배를 피해 다니던 그는 "광주에서 끔찍한 대살육이 벌어져 2만 명도 넘게 죽었다"며 결사대를 조직해 광주로 가려 한다는 것이다.


▲ 1980년 5월의 광주. 학생들과 시민들이 계엄령 해제와 민주회복을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 자료사진

기가 막혔다. 아무렴 대명천지에 2만 명이 죽었다는 건 뭐고 결사대는 또 뭐란 말인가… 당시 최고의 운동권 서적이었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교회 여자 청년들에게까지 나눠주며 '선동'을 일삼던 그였다. 나는 그의 '괴담'을 무시해 버리고는 바삐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나는 당시 뜻이 맞는 몇몇 후배들과 막 관심을 끌기 시작했던 '평신도 각성' 독서 모임을 열었고, 한편으로는 한반도 서남부인 광주 해남 일대의 교회들을 대상으로한 '전도여행'을 하며 '평신도 연대'를 모색해 보기로 했다. 그 지난 겨울에 우리는 영성을 체험한다며 경기도의 한 기도원 눈밭에서 사나흘을 딩굴다 왔고, 간단한 취사 도구를 챙겨 삼각산 기도원에 들어가 밤새 기도하며 토론하다 오기도 했다.

우리의 '전도여행' 계획은 5월 18일부터 열흘 동안 광주 일원에서 '연희동 아저씨들'에 의해 벌어진 '빨갱이 토벌 작전'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예 들어갈 수 없으니 구원의 대상에 접근할 수도 없었고, 육체가 무참히 살육을 당했으니 구원받아야 할 영혼도 없어져 버린 현실 앞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 같은 현상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그냥 '허탈감', '상실감'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사회적 충격으로 인한 정신적 정상상의 급격한 상실을 의미하는 아노미(anomy)의 체험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할 듯하다.

미시간의 그 일요일

내가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고국을 떠나 푸른 꿈을 안고 유학길에 나선 후부터였다. 온통 '선진조국 건설'에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차압당한 채 살아왔던 전체주의적 분위기에 그런대로 적응하며 즐겁게 살아왔던 내게, 유학은 기존의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

분명히 기억컨데, 그날은 1987년 겨울 어느날 일요일 아침이었다. 교회에 함께가자며 학교 기혼자 아파트 맞은편에 살던 '광주 부부' 집 방문을 두드리려다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문앞에 멈칫 서고 말았다. 안에서 두런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뭔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와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숨죽인채 듣다보니 누군가 기도를 하는 소리였다. 2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절절한 '신원'의 기도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이고 아부지 하나님, 천하에 저런 나쁜 놈들을 가만 놔두시것습니까. 아이고 흑흑 아이고, 까치 새끼 같은 애를 매달아 질질 끌고가기까지 했어요. 아이고 전두환이 저런 찢어죽일 나쁜 놈을… 아이고 아부지 하나님, 흑흑 컥컥..."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다. 울분과 탄식과 원망의 외마디였다. 심장을 쥐어 짜는 듯한 탁한 목소리의 그 기도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 도망치듯 황망히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잔설이 쌓여있던 아파트 뒷켠의 긴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한참이나 몸을 식혀야 했다. 뭐랄까. 느닷없이 거대한 몸집의 누군가를 마주쳤고, '이런 무식한 놈!' 호령과 함께 눈에 불꽃이 튈 정도로 세게 따귀를 후려 맞은 느낌. 적어도 그날 아침의 경험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누미노제'의 체험이었다. '거룩한 신 존재에의 체험' 말이다.

얼마후 우연한 자리에서 그 어른이 LA에서 방문한 가까운 친척으로 교회 장로라는 사실, 그리고 LA와 뉴욕, 캐나다 등지에 광주에서 피신해온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으나, 차마 가족 중 누가 광주에서 변을 당했는지는 묻지 못했다. 언젠가 함께 운동을 하다 슬그머니 광주 이야기를 꺼냈더니 뭔가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안색이 달라지는 듯하여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찌어찌 해서 뭔가를 들었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이 장면은 1987년 필자가 광주 어른 으로부터 들었던 내용과 흡사하다.

플로리다 쓰레기 통 속에서

내가 광주의 진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맞은 것은 박사과정을 위해 플로리다로 학교를 옮긴 1년 후인 1989년 5월 말 어느날 토요일 오후였다. 페이퍼와 페이퍼, 시험과 시험에 지쳐 있다 학기가 끝나 여유로운 낮잠에 빠져 있었다. 가깝게 지내던 교회 후배가 찾아와 '00이 아빠가 공부 끝나고 급히 귀국하며 뒷처리를 부탁했다'며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졸린 눈으로 불려 나갔다.

