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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호산나칼럼] 역사 이해 없이 통전적 신앙 불가능
한국교회, 역사적 과오 실체 들어 내고 구체적 사죄 필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시간은 곤혹스러운 시간으로 기억된다. 이 경험은 중등부에서부터 청년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일상의 감사와 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기도와 달리 일단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기도할 때 생기는 따스한 느낌은 사라지고 무엇인지 모르는 공허함이 모은 손을 무겁게 만들었다.

힘들게 처음 열었던 기도 내용도 권세자의 안위를 위해, 귄력자의 통치가 잘 이루어져 이 나라가 안정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어눌한 중보기도의 경험은 슬프게도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민주화운동이 사회 전역에 미치고 있을 때 강단의 설교는 늘 교만의 패악과 순종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있었고, '데모하지 말라'는 마지막 당부도 빠트리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교회 침묵의 시기'를 집단으로 경험한 것이다.

시대와 역사 앞에서 무지한 신앙인

침묵의 경험은 오래갔고, 침묵은 학습되고 있었다. 시대와 역사 앞에서 개인은 무지하고, 교회는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애써 무시하거나 간과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청지기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며, 시대와 역사 앞에서는 무지한 신앙인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나라, 민족, 역사가 낯선 풍경이 된 것은 여린 신앙과 교회의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대적으로도 역사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진실은 군부독재 30년, 독재 50년의 시기 동안 철저하게 숨겨지고 감추어져왔다. 새로 출간된 대부분의 한국근현대사 제목이 '고쳐 쓴' '다시 쓰는' '거꾸로 보는' '함께 보는'이 붙는 이유가 이런 데에 있을 것이다.

과거사법으로 논란이 많을 때 "지난 일을 왜 자꾸 들추어 내냐"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난 일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는 아직 지난 일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 말의 진의는 '지났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역사를 쉽게 지나쳐왔다. '기독 청년을 위한 한국근현대사' 강좌가 개설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쉽게 지나쳐 버린 교회의 잘못을 역사 앞에서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회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 때 개신교 신도 수는 총 10만 명으로 인구대비 비율이 0.52%에 불과했다. 하지만 공식 언어가 영어로 사용되던 시기여서 미국 선교사로부터 영어 교육을 받거나 미국 유학파 출신의 개신교 신자들이 주요 관료 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1946년 당시 미군정의 최고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개신교 신자에 이를 정도였다.

폭력에 앞장선 기독교인들

개신교의 정치 진출로 개신교는 반공반소에 적극 나서게 되고, 이때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다가 월남한 목회자가 일본 천리교회가 남기고 간 재산을 미군정으로부터 접수하여 교회를 세우고 적극적인 반공운동을 하게 된다. 이 교회의 청년회는 우익청년단체 결성을 주도하고 폭력을 일삼고, 나중에는 민간인 학살 선봉에 서기까지 한다.'

민간인 학살 선봉. 한국 교회의 역사 과오는 막연한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반성은 구체적인 회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한다는 막연한 반성으로 피해가서는 안된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정확한 실체를 드러내고 구체적인 사죄가 있어야 한다.

과오는 부끄러운 것이기에 들추어내면 곪는다고들 한다. 잘못이기에 부끄러운 일이 맞다. 자꾸 들추어내면 곪는 것도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부끄러움 때문에 사과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화해는 진정한 용서 앞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한국근현대사 공부가 주는 유익이 더 있다면 통전적 기독교 세계관을 구현하고 실천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통전적 신앙관은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수직적인 관계와 인간과 인간(세계, 자연)이라는 수평적인 관계의 동시적 발현을 의미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개인중심 신앙에 치우쳐왔다. 세계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은 무관심과 나태를 경계해야 한다.

둘째로 진정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면 행동하라"는 브로노우스키의 말대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하고,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

역사 공부는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읽어 가는 것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다. 그리고 시대를 향해 품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과 이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백하는 신앙적 증거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뉴스처럼 나열된 역사의 파편들은 하나의 흐름을 갖게 되고, 신앙사로 읽혀지게 된다.

과거의 역사가 밝혀지고 있는 현재를 보자. 역사의 진실이 드러날 때마다 진실은 모두 논란이 되고 있다. 민주화운동이 진실의 수면 위에 오르자 민주화운동을 진압했던 일선 경찰과 군대에 의해 논란이 촉발되고, 친일 문제가 수면 위에 오르자 친일 문제에 자유롭지 못한 자들에 의해 정치탄압 논란으로 번져갔다. 무엇이 사실인지 헷갈리면서 진실은 '론(論)'과 '설(說)'로 치부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역사적 진실의 등장은 모두 논란적이었다. 논란이 없던 시기가 진실이 침묵되는 시기이다. 진실의 힘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진실이 말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진실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표징이 된다. 새로운 시대의 표징이 진실이라면 현재 우리의 진실은 무엇이어야 할까? 지금 세대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먼저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 세대에서 살아 보여주는 증거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꿈꾸며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고백은 역사 안에서 동시적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확증되었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가 되었다는 말이고, 어떤 반발과 저항에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이것이 진실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고백되어졌다는 것은 고난과 고통에 동참하였다는 말이고, 새로운 시대를 이미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예수의 부활이 그를 따르던 여인과 제자들에 의해 육체적인 경험으로 증거되었던 것처럼 역사와 시대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물적·사회적 경험으로 증거된다.

부활이 육체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 시대는 이미 물적·사회적으로 경험될 정도로 도래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진실에 근거해 살게 한다. 시대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표징을 좇고, 새로운 시대의 담지자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꿈꾼다. 역사를 통해 역사를 살게 하는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가 된다. / 홍 욱 표 (기독청년아카데미 한국근현대사 강사)
 
 

올려짐: 2005년 6월 13일, 월 10:5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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