그날 기혼자 유학생 빌리지 공동 쓰레기통에 동료 유학생이 남기고 간 옷가지와 변변치 않은 살림도구 등을 던져 넣다가 나는 일생일대의 '횡재'를 하게 되었다. 20년이 넘도록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횡재품은 다름 아닌 10여권의 소설과 비소설류 책들이었다.

그런데, 평소 말없이 먼 발치에서 목례를 하고 지나칠 정도의 친분 밖에 없던 그(딸 이름이 '예현'이었던 걸 지금도 기억한다)가 놓고 간 책들 가운데 한 가운데가 쩍 쪼개져 실밥이 나풀거리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뭘까' 펼쳐 본 책은 황석영이 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였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릴 뻔 했던 그 책은 여름 내내 나를 잠 못 이루게 하였다.


▲ 5.18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구성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한여름 이국땅 쓰레기 통에서 건져낸 광주의 실체는, 홈희담의 <깃발>에 이어 임철우의 <봄날>에 이르서는 더욱 촘촘하고 적나라하게 확인 되었고, 그때마다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이후로 보게된 몇편의 '광주 비디오'는 상상 속의 5.18에 색을 입히고 입체감을 더해 주었다.

5월에 5월을 거듭하며 광주의 진실이 역사의 앞 바다에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분명 소름돋게 하는 충격이었다. 운동권 친구가 허풍으로 말하던 '광주'는 2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느낄 만큼, "6·25때도 그런 장면은 보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올 만큼, 어느 시인이 읊었듯 '참새도 세상을 뜰 만큼' 그렇게 참혹스런 사실이었다. 이후로 매년 5월 어간에 '새로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 마다 일어난 분노에 치를 떠는 일이 반복되곤 했다.

세월이 약이런가. 1990년대에 들어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훈장이 주모자 그룹의 정치권에 의해 수여되고, 6·29라는 고단수 묘약에 완전히 분노는 풀이 꺾이게 되었고, 88올림픽의 휘황한 팡파르 속에서, 그리고 천민 자본주의의 질탕한 단내음 속에서 급기야 '불편함'으로 전이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광주는 여전히 불편한 존재다. 그러나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더욱 불편하게 다가오는 광주. 역사를 운행하는 조물주는 생략하거나 건너뛰기도 허용치 않고 꼬박꼬박 우리의 월력 속에 5·18을 챙겨넣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잊었는가 하면 다시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불쾌와 분노의 언저리를 맴돌게 하다 불편하게 하는 광주.

뒤늦게 '역사'에 철이들어 알게된 사실은, 1980년 5월 18일을 관통해온 세대는 어떤 형태로든 광주 체험으로 인한 그 어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5월이 되면 세상에 대한 것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밀려 들었고, 이에 더하여 갖가지 감정이 뒤섞이고 엉켜져서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뒤시끄런 감정이 되기 일쑤였다.

어쨌든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의 진실이 하나 둘씩 벗겨지며, 오히려 광주가 나를 구원하기에 이른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광주'는 나뿐 아니라, 아니 털끝만큼이라도 양심을 가진 한국인에게 새로운 구원의 세계에 이르게한 암호이며, 토마스 쿤이 말하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를 일으킨 일대 촉발제였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광주'는 더 이상 지명이 아니다. 광주는 한국인들의 무뎌진 양심에 날을 세우게한 암호다. 더하여, 죄악이 무엇인지,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우리시대의 암호다.


▲ 광주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멍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아이. 광주 상흔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눈망울이다. ⓒ 자료사진

망월동에서

그 광주를 너무 보고 싶었다. 미필적 고의로 인한 죄책 때문에 보고 싶었고, 사죄하는 공범자의 마음으로 보고 싶었고, 세월의 날 속에 무뎌질 것만 같은 양심을 곧추 세우기 위해서도 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20세기 분단 조국에 태어난 '나'라는 인간의 실존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역사의식의 청맹과니 상태를 벗어나게 해 주었고, 운명 공동체적 '구원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고마움 때문에 광주를 보고 싶었다.

김포 공항을 떠난지 24년 만에 밟은 고국 땅의 2월은 매섭게 추웠고, 망월동에는 찬 바람만 쌩쌩 불고 있었다. 샛길로 빠졌다는 미안한 생각에 장모님께 먼저 소재를 알렸다가 괜한 '오해'를 샀다.

"어메 김 서방, 뭔 일로 망월동에 가 있능가? 어무이 상 치르고 화장했다더니 망월동에 모셨는 갑네?"

호스피스 병동에 1년 반 동안을 누워 계시던 어머님이 내가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실눈으로 잠깐 올려다 본 후 1시간 만에 돌아가셨고, 상을 치르자 마자 고속열차를 타고 망월동에 먼저 들렀던 터 였다.

망월동에 먼저 간 사위를 어리둥절해 하시는 장모님께 얼버무리듯 말하고는 묘역을 빠짐없이 둘러 보았다. '오프시즌'이어서 그런지 방문객이 어쩌다 하나씩 눈에 띨 뿐 한산했고, 한 쪽에서 인부들이 무슨 공사를 하고 있었다.


▲ 망월동 5.18 묘역에 뭍혀 있는 민주 영령들. ⓒ 김명곤

묘지석 앞에 서서 5.18 당시 사망한 영령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영령들, 민주화 운동 공로 영령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다 보니 다시금 죄책감이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와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들 중에는 생전에 만났던 이름들도 있고, 낮익은 이름들도 있었다.

저수지에서 친구들과 멱감다 계엄군의 사격에 죽은 방광범(사망 당시 13세), 5·18 및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중단식으로 사망한 박관현, 도청 항쟁 지도부 정상용, 광주항쟁 유혈진압을 항의하며 투신한 김의기, 이성으로 우상을 타파하는데 일생을 바쳤던 리영희 교수, 거대한 민주화의 흐름에 몸을 실은 무명의 열사들…

리영희 교수님의 묘비석 앞에 오랫동안 서서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다 보았다. 파안대소 하는 모습에 밑바닥으로부터 뭉클하는 어떤 것이 목울대로 올라왔다. 밉도록 진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사람들은 단명할까.


▲ ‘시대의 은사’ 리영희 교수님의 묘비석 앞에서 한참 동안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김명곤

금방이라도 어깨를 두들기며 "공부나 열심히 해, 공부해서 실력을 길러. 나는 실력이 없는 사람이야" 그럴 것만 같았다. 고국을 떠나기 전에 인사차 연구실에 들렀을 때 마지막으로 들려준 말씀이었다. '한 말씀 해 주십사'고 주춤거리며 겨우 내뱉은 말에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 조금은 섭섭했던 기억이 있다. '주제에 딴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딴은 그랬었다. 1975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에 욱하는 마음으로 데모하다 잡혀서 이틀 저녁 보안과 취조실에서 두들겨 맞고 나온 게 고작이고, 남들 다 읽은 리 교수의 책 몇권 독파한 것, 중국문제연구소 특강에 종종 참석한 것 외에는 딱히 눈에 들 만한 짓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에 눈뜨게 된 이후 "지금 이 나이에 리영희 선생님은 무엇을 했는데 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자문을 하며 초조해 한 것은 그때 받은 '모욕' 때문이었다.

선생님을 뵌지 몇년이 흐른 후 무슨 논총인가를 발간하면서 가진 인터뷰에서 '나를 따르려 하지 말고 나를 극복하라'는 말씀을 토해내는 걸 듣고서야 '실력을 기르라'는 말의 뜻을 겨우 알게 되었다.

이런 저런 상념에 잠기다 묘비석 앞에서 꽃을 놓고는 "선생님, 24년 만에 찾아 왔는데 한 말씀 해 주시지요" 그랬더니, "글쎄, 실력을 길러서 나를 극복하라니깐 아직도 그게 안 되는 모양이지?" 그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24년을 벼른 끝에 찾은 망월동. 방문하고 나면 조금은 후련하리라던 생각은 사라지고 정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더 무거워지고 깊은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회귀해버린 지금, 미완의 5.18에 대한 역사적 무게가 다시금 어깨를 짓눌러 왔기 때문이었을 터이고, 광주가 가져다 준 구원을 살아낼 일이 그리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만치서 금남로행 518번 버스가 찬 바람을 가르며 비탈길을 숨가쁘게 오르고 있었다.


▲ 우리 땅의 민주화를 위해 산화한 영령들의 유패를 모신 5.18 기념관 내부. ⓒ 김명곤


▲ 민주열사의 묘소에서 한 부부가 무덤가의 잡초를 뽑고 있는 모습. ⓒ김명곤

 
 

올려짐: 2016년 6월 26일, 일 8:0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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